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수원화성 둘러보기2] 실용적인 구조로 돼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 '수원화성(2)’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0-14 22:37:33
  • 수정 2023-12-21 14:38:25

기사수정

지난호에 이어 


[박광준 기자] # 화홍문




수원화성 북쪽 수문 화홍문(華虹門)의 무지개 모양의 7칸 홍예다리는 안양 만안교와 함께 우리나라 홍예다리 가운데 가장 긴 것 중 하나이다. 그 위에 세운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문은 바깥쪽을 향해 포루처럼 사용한다. 화홍문 위 좌우에는 돌로 만든 해태같이 생긴 이무기가 팔각기둥 위에 다소곳이 앉아 고개를 외로 틀고 있다. 이는 다른 문에서는 볼 수 없는 귀엽고 특별한 조형물이다.


화홍문 앞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사진출처-수원화성박물관광교산 깊은 계곡에서 흘러내려온 물줄기가 이곳 북수문의 7개 홍예를 지나는 것을 칠간수(七澗水)라 부른다. 물줄기는 7개 홍예 사이를 폭포수처럼 빠져나가 수원화성 한복판을 가로질러 남수문으로 빠진다. 정조는 수원팔경의 하나로 화홍관창(華虹觀漲)을 꼽으면서 이곳의 맑은 폭포수가 옥같이 부서지는 장관을 즐겼다고 전한다.60여 년 전만 해도 널찍한 개천의 폭에 큼직한 바위들이 깔려 있어서, 곧잘 아낙들의 빨래터로 이용되곤 했다. 


# 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화홍문 동쪽 높은 벼랑 위에 세워져 있다. 한국의 건축미와 정자문화를 맘껏 자랑하는 정교하고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정자이다. 동북각루라고도 불리는 이 정자의 이름은 중국 송나라 때 학자이며 시인인 정명도의 시 ‘운담풍경근오천 방화수류과전천’(雲淡風輕近午天訪花隨柳過前川, 구름 개어 맑은 바람 부는 한낮 꽃 찾아 나선 길/ 버드나무 따라 앞 개울가를 지나네)에서 딴 것이라 전한다. 정자에는 원곡 김기승(原谷金基昇)이 쓴 정자 이름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는 높고 경사진 지형을 이용해 지었다. 꾸밈없이 자연스러운데다가 앙증맞다 할 만큼 작지만 그 자태가 단아하면서도 활달하다. 좁은 공간을 활용했기 때문에 정자의 모양도 격식에 구애됨 없이 지었다. 특히 마루 한쪽이 좁게 비어져 나가게 놓여 있다. 채벽은 십자형으로 꾸몄고 단조로움을 피해 독특한 무늬를 가미했다.


정자 아래로는 둥그런 용연지를 꾸몄다. 거기에 용머리바위가 있어 용연지라 불렀다고 전한다. 현재 용머리 형상은 없다. 용연지 한가운데로는 자그마한 녹색지대의 섬을 만들었다. 연지 주변과 연지 안의 섬에는 푸른 잔디, 휘늘어진 능수버들, 잔향나무 등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용연지에서 바라본 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은 전시에는 적군 감시와 방어 기능을 갖췄으나, 평시에는 휴식공간으로 중요하게 여겼음직하다. 아름다운 건축미와 공간 활용, 자연스런 조화로 보아 설계자의 안목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정자는 각루의 군사적 기능보다는 호화로운 운치와 풍류를 논하는 정자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됐다. 건축미로 보나 예술적 가치로 보나 조선 후기를 대표할 만한 걸작이다. 장안동에 있고, 사적이다.


# 연무대(동장대)와 활터



연무대라고도 한다. 지형상 높은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험하게 높이 솟아 있는 곳으로 동쪽구릉인 선암산(仙巖山)의 요지이자 성 중에서 지휘소를 설치할 만한 요충지이다.


3단으로 쌓은 대가 있고, 3층의 대에서는 총수(銃手)가 숨어서 쏘기에 편리하게 했다. 한가운데에는 좌우에 와장대(臥長臺)를 설치하고 흙을 판판하게 했고, 바닥을 돌로 깔아 말을 타고도 장대에 올라갈 수 있게 했다. 장대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의 합각기와지붕이다. 


건물 주변에는 터를 넓게 잡아 동서 80보, 남북 240보 규모의 조련장(操鍊場)을 만들었다. 부속사(附屬舍)는 창고로서 정면 4칸 측면 1칸의 단층 3량 집이다. 성벽 밖으로 돌출된 노대(弩臺: 서노대)를 세웠는데, 이곳은 쇠뇌를 쏘는 군사인 노수(弩手)가 머물던 곳이다. 1795년(정조 19) 7월 15일 묘시(卯時 6시)에 터 닦기 공사에 착수해 8월 10일에 상량하고, 같은 달 25일에 장대 건물을 완공했다.


