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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31] 기묘사화 때 희생된 안처순 등을 배향한 ‘영천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1-01 19: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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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전남 임실군에 소재하고 있는 영천서원은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1619년(광해군 1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희생된 4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키 위해 창건됐다. 


1686년(숙종 12)에 임금이 친필로 ‘영천(寧川)’이라는 현판을 하사해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승격돼 선현배향 및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왔다. 당시 남원부 48방 중의 지사방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임실군으로 편입됐다.



이 서원은 48방 내의 30여 서원 중에서 유일한 사액서원으로 권위가 높아 우수한 학자들이 멀리에서 몰려왔다고 한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훼철됐고, 현재의 건물은 광복 후에 후손들이 복원한 것이다.


안처순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중종 때 춘추관기사관.홍문관박사.구례현감.성균관학관.봉상시판관 등을 지냈다. 사림파에 가담해 왕에게 향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근사록’을 간행해 보급했다.




안처순은 본관 순흥(順興). 자 순지(順之). 호 기재(幾齋).사재당(思齋堂) 남원 출생이다. 1513년(중종 8) 진사가 되고, 이듬해 문과에 이언적(李彦迪) 등과 함께 급제했다.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로 진출해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홍문관박사.구례현감 등을 지냈다. 


1519년 기묘사화로 파직, 축출됐으나 사림파에 대한 탄압이 누그러진 1533년에 복직돼,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경성교수(鏡城敎授).전적.양현고주부(養賢庫主簿).봉상시판관 등을 역임했다. 명문의 후예였으나 조광조가 이끈 중종대의 사림파에 가담했다. 




구례현감으로 부임할 때 국왕에게 향교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임지에서 ‘근사록’을 간행해 보급한 것은 사림파의 성리학 보급운동을 반영한다. 남원시의 영천서원(寧川書院)에 제향됐다.


서원 안에는 안처순(安處順)을 주벽으로 해 정환(丁煥), 정황, 이대유 등이 배향돼 있다. 훼철되기 전에는 사우(祠宇) 3칸, 신문 1칸, 동서협문 각 1칸, 전사고 1칸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우와 강당 및 3문만이 남아 있다. 4인의 위패가 봉안돼 있는 사우는 맞배지붕에 겹처마 건물이다. 



기둥은 두리기둥을 사용했고, 중앙에는 상부가 교창(交窓) 형식으로 된 사분합문을 달았는데, 좌우측에는 같은 형식의 2짝 10개의 분합문이 있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치됐고, 공포와 공포 사이에는 화반 1개씩을 놓았다.원내 각종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는 강당은 맞배지붕, 홑처마이고, 기둥은 두리기둥을 사용했다. 


가구(架構) 형식은 대들보위에 짧은 동자기둥을 놓고, 종보를 올린 다음 종마루를 받치는 사다리꼴의 대공을 얹었다. 매년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낸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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