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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의 작가 매월당 김시습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0-06 08:46:06
  • 수정 2023-09-03 03:2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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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릉 매월당 김시습 기념관


[박광준 기자]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몸을 깨끗이 보전하여 윤강(倫綱- 삼강오륜)을 어지럽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김시습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후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의 작가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세조에게 밀려난 단종에 대한 신의를 끝까지 지키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자연에 은거한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그의 일생은 동가숙서가식하는 떠돌이의 삶이었지만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기는 지식인의 의무에는 누구보다 엄격했다. 그 결과 율곡 이이로부터 백세의 스승이라는 칭송을 듣기도 했다.


김시습은 강릉 김씨로 태어난 곳은 서울의 성균관 부근이었다.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청한자(淸寒子).벽산(碧山)이었고, 법호는 설잠(雪岑),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그의 집안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문재(文才)를 드날린 것에 비해 대를 이은 무반의 집안이었다.



김시습은 3살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했고, 한시를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그의 나이 3살에 유모가 맷돌을 가는 것을 보고 한시를 지어 온 동네뿐만 아니라 궁궐에까지 신동이란 소문이 퍼졌고, 다섯 살에는 그의 소문을 들은 세종의 부름을 받고 궁궐에 들어갔다.


이때 세종은 승지를 시켜 어린 김시습에게 여러 가지 시를 지어보게 했는데, 김시습은 세종의 요구에 맞춰 시를 척척 지어내어 임금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김시습을 영특하고 귀엽게 여긴 세종은 비단 50필을 하사하고 훗날 성장해 학문을 이루면 큰 인재로 쓰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김시습이 이날 세종에게 받은 비단을 직접 묶어 허리에 차고 궁궐을 나갔다는 일화는 지금까지도 유명하다.


사람들은 5세의 나이로 임금의 부름을 받은 데다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김시습을 이후 ‘김오세’라고 불렀다. 50세 무렵 김시습은 어렸을 때 궁궐에 갔던 기억을 되살려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아주 어릴 때 황금 궁궐에 나갔더니 少小趨金殿영릉(세종)께서 비단 도포를 내리셨다 英陵賜錦袍지신사(승지)는 날 무릎에 앉히시고 知申呼上膝중사(환관)는 붓을 휘두르라고 권하였지 中使勸揮毫참 영물이라고 다투어 말하고 競道眞英物봉황이 났다고 다투어 보았건만 爭瞻出鳳毛어찌 알았으랴 집안일이 결딴이 나서 焉知家事替쑥대머리처럼 영락할 줄이야! 零落老蓬蒿


이처럼 어려서부터 명성을 드날리던 김시습이었지만 사춘기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가정적인 역경이 시작됐다. 어머니의 산소에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한 김시습은 아버지의 재혼으로 외가에 맡겨졌다. 그러나 곧이어 그를 돌봐주던 외숙모마저 죽고, 아버지마저 중병에 걸리는 등 고난이 계속됐다. 그 와중에 김시습은 훈련원 도정 남효례의 딸을 아내로 맞았지만 결혼생활 또한 순탄치 못했다.


# 생육신으로 절개를 지키다


김시습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를 큰 인재로 쓰겠다고 약속한 세종이 사망한 후 일어난 정치적 혼란은 그가 장차 관료로 나가 나라 일을 할 뜻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21세 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를 하던 김시습은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해 하던 공부를 접고 책도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됐다, 법명은 설잠(雪岑)이었다.



이로서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로 세상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섯 사람 중에 한명이 됐다. 이들을 생육신이라고 한다. 이들은 김시습을 비롯해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여섯 사람이었다. 


사육신(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은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돼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지만 이들 생육신은 살아 있으면서 귀머거리나 소경인 체 하면서 벼슬길을 권하는 세조의 부름을 거역하면서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이와 함께 김시습은 단종 복위를 꾀하다 세조에 의해 군기시 앞에서 거열형을 당한 사육신들의 시신을 수습해 지금의 노량진에 매장한 사람으로 ‘연려실기술’에 기록돼 있다. 권력욕에 취해 서슬이 퍼런 세조가 두려워 아무도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지 않고 방치해 뒀는데, 김시습이 거열형으로 찢어진 이들의 시신을 하나하나 바랑에 담아 한강을 건너 노량진에 묻었다는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묘에 기초해 숙종 때 사육신이 다시 복권되면서 사육신의 묘가 크게 조성됐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묘이다.



승려가 된 후 김시습은 9년간 전국 방방 곡곡을 방황했다. 그 방황의 결과로 그는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해 그 후지(後志)를 썼다. 


한편, 김시습은 생육신으로, 선비된 자로서 세조의 녹을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승려로서는 잠시 세조의 일을 도운 적이 있다. 세조 9년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불경을 한글로 풀이하는 일)을 도와 내불당에서 10일간 교정을 보기도 했고, 역시 효령대군의 청으로 원각사 낙성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잠시 머물렀을 뿐 김시습은 서울을 등지고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烏山室)을 짓고 입산했다.


# 김시습 시문


등루 (登樓)


해질녁 산색은아름답고

오래된 역의 누대에 오른다

말은 울고 사람은 멀어지고

물결은 고요하나 노 젓는 소리 부드럽다

유공의 흥취가 열지 않아

완찬의 근심을 녹일 만하다

내일 아침이면 관 밖을 건너리니

저 멀리 구름 끝에 산봉우리들 빽빽하다.



