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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26] 안방준을 추모하고 있는 보성 '대계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0-18 20:5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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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1657년(효종 8) 지방유림의 공의로 안방준(安邦俊)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키 위해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이 서원은 중앙의 정치적 변화에 따라 훼철과 복설이 거듭됐다. 1691년(숙종 17)에 안방준 사우에 대한 훼철이 결정돼어 이듬해 능주의 도산사(道山祠)와 함께 훼철됐었으나 그 뒤 1695년(숙종 21)에 이르러 복설됐다.


1704년(숙종 30) ‘大溪(대계)’라고 사액돼 사액서원으로 승격ㄷㅙㅆ고, 1780년(정조 4) 화재로 전소된 것을 1784년에 중건했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됐다. 현재는 사단법인 은봉선생기념사업회에서 2012년 11월 같은 자리에 대계서원을 복설해 조문사, 숭도문, 서원격치재, 은봉유물전시관 등이 들어서 있다.



안병준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峰).우산(牛山),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부친은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안중관(安重寬)으로, 숙부 안중돈(安重敦)에게 출계되었다. 생모는 진원 박씨(珍原朴氏) 박이경(朴而儆)의 딸이고, 처는 판관 경주정씨(慶州鄭氏) 정승복(鄭承復)의 딸이다. 어려서는 박광전(朴光前).박종정(朴宗挺)에게 수학했고, 지기(志氣)가 굳세고 절의를 숭상해 정몽주(鄭夢周)와 조헌(趙憲)의 호를 한자씩 따서 호를 은봉이라 했다.



1591년 파산(坡山)으로 가서 성혼(成渾)의 문인이 됐고, 오윤겸(吳允謙).황신(黃愼).신응구(申應).권극중(權克中).한교(韓嶠) 등과 교유했다.


임진왜란 때는 박광전과 의병을 일으켰고, 정묘호란.병자호란 등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병자호란 뒤에는 오랑캐를 불러들인 원인이 화의(和議)에 있다는 통렬한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광해군때는 이이첨(李爾瞻)이 그 명성을 듣고 기용하려 했으나 거절, 1614년 보성 북쪽 우산(牛山)에 들어가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몰두했다.





서인계인 정철(鄭澈).조헌(趙憲) 등의 문하에 출입했고, 인조반정공신인 김유(金瑬).이귀(李貴)와 비공신계인 성문준(成文濬).송준길(宋浚吉) 등과 친교가 있어 서인 집권하에서는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학자로 조정에 거듭 천거됐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교유가 깊던 공신 김유에게 글을 보내 당쟁을 버리고 인재를 등용해 공사(公私)의 구별을 분명히 할 것을 건의했다. 1624년 동몽교관(童蒙敎官).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등에 임명됐으나 사퇴했다.





인조 후반에 전생서주부.찰방.좌랑 등을 제수받았는데 나아가지 않고, 거듭 상소해 시정(時政)을 논했으나 현실과 부합되지 않은 내용이 많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효종이 즉위한 뒤 좌의정 조익(趙翼)의 천거로 공조좌랑(工曹佐郞).사헌지평(司憲持平).장령(掌令)을 거쳐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했다. 효종 초 지방의 유일(遺逸)을 초치해 등용하려했을때 선우협(鮮于浹).최온(崔蘊).조극선(趙克善).권시(權諰).이유태(李惟泰) 등과 함께 천거됐다.





1652년 대동법(大同法)을 반대하면서 김육(金堉)을 선조조의 유성룡(柳成龍)에 비유하면서 비난했다.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됐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보성의 대계서원(大溪書院).동복(同福)의 도원서원(道源書院).능주(綾州)의 도산사(道山祠)에 제향됐다. 시문은 '은봉전서(隱峰全書)'에 수록돼 전해지고 있다. 조헌을 추모해 '항의신편(抗義新編)'을 편찬한 바 있고, 서인의 이귀(李貴)는 이를 인간(印刊), 중외에 반사(頒賜)할 것을 인조에게 건의했다. 그 밖에 '이대원전(李大源傳)' '호남의병록(湖南義兵錄)' '삼원기사(三寃記事)' '사우감계록(師友鑑戒錄)' '혼정편록(混定編錄)' '매환문답(買還問答)' '기묘유적노랄수사(己卯遺蹟老辣瀡辭)' 등이 있다. 이러한 편저는 의병사.당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어려서부터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에 힘쓰면서 군서(群書)를 박람(博覽)했고, 예학(禮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힘쓴 것은 위기(爲己)와 경세구민(經世救民)의 학문이었다. 글씨도 잘 썼는데, '근묵(槿墨)'에 간찰이 전한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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