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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25] 여산 송씨 송간을 주벽으로 15위 향사하는 고흥 '재동서원'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0-18 20:27:55
  • 수정 2022-10-18 20: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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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재동서원은 여산 송씨 충강공 송간을 주벽으로 송대립, 송심, 송순례, 송희립, 송건과 김시습 등 15위를 향사하는 곳이다. 1785년(정조 9) 최초 건립 당시 여산 송씨 송간, 송대립, 송심과 고흥 유씨 유탁, 영광 정C씨 정연희 등을 봉안키 위해 두원면 운곡리에 운곡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됐다. 1848년에 유림들이 상서를 올려 서동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1868년 전국 서원철폐령 때 물훼(勿毁)의 교지가 있었던 것 같지만 이내 훼철됐다. 1956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으면서 재동서원(齋洞書院)이라 했였고 1972년에 송홍연, 송진부를 추배했다. 1980년에 건립된 같은 경내의 창효사에는 효열을 분리해 송석륭, 송명규, 송찬문, 송정규 등을 배향한다.



재동서원은 송간의 호 서재(西齋)는 마륜리 서쪽 언덕의 집을 가리킨다. 


재동서원은 처음 1785년 송간, 유탁, 정운희, 송대립, 송침 5위를 향사해 운곡사를 시작됐다. 10년 뒤 위차 문제가 있었으나 송간에게 시호가 내려졌기에 단독사우로 재동사라 칭했다. 그 이후 육충사(1801)-세충사(1833)-충강사(1956)-재동서원(1965)내에 창효사(1980)의 추가건립까지 배향인물 변경과 명칭변경이 있었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는 44위의 충열(忠烈)을 기리는 '여산송씨충강공후손임란공신추모비'가 있다. 



44충열이라 함은 임진왜란에 참전해 선무원종공신녹권을 받은 사람이 20위, 녹권은 없으나 크게 공을 세운 분이 24위이다. 왼편으로는 재동서원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커다란 충효(忠孝)비가 서있다. 외삼문(진수문)을 들어서면 동재(구인재).서재(명의재)가 있고 내삼문을 들어서면 서재 송간, 매월당 김시습을 주벽으로 송대립, 송심, 송순례, 송희립, 송건 등 임.병난 충신 9위가 배향된 서동사와 사우 경내를 확장해 효자 4위를 배향한 창효사를 별건했다. 


그리고 경효재를 강당으로 살리고 내삼문(양호문)은 그대로 두는 등 각각의 기능에 맞게 배치를 했다. 1868년(고종5년) 서원 철폐령 직후 서동사는 물훼령(勿毁令)의 교지가 있었으나 이미 훼철된 후라 아쉽게 여겼으나 1956년 현 위치에 복설했다.




재동서원 서동사에 배향된 인물 중에서 단연 여산 송씨 고흥의 입향조이면서 단조초혼칠현신인 충강공 서재 송간(1405-1480)이다. 조선초기의 충신으로 세종.문종.단종 3조를 섬겨 벼슬이 형조참판, 가선대부에 올랐다. 단종 비였던 정순왕후는 송현수의 딸로 여산 송씨 가문이었다. 


송간은 1455년 단종의 명으로 팔도도진무사로서 호남지방을 순무하던 중 세조가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관직을 버렸다. 고향인 여산에 내려가 있다가 단종이 영월로 쫓겨나자 사촌 동생 둔학 송경원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영월로 가서 자규루에 오른 단종을 만나 통곡과 함께 복명을 마쳤다. 그 후 다시 고향에 내려와 두문불출했다.




1457년 10월, 단종의 훙거(薨去) 소식을 듣고, 공주 계룡산 동학사로 들어가 호장 임흥도가 거둬 온 어포로 초혼해 김시습 등과 초혼제문하고 방상 3년상을 지냈다. 그 후 동생인 이성현감 송시, 은률현감 송희 그리고 맹유, 중유, 계유, 백유, 숙유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모두 아버지와 함께 고흥 마륜촌으로 내려왔다. 




송간은 뒷산에 '서산정'이라는 띠집을 지어 숨어 지냈다. 단종을 사모해 북향 배곡할 뿐 항상 술에 만취해 산천을 돌아다녔다. 다른 선비들과 달리 후손이나 후학들 교육마저 마다하고 세상을 한탄하면서 광인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송씨 가문에서는 문인들보다 무인들이 많이 배출됐다. 실제로 후손들 가운데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공을 세운 인물들이 많다. 수군통제사 이순신의 휘하에 종군했다가 선무원종 1등 공신으로 책록된 송대립.송희립 형제를 비롯해 수십 명의 임란 공신들이 배출됐다.



송간의 충절에 대해 정조는 1972년 자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지의금부사로 증직하고 충강(忠剛)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충강공 서재 송간의 묘는 벌교읍 척령리 원동에 있고 제각인 영보재는 1800년에 후손들이 세웠다. 영보재 입구에는 종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의 무덤 앞에 세우는 신도비가 2기 있다. 송간 선생의 행적을 모은 '서재실기'는 재동서원 유물관에 보관 중이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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