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한국의 서원 53 청도군 편] 김일손 선생의 숨결이 묻어 있는 곳 ‘자계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8-19 03:21:04
  • 수정 2022-12-26 10:51:18

기사수정

[이승준 기자] 코로나19로 인해 잠정적으로 여행을 중단됐던 본지가 다시 한국의 서원을 준비했다. 현재까지 확인한 바 전국에 서원은 대략 500여 개의 서원들이 흩어져 있다. 이러한 서원들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면서 한국의 서원들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기를 기대해 본다. 이번 호에서는 경북 청도군에 소재하고 있는 서원을 살펴본다.<편집자주>

 

# 자계서원



자계서원은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에 있는 조선전기 김일손을 추모키 위해 창건한 서원으로, 시도유형문화재이다. 


1518년(중종 13)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일손(金馹孫)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자계사(紫溪祠)를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1576년(선조 9) 서원으로 승격됐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됐다가, 1615년(광해군 7) 중건하고 김극일(金克一)과 김대유(金大有)를 추가 배향(配享)했다.


‘자계’는 연산군 4년 무오사화(1498)로 김일손이 화를 입자 서원 앞을 흐르는 냇물이 3일 동안 붉게 변한데서 유래했고, 서원 이름도 자계서원이라 부르게 됐다.




김일손은 청도 출신 중에서 후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 중 하나이다. 1498년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발단이 돼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해 사형을 당했다. 김일손의 죽음은 김해 김씨 일족뿐만 아니라 지역 인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쳐 청도 지역에 16세기 이후 은거의 풍토가 유행하는 직접적 계기가 됐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소미산인(少微山人). 고조할아버지는 포은 정몽주와 교유한 김항(金伉)으로 청도에 터를 잡아 대대로 정착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할아버지는 모암 김극일(金克一)로 야은 길재(吉再)에게 수학했고 효성이 지극해 절효(節孝)라고 일컬어졌다. 


아버지는 남계 김맹(金孟)으로 김숙자(金叔滋) 문하에서 공부했다. 또한 형인 김준손과 김기손도 정시(庭試)에 합격함으로써 가문 전체가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김일손의 가계는 영남 사림의 정통적인 맥과 흐름을 같이하고 있다. 이러한 가문 배경으로 인해 어려서부터 도학과 문학에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김일손(金馹孫)(1464∼1498)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에게 ‘소학’과 사서(四書) 등을 배웠다. 17세 때부터 경술과 문장으로 당대를 풍미했던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굉필.정여창.권오복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갈고 닦았다. 이 시기의 수학 경험은 이후 김일손의 생애를 통해 사고와 행동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1486년(성종 17) 생원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같은 해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했다. 이어 같은 해에 식년 문과 갑과 제2인으로 급제했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곧 정자(正字)로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했다. 그 뒤 진주의 교수(敎授)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운계 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다시 벼슬길에 들어서서 승정원의 주서(注書), 홍문관의 박사.부수찬(副修撰), 전적(典籍).장령(掌令).정언(正言)을 지냈고, 다시 홍문관의 수찬을 거쳐 병조 좌랑.이조 좌랑이 됐다. 그 뒤 홍문관의 부교리(副校理).교리 및 헌납(獻納).이조 정랑 등을 지냈다. 관료 생활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사가독서(賜暇讀書)(재능이 있는 문신들에게 문흥을 위해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해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다졌다.



관인으로서 김일손의 품계는 정5품을 넘어서지 못한 낭관(郎官)이었으나 청요직인 문한(文翰)·언론 삼사.전관(銓官).사관 등을 역임하면서 상제와 관제, 인재 등용 제도를 비롯해 사회.경제 분야에서 다양한 개혁안을 제시하는 등 활발한 정치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의 복구를 건의하고, 노산군(魯山君) 입후(立後)를 최초로 거론한 것, 무오사화의 빌미가 된 훈구파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고발하고 스승인 점필재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린 것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김일손의 현실 대응 자세는 매우 과감하면서도 진취적이었다.


학문과 문학은 도본 문말(道本文末)의 입장을 견지했고, 충.효.의 등 유교적 실천 윤리로서의 도의 실현이 김일손의 문학적 지향이었다. 김일손의 생애에 따라 살펴보면, 수학기(修學期)의 작품에서는 왕조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려는 치도(治道)의 의지와 비분강개함을 담고 있다.



사환기(仕宦期)의 작품에서는 성리학적 질서를 뿌리내리려는 의도와 자신감, 웅혼한 기상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사직기(辭職期)의 작품에서는 국가의 미래에 대한 고뇌 등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두류산과 가야산을 유람하고 쓴 산문과 시에 보이는 웅혼한 기상과 단종에 대한 충절을 드러낸 시(詩)와 사(詞)에 나타난 비분, 연산군 시대에 쓴 시와 부(賦)에 드러난 회한(悔恨)의 정회는 강정한 기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저서로는 ‘탁영집’ 2권 1책이 전한다. 1519년 초간본은 조카 김대유가 간행했고,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서문을 지었다. 1668년 중간본에는 우암 송시열의 서문이 붙어 있다. 자계 서원에서 목판으로 간행됐고 이후 권수와 책수를 달리해 몇 차례 더 간행됐다. 그리고 ‘회로당기(會老堂記)’ ‘속두류록(續頭流錄)’ 등 26편이 ‘속동문선’에 수록돼 있다.


무오사화 때 해를 입고 양주(楊洲) 석교원(石橋原)에 임시로 장례를 지냈다. 1506년 목천(木川)의 작성산(鵲城山)에 개장(改葬)했다가 1508년에 현재의 위치인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 산110번지에 반장(返葬)했다.


중종반정으로 복관되고, 중종 때 직제학(直提學),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판서로 각각 추증됐다. 1518년 청도의 유생들이 김일손이 공부하던 운계 정사 터에 자계사(紫溪祠)를 세웠고, 1661년 사액을 받았다. 1835년 문민(文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청도의 자계 서원과 함양의 청계 서원, 목천의 도동 서원에 제향됐다.



1661년(현종 2) ‘자계(紫溪)’라고 사액(賜額)돼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중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毁撤)됐고, 그 뒤 1984년에 복원했다.


경내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신문(神門), 5칸의 강당,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3칸의 전사청(典祀廳), 2층 3칸의 영귀루(詠歸樓), 외삼문(外三門), 비각(碑閣), 4칸의 고자처(庫子處) 등 12동의 건물과 천운담(天雲潭)·탁영대(濯纓臺) 등이 있다.


사우에는 김일손을 주벽(主壁)으로 해 좌우에 김극일과 김대유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돼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전사청은 향사(享祀:제사) 때 제수(祭需)를 마련해 두는 곳이고,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수학하면서 거처하는 곳이다.


영귀루는 원내의 여러 행사 및 유생들이 모여서 시부(詩賦)를 짓기도 하는 곳이고, 비각에는 김극일의 효행을 찬양한 것과 신도비(神道碑)와 원정비(院庭碑) 등이 있다. 영귀루.동재.서재는 1975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매년 2월 중정(中丁:두번째 丁日)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고, 제품(祭品:제사 음식)은 4변(籩)4두(豆)이다.


유물로는 칠현금(七絃琴)이 보관돼 있고, 문집은 ‘연려실기술’ 등 수십 권이 소장돼 있다./사진출처-청도군 제공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