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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32] 최부 등 해남육현을 배향하고 있는 ‘해촌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1-07 09:42:39
  • 수정 2022-11-07 18: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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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해촌서원(海村書院)은 최부(崔溥)[1454~1504], 임억령(林億齡)[1496~1568], 유희춘(柳希春)[1513~1577], 윤구(尹衢)[1495~?], 윤선도(尹善道)[1587~1671], 박백응(朴伯凝)[1525~?] 등 해남 출신 인물 6현을 배향하고 있다. 1868년 훼철됐다가 1922년 박백응을 추가 배향해 6현을 배향하고 있다. 


해촌서원은 원래 1652년(효종 3) 임억령을 모신 사우로 건립했다가 1689년(숙종 15) 해남 유림의 발의로 최부, 유희춘을 추가 배향하고, 1721년(경종 1) 윤구, 윤선도를 추가 배향해 오현사가 됐다. 1868년 조정의 명에 따라 훼철됐다가 1901년 단을 설치해 제향했다. 1922년 박백응을 추가 배향해 6현을 배향하고 있다. 



최부[崔溥]의 본관은 탐진으로 나주에 살았고, 자는 연연(淵淵)이고 호는 금남(錦南)이다. 진사 택(澤)의 아들로 성종 8년 24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뒤에 친시문과에 합격했다. 전적(典籍)으로 있을 때 ‘동국통감(東國通鑑)’ 편찬에 참여하고, 문과 중시에 급제했다. 1487년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파견됐다가 다음해 귀향 도중 풍랑을 만나 중국 태주만으로 표류해 북경을 경유 반년 만에 귀국, 왕명으로 기행문을 써서 바쳤다. 탈상 후 홍문관교리.춘추관편수관.예문관응교 등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쳤다.


그는 김종직의 제자로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김굉필 등 동문들과 함께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됐다가 갑자사화 때 처형당했다. 사관은 "최부는 공염 정직하고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문사(文詞)에 풍부하였으며, 간관이 되어서는 회피하는 일이 없었다. ··· 이때 와서 죽임을 당하니 조야가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고 평했다. 



1506년 중종의 즉위와 동시에 신원돼 승정원도승지로 추증됐고 문집에 ‘금남집’이 있다. 외손자 유희춘(柳希春)이 최부의 중국기행문을 ‘표해록’으로 간행했고, 이 책은 일본에서 주자학자 기요다군긴(淸田君錦)이 번역해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1769)라는 이름으로 간행했다.


임억령(林億齡)의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대수(大樹), 호는 임석천(林石川). 임득무(林得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수(林秀)이고, 아버지는 임우형(林遇亨)이고, 어머니는 박자회(朴子回)의 딸이다. 박상(朴祥)의 문인이다.



1516년(중종 11) 진사가 됐고, 1525년 식년 문과에 급제했다. 그 뒤 부교리.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간.전한.세자시강원설서 등 여러 직위에 임명됐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금산군수 역임 시 동생 임백령(林百齡)이 소윤 일파에 가담해 대윤의 많은 선비들을 추방하자, 자책을 느끼고 벼슬을 사퇴했다. 그 뒤 임백령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錄券)을 보내오자 분격해 이를 불태우고 해남에 은거했다. 뒤에 다시 등용돼 1552년 동부승지.병조참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557년 담양부사가 됐다.


그는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고 청렴결백하며, 시문을 좋아해 사장(詞章)에 탁월했으므로 당시의 현인들이 존경했으나 이직(吏職)에는 적당하지 않았던 것으로 사신(史臣)들이 평했다. 전라남도 동복의 도원서원(道源書院), 해남의 석천사(石川祠)에 제향됐다. 저서로는 ‘석천집’이 있다.



박백응은 조선 전기 해남 출신의 문신이다. 박백응(朴伯凝)[1525~?]은 석천(石川)임억령(林億齡)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했고 학행과 효행에도 뛰어나 해남의 육현(六賢) 중 한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박백응의 본관은 무안(務安)이고 자는 혼원(混元), 호는 취죽헌(翠竹軒)이다. 아버지는 기자전참봉(箕子殿參奉) 박안(朴晏)이며 어머니는 석천임억령의 누이 선산임씨(善山林氏)이다.


박백응은 어려서부터 임억령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했다. 박백응의 스승이자 외삼촌이기도 한 임억령은 박백응의 학문이 깊고 문장 또한 수려해 경학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박백응은 1555년(명종 10) 사마시에 급제했다. 1564년 사헌부감찰을 역임했고, 1567년에는 통훈대부에 오르고 진원현감(珍原縣監)에 제수됐다. 진원현감 재임 시에는 학교를 일으키고 충효를 강조했고 세정에 영합하지 않고 덕으로 정치를 한 목민관이었음이 ‘진원읍지’에 기록돼 있다. 



이후 벼슬에 뜻이 없어 낙향했고 해남읍 해리에 부춘재(富春齋)라는 서재를 세우고 후학을 양성했다. 1587년(선조 20) 10월 11일 사망했다.


박백응의 저서로는 ‘취죽헌유고’가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고, ‘부춘재원운’이라는 시 한 편이 집안에 전해져 온다. 


박백응의 묘소는 해남군 해남읍 해리무안박씨 문중제각 옆에 있다. 


박백응은 해남읍 해리 해촌서원(海村書院)에 배향돼 있다. 해촌서원에는 1922년 추배된 박백응을 비롯해 최부(崔溥).임억령(林億齡).유희춘(柳希春).윤구(尹衢).윤선도(尹善道) 등 이른바 해남육현을 모시고 있다.



광복 뒤에 중건했다가 1991년 현재의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해리 90-2로 이건했고 1996년 중수했다. 


해촌서원 신실인 해촌사는 앞면 3칸, 옆면 1칸, 맞배지붕 건물이다. 강당에는 해촌서원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앞면 4칸, 옆면 2칸, 팔작지붕 집이다. 외삼문은 소슬삼문으로 맞배지붕 집이다. 


해촌서원 외삼문은 숭덕문(崇德門) 편액이 있고 소슬삼문이고 내삼문 편액은 경원문(景遠門)이다. 소유자인 해촌서원보존회에서 관리하고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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