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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16] 서울양화나루와잠두봉유적(2)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1-05 18:54:12
  • 수정 2024-04-10 1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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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있는 조선후기 천주교 관련 성지(聖地)로 1997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양화나루는 당산철교 북단 인근에 위치해 있었고 안양천과 한강이 합류하는 남단은 양화나루의 대안으로 이용됐다. 마포의 양화나루는 고려 때부터 한강의 중요 도선장으로 이용됐고, 조선 초기에는 양천, 강화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으로 도승(渡丞 : 조선시대 나루터를 관리하던 종9품 벼슬)이 파견돼 나루를 관리했다. 이번호에서는 지난호에 이어 절두산 순교 성지 순예를 이어가 보자<편집자 주>


# 척화비



1866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략한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며, 그들과 교역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내용의 글을 반포, 쇄국 의지를 강하게 천명했다.


그 뒤 1871년 미국이 조선을 침략한 신미양요가 일어나고, 미군이 강화도에서 조선군과 싸운 뒤 4월 25일 퇴각하자,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에 따라 서울 종로 네거리, 경기도 강화, 경상도 동래군.함양군.경주.부산진 등을 포함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던 것이다.그 비석에는 병인양요 이래의 구호인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의 12자가 큰 글자로, 그 옆에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가 작은 글자로 각각 새겨져 있다.


옥천 척화비/지방기념물 제6호.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치른 흥선대원군이 서구열강의 무력에 의한 통상교섭을 거절하고 통상수교거부정책의 일환으로 서울과 전국 교통 요충지에 세웠던 비석 중의 하나이다.그 뒤 1882년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이 틈을 탄 일본공사의 요구로 모두 철거됐다. 그 가운데 서울에 세워졌던 척화비는 1882년 8월 종로 보신각 부근에 묻혔다가 1915년 6월 보신각을 옮길 때 발굴돼 경복궁에 보관됐다. 비석의 높이는 서로 차이가 있어 부산의 것은 1.8m인 데 비해 함양군 함양읍의 것은 1.2m이다. 그러나 너비는 대체로 40∼45㎝이고, 두께는 대체로 25㎝ 정도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추지 않은 통비(通碑)이다. 부산진에 건립된 것은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에 있는 용두산공원 내에 옮겨 세워져 있다. 함양군 함양읍과 안의면 옛 면사무소 안에도 각각 1구씩 보존돼 있다.


# 우리들의 친구,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박정환.신옥주 작, 2004년 


우리들의 친구,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박정환.신옥주 작, 2004년 김대건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1822년 충청남도 내포 솔뫼(당진)에서 독실한 천주교의 신자인 김제준의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는 50세 때 천주교에 입교했는데, 천주교 박해로 여러 차례 검거돼 고초를 겪다가 1718년 옥중에서 순교했다. 이에 김대건의 할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경기도 용인으로 이주했다. 


아버지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1839년 기해박해 때 한양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이 같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자란 김대건은 1836년(헌종 2년) 프랑스 신부 모방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생이 된다. 김대건은 최양업.최방제 등과 함께 마카오로 건너가 그곳에 있는 파리 외방 선교회에서 프랑스어, 라틴어, 중국어, 신학, 그리고 철학 등 새로운 학문을 수학했다. 


공부를 마친 김대건은 기해박해 이후로 탄압이 계속되고 있는 우리나라로 들어오려고 했으나 두 차례 실패 후 1845년 1월 비로소 국경을 넘어 한양에 몰래 들어오지만,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매우 심해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같은 해 8월 상하이에서 사제 서품을 받음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된다.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전뢰진 작, 1972년)/정부 조도로 출범(1966년)한 애국선영ㄹ조상건립위원회가 민족의 귀감이 되는 인물 15인을 선정하고, 동상 건립을 추진해 세워졌다. 조선 근대화의 선구자로서 공로를 인정받은 김대건 신부는 종교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동상건립 대상 인물로 선정됐다. 신부가 된 김대건은 프랑스의 페레올, 다블뤼 주교와 함께 상하이를 떠나 충청남도 강경으로 몰래 숨어들어와 방방곡곡을 돌면서 비밀리에 전교 활동을 한다. 김대건은 다음 해 동료 선교사들이 국내로 들어올 수 있는 비밀 입국 통로를 알아보기 위해 백령도 부근을 돌아보다가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된다.


김대건은 몇몇 대신들의 부탁으로 옥중에서 세계 지리에 관한 책을 제작하고, 영국에서 만든 세계 지도를 번역하고, 이후 여섯 차례에 걸쳐 심한 고문을 받다가 효수형(목을 베어 달아 놓는 형)을 선고받고 신부들과 교우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긴 뒤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김대건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로 천주교에 대한 모진 박해를 무릅쓰고 천주교 교리와 문화를 전파하다 죽은 순교자이다. 김대건 신부는 1984년 한국 가톨릭 20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에 온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우리나라 다른 순교자 102명과 함께 성인으로 시성된다. 


