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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29] 한호겸을 배향한 임실 '신안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0-30 21: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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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신안서원은 1588년(선조 21)에 신재(新齋) 한호겸(韓好謙)의 문하들이 스승을 위해 세웠고, 정유재란으로 불탄 것을 1669년(현종 10)에 다시 복립했고, 1788년(정조 12)에 사림들의 결의에 따라 돈학(遯壑) 송경원(宋慶元), 만회당(晩晦堂) 한필성(韓必聖), 홍운정(鴻雲亭) 한명유(韓鳴愈), 거묵당(距墨堂) 송시웅(宋時熊)을 추가로 배향했다. 




순조 19년(1819)~1820년간에 순창의 무이서원(武夷書院)의 예에 따라 주자의 영정을 봉안키로 해 함평 자양서원(紫陽書院)에서 모사해 와서 봉안했고, 같은 해 신안사를 신안서원(新安書院)으로 고쳤다. 1852년에는 문간공(文簡公) 당옹(戇翁) 이서(李舒) 선생을 배향했고, 1860년에는 문정공(文正公) 계산(溪山) 김수근(金洙根) 선생을 추가로 배향했다. 



1869년에 훼철된 후 1958년에 복설할 때 원래 신안면 낙천리에서 금동(琴洞) 마을로 옮겨 세웠다. 1958년 신안서원을 복설한 후 1968년 중건시 무명재(無名齋) 강백진(康伯珍) 선생을 추가로 배향하면서 신안서원에는 주부자를 비롯해 8현을 배향해 전체 9명이 배향돼 있다. 


회암 주희(晦庵 朱熹 1130~1200)는 송나라 태생으로 여러 관직을 지냈고, 휘국공(徽國公)으로 추서 받았다. 논어와 맹자 등을 집주했고, 주자학을 집대성했다. 신재 한호겸(新齋 韓好謙)은 호조참판에 증직 됐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둔학 송경원(遯壑 宋慶元 1419~1510)은 음보로 전라도사를 지냈다. 단종이 사사되자 계룡산에서 후 은거해 임실 생육신(任實 生六臣)이라 한다. 만회 한필성(晩悔 韓必聖)은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홍운 한명유(鴻雲 韓鳴愈)는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력했다. 무명재 강백진(無名齋 康伯珍 ?~1504)은 무오사화로 죽었고, 시호는 효량(孝良)이다. 함안군수, 사헌부장령, 사간원사간을 지냈고 대사간에 추증됐다. 


거묵 송시웅(距墨 宋時熊)은 효를 다했다. 계산초로 김수근(溪山樵老 金洙根 1798~1854)은 시호가 정문(正文)이다. 충청도관찰사, 대사헌, 대제학 등을 지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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