사청사우 (乍晴乍雨)


언뜻 개었다가 다시 비가 오고 비 오다가 다시 개이니

하늘의 도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세상 인정이라

나를 기다렸다가 문득 돌이켜 나를 헐뜯고

공명을 피하더니 도리어 스스로 공명을 구함이라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봄이 어찌 다스릴고

구름 가고 구름 오되 산은 다투지 않음이라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반드시 기억해알아두라

기쁨을 취하려 한들 어디에서 평생 즐거움을 얻을 것인가


위천어조도 (渭川漁釣圖)


독목교 (獨木橋)

푸른 물에 작은 외나무다리

하늘거리는 남기 푸른 노을 건너

비 맞아 아름다운 언덕의 이끼 꽃

가을빛 짙은 못 봉우리에 그름 감도는데

시냇물 소리 무생의 설법을 하고

솔바람 소리 태고의 거문고를 타네

그 절 여기서 멀지 않겠거니

밝은 달 아래 잔나비 소리 들리는 이곳이 동림사



무제 (無題)


종일 걷는 나그네길이

산을 넘으면 푸른 산이 또 앞에 서 있네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닌데 어찌 메어 있는고

진리는 이름 질을 수 없는것 가식이 있을 수 없네

이슬비 내린 아침을 산새는 지저귀고

봄바람 부는 들길에 꽃이 피어 있네

지팡이를 짚고 산으로 돌아가니

아지랑이는 밀려 가네 날씨도 맑아지네


도중 (途中)


맥의 나라 이땅에 첫눈이 날리니

춘성에 나뭇잎이 듬성해지네

가을 깊어 마을에 술이 있는데

객창에 오랫동안 고기맛을 못보겠네

산이 멀어 하늘은 들에 드리웠고

강물 아득해 대지는 허공에 붙었네

외로운 기러기 지는 해 밖으로 날아가니

나그네 발걸음가는 길 머뭇거리네



# ‘금오신화’를 쓰다


금오산실에서 칩거하면서 김시습은 ‘매월당’이란 호를 사용했다. 이곳에서 김시습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알려진 ‘금오신화’를 집필했다. ‘금오신화’는 전기체 소설의 효시로서 현재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등 5편이 남아 있다. 현전하는 책의 구성으로 보아 이보다 더 많은 글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는 주인공 양생이 만복사에서 부처님에게 아름다운 배필을 점지해 달라고 발원해 3년 전에 죽은 최낭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이다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는 홍생이 평양의 부벽루에서 술에 취해 잠든 사이, 천년 전에 죽어 하늘에 올라가 신선이 돼 잠시 인간세계에 내려와 부왕의 묘에 참배하고 돌아가는 기자왕의 딸과 하룻밤의 사랑을 나눴다는 이야기이고,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은 이생과 최낭자의 자유로운 사랑이야기로 죽은 아내의 환신과 다시 만나 부부 관계를 계속하다가 아내의 환신이 사라짐으로써 부부생활이 끝나는 내용이다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는 박생이 평소 불교의 지옥설에 회의를 품고 있었는데 어느날 꿈속에서 지옥으로 가서 염라대왕과 오랫동안 불교와 유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나왔다는 이야기이고, '용궁부연록 (龍宮赴宴錄)'은 한생이 용왕의 초청으로 수궁에 들어가 상량문을 써 주어 자신의 재주를 내보이고 선물을 얻어가지고 돌아온 이야기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개 아름다운 외모에 뛰어난 재주가 있는 인물들로, 모두 현실 세상을 등지고 몽유적 세계 속에서 기이한 일을 겪는다. 이전의 한문 창작물들과는 달리 주인공은 우리나라 사람이고, 배경 또한 우리나라로 돼 있어서 한국적인 풍속과 사상, 감정이 잘 녹아 있다. 


‘금오신화’는 중국 명나라 때의 소설 ‘전등신화’의 영향을 일부 받았다고 추측된다. 작품 속에서 인간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이에 반해 인간을 압박하는 것들에 대해 강력한 대항을 하고 있어 자유와 초월을 갈구하는 작가만의 개성적인 세계관이 담겨 있다. ‘금오신화’는 우리나라 한문소설의 기준을 세웠고, 이를 시작으로 이후 많은 한문 소설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금오신화’는 창작 당대부터 희귀본이어서 옛 문헌에 이따금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뿐, 한말 이래 소설 자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일본에서 전해오던 목판본 ‘금오신화’를 최남선이 발견해 잡지 ‘계명(啓明)’ 19호를 통해 1927년에 국내에 소개하였다. 이때 발견된 목판본에 현전하는 5편이 수록돼 있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1952년에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였던 정병욱이 필사본을 발견했다.


금오산실에 머무는 동안 김시습은 소설뿐만 아니라 많은 한시들을 썼는데 이들은 ‘유금오록(遊金鰲錄)’에 남아 있다.



‘금오신화’를 쓰고 난 뒤 김시습은 경주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에 올라와 수락산 등지에서 승려로 10여 년을 산다. 그러다가 40대 후반 문득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기 시작했고 안씨 성을 가진 여인과 결혼하는 등 환속했다. 


그러나 곧이어 성종대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나고 정국이 흉흉해지자 다시 길을 떠나 강원도 일대를 유람했다. 김시습은 방랑생활 동안 지방의 젊은 선비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여행지마다 시를 써서 남기기도 했다. 말년에 김시습은 부여의 무량사에 거처를 정하고 이곳에서 병사했다. 그의 유해는 유교식이 아니라 평생을 살아온 대로 불교식으로 화장했고, 유골은 부도에 안장됐다./사진-박광준 기자


참고문헌 김시습[金時習] -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작가이자 생육신의 한사람 (인물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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