활터와 동북공심돈연무대는 솟을삼문에 정면 5칸인 잘생긴 기와집이다. 수원화성 동쪽 군사들을 지휘하던 훈련장으로 동장대라고도 한다. 연병장의 지휘본부로, 빈 터에 누각만 남아 있던 것을 1977년 수원화성을 복원하면서 주변의 담장과 석축계단을 옛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연무대 옆 성벽 밖으로는 넓은 활터가 있다. 정조도 활쏘기를 매우 즐겼다고 한다. 요즘은 궁술을 아끼는 수원시민들이 심신을 단련하고 있다. 그 활터가 끝나는 지점의 성벽에는 동북공심돈이 자리잡고 있다. 커다란 둥근 집 위에 누각을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물이다. 


# 봉돈


성의 동쪽에 있는 재래식 통신시설로, 성을 지키고 행궁을 보호하는 시설물로 성곽보다 훨씬 높이 쌓아 5개의 커다란 연기통을 내었다. 사방 어디서든 볼 수 있어 신속히 정보 전달의 임무가 수행되도록 신호를 보내는 곳이다.



성곽 밖으로는 5.5m나 돌출시켜 여러 개의 총구를 뒀다. 외벽 아래는 돌로 쌓고 중간부터는 벽돌로 쌓았다. 내벽은 거의 벽돌로 쌓고 층단을 뒀고, 위쪽으론 화덕을 두고 아래에는 온돌방을 설치해 교대근무자가 쉴 수 있게 배려했다. 평상시엔 맨 남쪽 화두만 사용한다. 저녁마다 횃불을 올리면 동쪽의 용인 석성산 봉수에서 신호를 보내오고, 서쪽으로는 수원 흥천대의 바닷가 봉수와 연결됐다. 수원화성의 봉돈은 현존하는 가장 발달된 봉화시설이다. 


봉돈 하나에 불길이 오르면 성 주변에 이상이 없고, 불길 두 개가 오르면 적의 출현, 불길 세 개가 오르면 적이 접근중이고 불길 네 개는 적의 상륙, 불길 다섯 개는 적과의 접전 중임을 의미한다.


# 행궁터와 낙남헌.화령전


정조 20년(1796) 팔달산 동쪽 기슭에 행궁을 건립했다. 행궁의 기능은 보통 셋으로 분류한다. 전란을 피하기 위해 머무는 경우와, 지방의 능에 참배하러 갈 때, 잠시 휴양삼아 지방으로 나들이할 경우 왕이 머무는 곳이다.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에 거동하는 일이 잦았고, 마침내 수원화성을 축조케 됐으니, 행궁을 짓는 일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이곳에서 효율적으로 국사를 돌볼 수 있을 정도의 규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완성된 행궁은 약 570칸 정도의 대규모 건물이었다. 가정집의 본채 격인 정당.봉수당이 69칸, 내당인 복내당이 67칸, 정문 격인 신풍루가 27칸, 서리청.집사청이 83칸 등 요소요소에 전각들이 넉넉했다. 이렇기 때문에 수원행궁은 사도세자의 능참길에 들르는 행궁이라기보다 정조와 수원유수 등이 정무를 보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장차 정조의 개혁정치가 빛을 발할 곳이었다.그러나 정조는 곧 이승을 하직하고 말았으니 조선시대의 마지막 현왕(賢王)은 이승에서의 삶이 너무 짧았다. 


20세기를 맞아 수원행궁터에 들어선 것은 서양식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다. 1910년 무렵이다. 자혜의원은 그 뒤 도립병원으로 바뀌었고, 차츰 관공서와 민가가 들어서 수원행궁은 자취를 찾기 어렵게 됐다.현재 행궁터에 남아 있는 건물은 낙남헌뿐이다. 



신풍동 신풍초등학교 운동장 끝에 있는 낙남헌은 당시 봉수당 북쪽에 있던 정면 5칸 측면 4칸 집으로, 초익공양식의 팔작지붕집이다. 그나마 일부가 소실됐고, 벽체와 내부는 개조했다. 


화령전은 신풍초등학교 후문 앞에 있다. 순조가 부왕인 정조의 어진(御眞)을 모시고 부왕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조선 말까지 수원유수와 판관들이 관리했고, 해마다 제향을 드렸다. 정조의 어진은 일제시대를 겪으면서 창덕궁으로 옮겨 보관했는데, 그 무렵에 그만 분실되고 말았다. 1992년 수원시에서 새로이 복원해 봉헌하고 있다. 


# 서장대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서 상층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의 모임지붕으로 돼 있다. 뒤편에는 8면의 노대(弩臺: 서노대)를 세웠다. 이곳은 쇠뇌를 쏘는 군사인 노수(弩手)가 머물던 곳이다. 또한 현재는 복원이 안됐으나 후당(後堂) 3칸을 지었다. 서쪽 두 칸은 온돌이고, 동쪽 1칸은 판자를 깔았다. 모두 창과 분합문을 설치하고 단청을 했다.



이곳은 성의 안팎이 모두 한눈에 들어와, 화성 성곽 일대는 물론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백 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할 수 있다. 1794년(정조 18) 8월 11일 터 닦기 공사에 착수했고, 9월 16일에 상량하고, 같은 달 29일 완공됐다. 정조가 '화성장대(華城將臺)'란 편액을 직접 썼다./다음호에 계속(사진-박광준 기자)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