# 성인 남종삼 세례자 요한상 


병인박해 때 순교한 남종삼의 사복을 기념하기 위해, 1969년 성인의 후손인 남상철(프라치스코) 이 기증해 세웠다. 남종삼은 1984년 시성됐다. 남종삼은 1817년에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큰아버지이며 조정의 고위 관료인 남상교 아우구스티노의 양자가 됐다. 남상교는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에 조정에 나가기를 계속해 거부했지만 그는 고위 관리가 되기를 열망했다. 그는 26세에 과거에 급제해 홍문관 교리가 됐고, 36세에는 일본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영해의 현감이 됐다.


천주교 신자가 조정 관리로 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남종삼은 조선의 전통적인 행사에 참여하거나 주관해야 했다. 또한 그는 기생들과도 어울렸다. 그 모든 것들은 신앙 생활에 방해가 됐지만, 그의 많은 친척들이 그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사직할 수 없었다. 그는 가능한 한 미신행위를 멀리하려 했고 자신의 신앙과 양심에 따라서 살려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남종삼은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쳤다.


성인 남종삼의 순교사적비1863년, 그의 경제적 사정이 다시 열악해졌고, 그는 한양으로 올라와 임금의 승지가됐고, 왕족의 자녀들을 가르쳤다. 그는 섭정자 흥선대원군과 대면하는 일이 잦았다.


1866년에 러시아의 선박이 함경도에 침입했다. 조정의 모든 관리들은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베이징에 있는 프랑스인이나 영국인 세력만이 러시아를 물리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섭정자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는 천주교인들과 친분이 두터웠으므로, 승지 남종삼으로 하여금 나라 안에 와 있는 몇몇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그 일을 제안했다. 


남종삼은 영국과 프랑스와 교섭해 러시아의 세력을 꺾고 천주교를 공인받으려 했다. 흥선대원군은 베이징에 있는 프랑스인들을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남종삼에게 베르뇌 주교를 궁궐로 불러들이도록 명령했다.


남상교(성인 남종삼의 아버지)의 청덕비/현풍현감, 충주목사, 동지돈령부사 등을 역임한 남상교(아우구스티노)는 병인박해 순교자이자 남종삼 성인의 부친이다. 현풍현감을 지낼 당시 그의 청렴하고 고결한 덕행을 기려 세운 비석은 1974년 절두산으로 이전됐다. 남종삼이 베르뇌 주교를 찿으러 다닐 때, 주교는 평양에 있었다. 주교가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러시아인들은 이미 조선을 떠난 뒤였다. 게다가, 청나라에서 유럽인 선교사들이 학살 당했다는 오보가 전해지자, 그 일련의 사건들은 박해의 구실이 됐다. 천주교의 영향력이 궁궐로 스며드는 것을 싫어하던 고위 관리들은 흥선대원군에게 박해를 강하게 촉구했다.


남종삼은 외국인 선교사들을 숨겨준 일이 발각돼, 1866년 3월 1일에 체포돼 투옥됐다. 그는 많은 고문을 겪은 후, 사형을 선고 받았고, 1866년 3월 7일에 서소문 밖의 사형장에서 참수됐다. 그는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면서 죽음을 맞았다. 그가 순교하던 때의 나이는 50세였다.


남종삼 요한은 1968년 10월 6일에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 은언군과 송마리아의 묘비


정조의 이복동생이었던 은언군의 부인 송마리아는 천주교인이었다는 이유로 신유박해 대 사약을 받았고, 이 사건은 귀양 중이던 은언군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이 묘비는 둘을 사면해 철종 2년에 세운 것이다. 이름 인(은언군). 장조(莊祖, 장헌세자)의 서자(庶子)로 어머니는 숙빈임씨(肅嬪林氏)이다. 1771년(영조 47) 상인들에게 진 빚이 영조에게 알려져, 3년 동안 유배됐다. 영조가 죽자 수릉관(守陵官)에 임명되고, 1777년(정조 1)에는 흥록대부(興祿大夫)에 올랐다.


당시 실세였던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원빈)으로 들였으나 1780년에 죽자 은언군의 장자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하려 했으나, 1786년(정조 10) 아들 담(湛)이 모반죄로 유폐당하자, 은언군도 강화에 이주했다.


그 뒤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자, 우선적으로 제거돼야 할 대상으로 지목됐다.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처 송(宋)씨와 며느리 신(申)씨가 가톨릭 신부로부터 영세 받은 일로 송씨, 신씨와 함께 1801년 사사됐다. 손자 원범(元範:哲宗)이 즉위한 뒤 신원됐다. 


