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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문화재 116] 옛 보신각 동종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4-10 21: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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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옛 보신각 동종은 높이 3.18m, 1468년, 보물 제2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85년까지 종로 보신각에 걸려 있어 제야의 종으로 사용됐던 것으로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됐다. 이 종은 전체적으로 볼륨감 있는 대표적인 조선 초기의 종으로, 오랫동안 조석을 알리고 또 제야의 종으로 사용돼 한국범종사상 의의가 매우 깊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됐다. 



원래는 1395년(태조 4) 종로 운종가(雲從街)에 종각을 짓고 권근(權近)이 찬문(撰文)을 쓴 대종(大鐘)을 매달아 조석(朝夕)을 알렸고, 다시 1468년(세조 13)에 대종을 주성(鑄成)해 달았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지금의 보신각종은 돈의문(敦義門: 西大門) 안에 있는 신덕왕후 정릉(神德王后貞陵)의 능사(陵寺)에 있었던 것으로, 이 종은 정릉사(貞陵寺)가 폐사되면서 원각사(圓閣寺)로 옮겨졌다. 중종 때 김안로(金安老)가 이 종을 숭례문(崇禮門)으로 다시 옮기려던 것을 임진왜란 후인 1594년(선조 27)에 종루(鐘樓)에 걸어두었다. 그 뒤 이 종루가 1869년(고종 6)에 불타고, 1895년(고종 32)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됨에 따라 이때부터 보신각종이라 부르게 됐다.



보신각종은 화염으로 종신(鐘身)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높이 3.18m, 입지름 2.28m의 육중한 대종이고,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종 형식인 한중혼효형(韓中混淆型)이다. 즉, 음통(音筒) 없이 쌍룡(雙龍)의 종뉴(鐘鈕) 아래 포탄형의 종신이 연결된 형태로, 종신형은 볼록한 정부(頂部)로부터 벌어지면서 내려오던 선이 종복(鐘腹)에 이르러 구연부(口緣部)를 향해 수직으로 떨어지는 형식이다.



종신에는 종복 중앙에 굵은 선과 위아래 가는 선의 띠장식대[太彫線帶]가 둘러져 있고 윗부분에는 상대(上帶) 대신 1줄의 띠장식이 있다. 그 아래 유곽(乳廓)이 없이 1구(軀)의 보살상이 남아 있다. 아랫부분에는 구연부(口緣部)에서 위쪽으로 하대(下帶) 대신 2줄의 띠장식과 명문(銘文)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종뉴는 쌍룡이 함께 여의주(如意珠)를 가지고 있는 형태로, 역동적인 몸체, 용맹스러운 얼굴 등에서 사실성(寫實性)과 조각성(彫刻性)이 농후한 편이다. 종신은 전체적으로 볼륨감과 팽창감이 감도는 편이고, 아마도 주조 당시는 네 구의 보살(菩薩)이 교대로 배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좌(撞座)가 없어진 점, 쌍룡의 종뉴, 볼록한 정부, 띠장식, 상하대의 분리 현상, 네 보살상의 배치 등은 조선 초기 종들에서 보이는 특징이고, 쌍룡.띠장식 등은 중국적인 요소이다. 



이 외래적인 요소는 고려 말 원나라의 장인(匠人)들이 만든 연복사(演福寺) 종의 형식을 따른 것이고, 조선 초기 흥천사종(興天寺鐘, 1462)에 나타나고, 조선 중기를 거쳐 후기에는 토착화되어 한국 종의 일면이 되었다.


또한 이 종은 흥천사종, 낙산사종(洛山寺鐘, 1469), 봉선사종(1469)과 함께 왕실에서 주성한 종이어서 주조 관계 인물이 거의 같은데, 감역(監役) 김덕생(金德生) 아래 주성장(鑄成匠) 정길산(鄭吉山), 김몽총(金蒙寵) 등 직분이 세분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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