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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34] 이세필을 배향하고 있는 동해 '용산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1-11 05:57:47
  • 수정 2022-12-30 02: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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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용산서원은 1705년(숙종 31)에 최찬규(崔燦圭).최찬기(崔燦基) 등이 지방유림과 협력해 이세필(李世弼)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생사당(生祠堂)과 흥학비각(興學碑閣)을 세우고 용산사(龍山祠)라 했다. 


이세필이 죽은 이듬해인 1719년(숙종 45)에 위패를 모시고 용산서원으로 개편했다. 


1784년(정조 8)에 화재로 소실됐다가 1789년에 박문수(朴文秀).이태좌(李台佐).이형좌(李衡佐) 등이 중건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됐다. 



그 뒤 1956년에 최만희(崔晩熙).홍질현(洪櫍鉉) 등이 중심이 돼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고, 이이(李珥)와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했다. 1984년에 다시 이이와 송시열의 위패는 훼철하고 이세필만 단독 배향하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각 4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신문(神門), 고사(雇舍) 등이 있다. 사우에는 이세필의 위패가 봉안돼 있고, 동재와 서재는 유림의 회합과 학문 강론 및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고사는 서원의 관리인이 기거하는 곳이다.


이세필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군보(君輔), 호는 구천(龜川). 이항복(李恒福)의 증손이고, 이조참판 이시술(李時術)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났다.



1674년(현종 15) 제2차 복상 문제로 송시열(宋時烈)이 삭직당하자, 송시열을 적극 옹호했다. 평소에 송시열을 모르는 사이였지만, 분개하면서 선비들을 설득해 상소해 송시열의 원통함을 호소하다가 영광에 유배됐다. 적소에 5년 동안이나 있으면서도 문밖을 나가지 않았고 '퇴계집'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고 한다.


1678년(숙종 4) 귀양에서 풀려나오자 학행으로 천거돼 1680년 창릉참봉에 제수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 해 동몽교관이 됐고, 1684년 형조좌랑을 거쳐 용안현감이 됐다가 진위령을 지내고 삭녕군수로 부임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이이(李珥).성혼(成渾)을 문묘로부터 출향(黜享)하려 하자 관직을 버리고 진위(振威)로 돌아왔다. 생활이 매우 곤궁했으나, 개의치 않고 날마다 '대학' '중용'을 외우면서 ‘격물궁리(格物窮理)’ 공부에 전심했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다시 김제군수가 되고, 이어 사복시정.장악원정을 지냈다. 그 뒤 한성부우윤.형조참판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717년 상신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를 전횡하자 상소해 그 잘못을 극론했다.


고향에 돌아온 뒤부터는 성리학에 전심했다. 그 중에서도 '대학'을 가장 깊이 연구했다. 만년에는 예학에 힘을 쏟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금 예설을 두루 연구했다. 저술로는 경설을 논한 것과 예에 관해 논답한 것 등 20여 권이 있다. 또한 '악원고사(樂院故事)' 1책이 있다. 이는 묘악(廟樂)의 전고(典故)를 설명하고, 악장(樂章)에 관한 여러 사람의 논의를 수집해 엮은 것이다.


1722년(경종 2) 아들인 호조판서 이태좌(李台佐)의 추은(推恩)에 의해 이조판서에 추증됐다가 이듬 해에 다시 의정부좌찬성이 내려졌다. 영광의 백산서원(柏山書院)과 김제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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