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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28] 우암 송시열을 제향하는 '화양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0-23 16:08:58
  • 수정 2022-10-23 1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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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화양서원은 조선 숙종(肅宗) 22년(1696)에 문정공(文正公) 좌의정(左議政)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키 위해 건립됐다. 


창건되던 해에 사액(賜額)을 받고 숙종 42년(1716) 어필(御筆)로 편액(扁額)을 달았다. 전국의 사액서원(賜額書院) 중에서도 가장 이름있고 위세가 당당한 서원이었으나 제수전(祭需錢)의 봉납을 강요하는 화양묵패(華陽墨牌) 때문에 폐해가 컸다. 



묵패란, “서원에 제수전(祭需錢)이 필요하니 아무 날 아무 시간까지 얼마를 봉납(奉納)하라.”는 식의 고지서(告知書)에 묵인(墨印)을 찍어 군(郡).현(縣)으로 발송하는 것이지만, 이 묵패를 받은 자는 관(官).민(民)을 가리지 않고 전답이라도 팔아서 바쳐야 했다. 만일 불응하면 서원으로 잡혀가서 공갈.협박을 받고, 사형(私刑)을 당했다. 화양서원의 이런 행패가 극심해 흥선대원군 이전에도 여러 번 단속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1858년(철종 9) 7월에는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의 주청(奏請)으로 화양서원의 복주촌(福酒村)을 영구히 철폐시키라는 영이 내려졌다. 그것은 이 부락에 있던 지정음식점 같은 주호(酒戶)에도 불가침의 특권이 주어져서, 돈이 있는 요역기피자들이 이곳에 모여서 나라는 그만큼 피해를 보고 가난한 백성들만이 그 역을 대신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또, 1862년 3월에는 이곳 유생들이 원우(院宇)를 수리.개축한다는 명목으로 협잡배들과 전라도 지방에까지 출몰해 재물을 거둬들여서 물의를 일으켰다. 이때에도 역시 김좌근의 주청으로 금지됐다. 이 서원은 고종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됐다. 


1999년 우암 송시열 유적이 국가지정문화재(사적417호)로 지정된 후 2004년 송자사.승삼문 2동을 복원했고, 묘정비는 숙종 42년(1716)에 건립됐던 것이 서원이 헐리면서 땅속에 매몰됐으나 광복 후 찾아 다시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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