# 한국천주교회의 증언자 박순집 베드로 묘와 인가족 16위 순교자 현양비


순교자 박 바오로와 김 아가다 사이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부모의 신앙을 이어받으면서 성장했다. 부친 박 바오로는 성 L.J.M.앵베르[池世亨] 주교, P.모방[羅伯多祿] 신부, J.H.샤스탕[鄭牙各伯] 신부 등이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된 몇몇 신자들과 그 시신들을 찾아서 노고산에 안장했고, 1843년에는 그 유해를 발굴해 박씨 집안의 선산인 삼성산(관악구 신림동 57-1번지)으로 이장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박순집에게 전함으로써 박해 후 삼성산에서 그 위치를 확인하고 1901년 10월 21일 순교자들의 시신을 발굴하는 데 기여했다.


박순집(1830-1911)은 순교자를 모시고 그들의 유해를 찾는 일에 생애를 바친 신앙의 증언자이다. 그의 시신은 인천 용현동에 안장됐다가 1979년 절두산에 이장됐다. 후손들은 그의 가족들(16위)의 공적을 기리며, 현양비를 세웠다. 또한 바오로는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1846년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안성 미리내로 이장되기에 앞서 다른 신자들과 함께 그 시신을 찾아내 와서에 안장했다. 당시 17세였던 박순집도 서소문과 당고개를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는 김대건 신부를 보았다.


그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제 4대 조선교구장 S.F.베르뇌[張敬一] 주교, S.브르트니에르, 볼리외[徐沒禮], P.도리, 프티니콜라(Petimicolas), 푸르티에[申妖案] 신부와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등이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는 장면을 군인으로서 직접 목격했다. 병인박해 때 그의 집안에서는 조카 바오로, 고모 막달레나, 8촌 바오로 등이 순교했고, 1868년의 무진박해(戊辰迫害) 때도 다시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부친 바오로와 백부 바오로, 형 요한과 손 바르바라 부부, 이모부 손 베드로와 손씨 부부 등이 3월에 순교했고 장모 홍 유스티나가 11월에 순교했다.


박해 후 그는 교회의 밀사 최지혁, 고종의 유모 박 마르타의 딸 원 수산나 등과 협력해 프랑스의 여러 신부들을 입국시켰고, 시복 수속 작업이 시작되자. 자신이 경험을 교회 법정에서 진술하고 순교자의 행적을 증언했다. 그의 진술내용은 시복 재판의 기록 서기를 맡았던 로베르 신부가 필사해 남긴 '박순집 증언록' 3책에 기록돼 현재 절두산성지 순교 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당시 박순집은 서울 홍제동에 살고 있었는데 1888년 샬르트 성 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자 셋째 딸을 이 수녀회에 입회토록 했는데 그가 곧 최초의 한국인 수녀 가운데 한 사람인 박황월이다. 그는 이 무렵 자신의 집을 공소로 내놓고 1890년에 제물포로 이주해 전교에 힘쓰다가 1911년 6월 27일 82세의 나이로 죽었다.


# 성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상/김세중 작. 1984년 


성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상/김세중 작. 1984년 1920년 5월 18일 폴란드의 바도비체에서 군인 출신 양복점 주인과 교사 부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카롤 보이티와(Karol Wojtyla)다. 1938년 아젤로니아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연극배우 생활을 하다, 크라코프신학교에 들어가면서 성직자의 길에 들어섰다. 1946년 사제품을 받았고, 1978년 요한 바오로 1세가 교황에 오른지 34만에 사망하자 곧바로 교황에 선출됐다. 전임 바오로 1세를 기리는 의미에서 자신을 요한 바오로 2세로 칭하며, 같은 해 비(非)이탈리아계로서는 455년 만이자 슬라브계로는 사상 처음으로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과거 교회가 하느님의 뜻이라는 명목으로 인류에게 행한 각종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 최초의 교황이었다. 1992년에는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중세교회 이단 재판의 잘못을 시인하며 명예를 회복시켰고, 2000년에는 타종교와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 여러 가톨릭국가에서 행해진 인종차별, 여성에 대한 억압 등을 일일이 나열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참회함으로써 종교를 초월해 세계인들로부터 추앙받았다.


또한 가톨릭 역사상 세 번째로 긴 27년간을 교황으로 재위하면서 전 세계를 104차례, 총 129개국을 다니며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했다. 2005년 4월 2일 파킨슨병으로 선종했으며, 선종 6년 만인 2011년 5월 1일 성인(聖人)의 전 단계인 그의 복자(福者) 선포식인 시복식(諡福式)이 거행됐다./사진-박광준 기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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