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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논산한국유교문화진흥원 개원1주년 특별전...'당신은 어떻게 보여지길 원하는가?'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4-03-23 21: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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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논산한국유교문화진흥원은 개원 1주년을 맞아 특별전 '당신은 어떻게 보여지길 원하는가?' 를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이색으로부터 박팽년, 이지함, 권시, 이유태, 홍대용, 김정희, 이상재, 김복한 등에 이르기까지 14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이들의 삶의 태도를 용기와 소통, 도전과 창조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만나볼 수 있다.


죽기 전까지 포기하지 못했던 신념, 다름을 이해해 적재적소의 인재배치를 주장한 혜인, 전진하지 않으면 퇴보한다는 생각으로 행한 도전,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던 열정, 이번 전시에서는 이색으로부터 박팽년과 권시와 김정희, 이상재와 김복한 등에 이르기까지 14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이들의 삶의 태도를 용기와 소통, 도전과 창조라는 네 가지 관점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자신의 수양’이라는 두 개의 과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그들 또한 자신이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그럼에도 ‘사람의 사람됨’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사유하면서 찾아가는 그들의 삶의 방식에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우리가 삶을 볼 수 없는 이유는 그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어느 老철학자는 말했다.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 중 “사물을 보는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며, 그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한 가지 방식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무엇을 보고 어떻게 평가 하느냐는 각자 보는 방식에 달렸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있는가? 


    ▲이색 초상화 (보물), 1655년(효종 6), 비단에 채색, 세로 199*가로 96.5cm


고려 말 문신 이색(1328~1396)의 초상화이다.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조선시대에 새로 옯겨 그려졌고,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원나라 유학시절 서투른 중국어와 작은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그를 무시하던 중국인들에게 ‘우물에 앉아 하늘을 보고 작은 하늘이라 말한다.’고 한 일화는 ‘한국 성리학의 정체성'을 보여주었다. 이색은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교육의 전반적인 개혁을 통해, 500년 유교 사회를 이끌 후학들을 길러냈다. 이로 인해 ‘한국 성리학의 씨앗’으로 평가 받는다.


이색은 영덕에서 태어나 원나라와 고려 개경에서 활동했고, 지위가 올라 본관(서천)현을 군으로 승격시켰다.


태조실록을 편찬을 주도한 하륜은 스승 이색에 대해서 ‘학문에 부지런하고 흔들림이 없는 인물’이라고 평가 했다.  


뛰어난  역사적 인물들이 때로는 사회에서 배제되는 일도 볼 수 있다. 남들이 가지 않았던 길에 도전하고, 죽음 앞에서 신념을 지키는 용기를 행동할 때 주변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타인의 다름을 이해해 세상과 소통하고,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창조의 열정을 불태우지만 시대를 앞서간 이들이 얻는 것은 시기와 질투 뿐일 때도 있다. 그러나 이들을 통해 세상은 나아지고 있다. 


호연재 김씨(1681~1722)는 보고 느끼는 것을 당당히 말하고 호연의 기운을 펼쳤다. 한양에서 자라 대전 회덕에서 활동했고, 양성평등의 합리적 삶을 구현해 후대 여성들의 철학적 사유에 동기를 부여했다.


담헌 홍대용(1731~1738)은 “의문을 가지지 않으면 깨달음도 없다. 자세히 묻고 구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천안에서 태어나 청나라와 한양 등에서 활동했고, 청을 통해 외국학자들과 교류하며 조선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했다. 


충암 김정(1486~1521)은 보온에서 태어나 한양과 제주에서 활동했고,  500년 전 제주가 담긴 제주퐁토록을 저술했다. 사림세력으로 개혁정치를 추진했지만 기묘사화로 유배했다. 


초려 이유태(1607~1684)는 공주에서 태어나 공주, 한양에서 활동했고, 역사상 최고의 상소문이라고 평가받는 ‘기해봉사’로 정치개혁을 주장했다. 시대를 꿰뚫는 해안과 실천을 강조하는 개혁적 마인드로 “국가의 썩은 부분은 도려내고 다시 기본을 다잡아야 한다”고 했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예산에서 태어나 한양, 제주 등에서 활동했다. 실학자이며 화가, 서예가였으며, 한국 금석학의 시조로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추사체’를 만들었다. 유배기간 동안에도 절망하지않고 예술활동을 지속했다. 김정희는 “가슴속에 만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넘쳐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했다. 


