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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95] 천도교 제3세 교주 '손병희'선생 집터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3-13 07:51:44
  • 수정 2024-04-10 23:3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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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선생 집터 표지석/사진-박광준 기자[박광준 기자] 손병희 선생은 한말 천도교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 천도교 제3세 교주를 지냈다.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됐고 교육.문화사업에 힘썼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손병희 선생의 호는 의암(義菴). 초명 응구(應九). 후명 규동(奎東). 충북 청주 출생. 1882년(고종 19) 22세 때 동학(東學)에 입교, 3년 후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수제자로서 연성수도(鍊性修道)했다.


의암 손병희선생 동상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統領)으로서 북접(北接)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과 논산에서 합세, 호남.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해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元山).강계(江界) 등지로 피신했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박영효(朴泳孝)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듣고 1903년에 귀국, 두 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해 일본으로 데리고 건너가 유학시켰다.


의암 손병희 선생 유허비1904년 권동진(權東鎭).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한 후 이용구(李容九)를 파견해 국내 조직에 착수, 경향 각지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회원에게 단발령(斷髮令)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해 친일단체인 유신회(維新會)와 합해 일진회(一進會)를 만들고 을사늑약에 찬동하는 성명을 내자, 즉시 귀국해 일진회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분자 62명을 출교(黜敎)시켰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립하고 보성(普成).동덕(同德) 등의 학교를 인수해 교육.문화사업에 힘썼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朴寅浩)에게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 수도에 힘쓰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다음 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常春園)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사진-박광준 기자,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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