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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36] 황희를 제향키 위한 소동사가 발전한 삼척 '산양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1-13 10:20:41
  • 수정 2022-11-13 10: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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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산양서원은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산양서원1길 24번지에 있다. 


산양서원은 조선시대 문신 황희(黃喜)를 제향키 위해 세운 소동사(召東祠)가 발전한 것으로, 1857년(철종 8)에 건립됐다. 1423년(세종 5)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된 황희는 이 지방에 흉년이 들자 관고(官庫)를 열어 백성을 구제했다. 삼척지방에서는 그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 소공대(召公臺)라 했다. 1516년(중종 11) 4대손 황맹헌(黃孟獻)이 이곳에 비를 세웠고, 풍우로 무너진 것을 1578년(선조 11) 6대손 황정식(黃廷式)이 다시 세웠다. 1824년(순조 24) 사림(士林)에서 소동사를 세웠고, 후에 산양서원으로 발전했다.


황희의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황석부(黃石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균비(黃均庇)이고, 아버지는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황군서(黃君瑞)이며, 어머니는 김우(金祐)의 딸이다.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출생했다.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됐다. 1383년 사마시, 1385년 진사시에 각각 합격했다. 그리고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1390년(공양왕 2) 성균관학록에 제수됐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일정 기간 은둔생활을 하면서 고려 유신으로 지냈다. 장수황씨 가문의 전승에 의하면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했다는 설화가 전하지만 역사적 사실이었는지는 판단할 수 없다. 그러다가 1394년(태조 3) 태조의 적극적인 출사(出仕) 요청을 수용해 성균관학관에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했다. 이후 직예문춘추관.감찰 등을 역임했다.


1398년 문하부우습유(門下府右拾遺) 재직 중 언관으로서 사사로이 국사를 논의했다고 문책돼 경원교수(慶源敎授)로 편출됐다가, 1398년(정종 즉위년) 우습유로 소환됐다. 이듬 해 언사로 파직됐다가 그 해 2월경 문하부우보궐에 복직됐다.



언사로 파직됐고, 곧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를 거쳐 형조.예조.이조.병조의 정랑을 역임했다. 1401년(태종 1)경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이 태종에게 천거해 도평의사사경력(都評議使司經歷)에 발탁됐다.


그 뒤 병조의랑에 체직됐다가 1402년 아버지의 상으로 사직했으나,  그 해 겨울 군기(軍機)를 관장하는 승추부의 인물난으로 기복돼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됐다. 1404년 우사간대부를 거쳐 승정원좌부대인에 오르고, 이듬해 박석명의 후임으로 승정원지신사에 발탁됐다.


1409년 참지의정부사가 되고,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대사헌 등을 지냈다. 1411년 병조판서, 1413년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질병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예조판서가 됐다.



1415년 이조판서 재직 중 송사(訟事) 처리와 관련해 육조에 문책이 내려지면서 파직됐으나, 그 해 행랑도감제조(行廊都監提調)에 복위된 데 이어, 참찬.호조판서를 역임했다. 1416년에는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실행(失行)을 옹호하다가 다시금 파직됐다.


그 뒤 조정으로 복귀해 공조판서가 됐다. 그리고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윤, 판한성부사를 역임했다. 1418년 세자 폐출의 불가함을 극간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교하(交河)로 유배되고, 곧 남원부에 이치(移置)됐다.


세종의 치세가 시작되고 이와 함께 태종의 노여움이 풀리면서, 1422년(세종 4) 남원에서 소환, 직첩과 과전을 환급받고 참찬으로 복직됐다. 1423년 예조판서에 이어 기근이 만연된 강원도에 관찰사로 파견돼 구휼했다.


그리고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에 제수되면서 강원도관찰사를 계속 겸대하였다. 1424년 찬성, 이듬해에는 대사헌을 겸대했다.. 또한 1426년에는 이조판서와 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발탁되면서 판병조사를 겸대했다.



1427년 좌의정 겸 판이조사가 됐고, 그 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했다. 그 뒤 기복돼 다시 좌의정이 됐다. 이어 평안도도체찰사로 파견돼 약산성기(藥山城基)를 답사했다. 이 때 약산이 요충지라 해서 영변대도호부를 설치한 뒤 평안도도절제사의 본영으로 삼게 했다.


1430년 좌의정으로서, 감목(監牧)을 잘못해 국마(國馬) 1,000여 필을 죽인 일로 해서 사헌부에 구금된 태석균(太石鈞)의 일에 개입해 선처를 건의했으나, 일국의 대신이 치죄에 개입함은 부당할 뿐더러, 사헌부에 개입하는 관례를 남기게 되므로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됐다.


그래서 한때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했다. 1431년 다시 복직돼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449년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하기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통리(統理)했다. 그리고 치사한 뒤에도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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