      ▲세한도1939년 김정희 영인분 세로 27*가로 110cm


세한도는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시절에 자신에게 꾸준히 책을 보내준 이상적에게 감동해 보답으로 그려준 그림이다. 이 그림은 유배지의 겨울 퐁경을 담고 있는데 작은 집과 그 옆의 우직한 소나무와 잣나무가 전부이다. 김정희는 공부한 선비가 그린 문인화의 대표작으로 의리와 절개를 느낄 수 있다. 


새한도의 5번째 소장자였던 후지즈카 치키시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1939년 자신의 환갑을 기념해서 세한도를 100부 영인했다.


세한도 발문 중에서 공자는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다. 계절이 되기 전에도 소나무와 잣나무이고 겨울이 된 뒤에도 여전히 소나무와 잣나무인데, 공자는 특별히 겨울이 된 뒤의 상황을 들어 이야기한 것이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은 이전이라고 해서 더 잘하지도 않았고 이후라고 해서 더 못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철종실록’을 주도해 만든 김좌근, 조두순 등 당시 권세가들은 “김정희를 다양한 분야에 박식함을 물론, 창의적인 예술분야에서 탁월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취금헌 박팽년(1417~1456)은 회덕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활동했고, 단종 복위운동으로 죽음을 맞얐지만, 끝내 회유되기를 거절한 사육신이다. 황실의 사랑을 받은 집현전 엘리트 였다. 동료들은 모두 박팽년을 “집대성 했다”고 하니 그의 경술과 문장 필법이 모두 훌륭한 것을 말한 것이었다. 


중봉 조헌(1544~1592)은 김포에서 태어나 한양과 금산 등에서 활동했고, 국가의 위기를 목숨을 건 상소를 올리고, 의병활동을 했다. 임진왜란 때 700명의 의병과 함께 전멸했지만, 호남 방어의 근거지였던 금산을 회복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조헌은 “나라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끊는 가마솥에 던져지고 도끼에 목이 잘리는 형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피하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지산 김복한(1860~1924)은 홍주에서 태어나 홍주에서 활동했다. 의병운동으로 경무청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을사오적의 처단요구를 반복하는 결기를 보였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독립청원서를 발송했다. 김복한은 “나는 평소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할 것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고 했다.


탄옹 권시(1604~1672)는 공주에서 태어나 공주와 한양에서 활동했고, 예송논쟁 때 목숨을 걸고 서인을 공격하는 윤선도를 옹호하다가 같은 서인의 규탄으로 파직 됐다.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을 인정받은 선비이다. 권시는 “백성들은 나의 동포요. 나는 그들과 함께할 것이오.”라고 했다. 


토정 이지함(1517~1578)은 보령에서 태어나 전국에서 활동했고, 아산현감 시절 걸인청을 운영해 빈민을 구제했고, 성리학 외 다양한 학문을 통해 적극적 사회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이지함은 “매는 꿩을 잡게 하고, 닭은 새벽을 알리게 하며, 말은 수레를 끌게 하고, 고양이는 쥐를 잡게 하라.”고 했다. 


월남 이상재(1850~1927)는 서천에서 태어나 조선과 미국에서 활동했다. 1887년 주미한국공사 2등 서기관으로 근무했고, 국권피탈 이후 독립협회, YMCA, 신간회 등에서 독립운동과 청년교육에 힘썼다. 이상재는 “노인이 청년이 되어야지, 청년이 노인이 되겠는가?”라고 했다. 


#아들이 본 스승으로서의 김복한


지산집 권 15 연보 발문에는 “생각하면 고명하고 질박하고 성실하여 강직하고 충후하며 수양함은 깊고  두터워서 화변을 만나면 여유가 있고 생사에 처해서도 칭찬했으니, 이는 문자로 묘사하고 형용하기가 어려운 것이나, 어찌 여기에서 우리 선생의 긍경함을 다하겠습니까”라고 했다. 김복한의 차남인 김노동이 작성했다. 부자관계이면서 사제관계이기도 했던 제자의 입장에서 김복한에 대해 ‘위기에 굴하기 않고 시대에 저항할 수 있는 강직함과 대범함이 있다고 보고 있다.


