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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27] 고려 충신 길재의 혼이 담긴 '청풍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0-23 15:44:27
  • 수정 2022-10-23 15:4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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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청풍서원은 충남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에 있는 서원으로, 1678년(숙종 4)에 길재의 청절을 추모키 위해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됐다.


그 뒤 1976년과 1979년에 군의 지원으로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강당,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 비각(碑閣),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등이 있다.



사우에는 길재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돼 있다. 강당은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9월 15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고 제품(祭品)은 6변(籩)6두(豆)이다. 


길재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로, 1387년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됐다가, 13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를 지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했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면서 거절했다.



길재의 본관 해평(海平). 자 재보(再父). 호 야은(冶隱) .금오산인(金烏山人). 시호 충절(忠節). 금주지사 (錦州知事) 원진(元璡)의 아들. 구미 출생. 1363년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서 처음 글을 배웠고, 1370년 박분(朴賁)에게 '논어' '맹자'를 배우면서 성리학을 접했다. 관료로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개경에 갔다가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374년 생원시(生員試)에, 1383년(우왕 9)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고, 그해 중랑장 신면(申勉)의 딸과 결혼했다.



1386년 진사시에 합격, 청주목(淸州牧) 사록(司錄)에 임명되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음해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됐다가, 13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했다. 1389년(창왕 1)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됐으나, 이듬해 고려의 쇠망을 짐작해 늙은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구실로 사직했고, 고향으로 가는 길에 장단에 있던 이색(李穡)을 만나기도 했다. 1390년 계림부(鷄林府)의 교수가 제수됐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우왕의 죽음을 듣고 마음으로 3년상을 행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李芳遠)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했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면서 거절했다. 1402년(태종 2)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불교식 장례법을 따르지 않고 성리학적 가례(家禮)를 따랐다. 세종이 즉위한 뒤 길재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 그 자손을 서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면서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줬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며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했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고, 김숙자(金叔滋)를 비롯해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 등이 학맥을 이었다. 청풍서원(淸風書院)에 제향됐다. 문집에 '야은집' '야은속집(冶隱續集)',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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