    ▲김복한의 심문조서, (1906년 김복한 세로 27.5*가로 20cm)


1906년 일본경찰 간부 이와이 게이타로가 김복한을 심문하기 위해 작성한 조서이다. 


    ▲중봉선생집 (연도미상, 조헌, 안방준) 목판본, 세로 29.5*가로 20cm


조선 중기에 활동한 조헌의 문집으로 조헌이 죽은지 22년인 귀인 1613년(광해군 5)에 안방준이 조헌의 유문과 서적을 수집해 편찬하고 1615년(광해군 7)에 발간했다. 이글은 ‘지부상소’로 잘 알려져있는 ‘논지폐소’로 조헌이 이상소를 올렸고, 이후 그는 함경도 길주로 유배되었다. 


   ▲육선생유고 (연도미상, 사육신 6인, 숭고, 이경억) 세로 30.4*가로 20.7cm


단종복위 운동을 주도하여 충절을 지키다가 죽음을 맞은 사육신(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의 글을 모은 책이다. 많은 글 중 박팽년이 어리석음을 경계하기 위해 지은 글인 ‘우잠’을 통해서 그가 자신에게 엄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연재시집 (1977년 김호연재, 영인본, 세로 25*가로 16.8cm)


김호연재의 시를 모아놓은 시집으로 72 제 91 수의 한시가 담겨있다. 조선 후기 여성의 소소한 일상을 솔직하게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을병연행록 (조선 후기 홍대용, 필사본, 세로 33.2*가로 29cm)


홍대용이 1765년(영조 4) 사행에 참여한 내용을 한글로 작성한 기행록으로 총 10권이다. ‘담헌연록’이라고도 불리며, 박지원의 ‘열하일기’,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와 함께 조선시대 3대 연행록 중 하나이다. 전시된 책에는 홍대용이 청나라의 학자들과 교류한 내용이 담겨있다.


     ▲목은시고 (연도미상, 이색, 목판본, 세 로 25.9*가로 18.7cm)


목은 이색이 21세부터 65세까지 약 44년간 쓴 시들을 간행한 문집이다. 이색은 주로 자신의 경험과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시를 썼다. ‘알성의 숙시랑’은 낯선 원나라에서 힘들게 공부했던 이색의 모습이 현대 유학생들의 고난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윤증은 권시에 관해 ‘상대방을 대할 때 자신과 일체화할 정도로 잘 소통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청년이여 (1926년 이상재, 세로 18.3*가로 33.6cm)


이상재가 죽기 1년 전인 1926년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YMCA에서 만든 잡지 ’청년‘ 2월호에 기고한 원고이다. 청년들의 활동무대가 세계이고,세계는 청년들이 담당해야 하며 세계가 청년들의 활동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가 청년들을 사랑하고 청년들을 통한 소통을 열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찰, 1664년(현종 5), 권시, 문서, 세로 22*가로 34.5cm


권시가 쓴 간찰로 정확한 대상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는 사람을 보내는 인편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나 편지를 전하곤 했다. 권시가 쓴 이 간찰은 사별한 사람에 대한 위로와 나라에 충성해야 하지만 그러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탄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화살통 (16세기, 조헌, 길이 92.0, 지름 7.0cm), ▲항의신편 목판, 17세기, (조헌 안방준) 세로 19.5*가로      54.5cm


임진왜란(1592)때 조헌이 의병활동을 하면서 금산성 전투에서 전사할때까지 사용했던 화살통으로 20개의 화살을 넣을 수 있다. 재료는 대나무이며  통 하단에는 거북이, 중앙에는 사슴, 상단에는 학이 새겨져 있다. 조헌이 전사한 이후 동생 조범이 수습하면서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으며 수적인 열세에서도 조국을 지키기 위한 조헌의 용기를 잘 보여준다. 


항의신편 목판은 조헌에 관한 다양한 일화를 기록한 자료이다. 


      ▲김호연재증직교지, 1753년(영조 29) 세로 69.7*가로 107.6cm


김호연재 남편인 송요화의 관직이 올라서 받게 된 증직교지다. 조선시대는 남성뿐만아니라 여성에게도 관품이 부여되었다. 이때 원칙은 남편의 관품, 관직에 따라 변동되었다. 증이 붙은 이유는 김호연재가 1722년(경종 2)에 사망한 이후 남편인 송요화의 관직이 올랐기 때문이다./사진-윤여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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