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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86] 근대 어린이문학과 문화운동의 선구자 '이원수' 시비
  • 우성훈
  • 등록 2024-02-24 21: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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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훈 기자] 이원수는 우리나라 근대 어린이문학과 문화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되면서 그의 대표작인 '고향의 봄'은 홍난파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졌다.


그는 1911년 11월 17일 경상남도 양산(梁山)에서 출생했다. 창원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다. 1922년 마산으로 이주해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를 다녔다. 6학년 때인 1926년 '어린이'지에 동요 '고향의 봄'이 당선됐다. 


자신의 고향과 유년시절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며 1935년 작곡가 홍난파(洪蘭坡)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졌다. 마산공립보통학교 재학중 일본인들의 만행을 비난하는 글을 교내신문에 기고 했다. 1927년 당시 중학교 과정인 마산공립상업학교(마산상고를 거쳐 현, 용마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기쁨사'의 동인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벌여 장편동화와 아동소설의 장르를 개척했고 아동문학 이론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마산공립상업학교 졸업후 함안금융조합에 취업했고 1935년 2월 반일독서회 모임이었던 '함안독서회사건'으로 체포되어 10개월간 옥고를 치루었다. 다음 해 문학동반자였던 최순애와 결혼했다. 중일전쟁 이후 변절해 1942년 조선금융조합연합회에서 발간하는 친일잡지인 '반도의 빛(半島の光)'에 일제의 전쟁과 황군병사를 찬동하는 작품을 발표했는데 '지원병을 보내며' '낙하산'이 수록됐다. 


1943년에 발표한 '보리밭에서-젊은 농부의 노래'에서는 전쟁중인 상황에서 장병들의 노고를 생각하면서 풍작을 기원하는 농부의 심정을 표현했다. 1940년 일제는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만든다는 명분으로 백제의 고도(古都)인 부여(扶餘)에 일본 신궁(神宮) 건설을 착공했는데 당시 이곳을 방문해 근로봉사를 했고 그 감회를 '고도의 감회- 부여신궁어조영(扶餘神宮御造營) 봉사작업에 다녀와서'라는 글을 지어 남겼다.


4호선 사당역 주변에 있는 이원수의 '겨울나무' 시비/사진-우성훈 기자 8.15광복 후에는 경기공업고등학교 교사가 됐고 1946년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에도 가입해 문학활동을 했다. 1947년 박문출판사 편집국장이 되어 1947년 '종달새'라는 문학집을 간행했고, 1948년 그림동화집 '봄잔치'를 출판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피난을 가지못하고 서울에 머물렀다. 1951년 1.4후퇴 당시 세명의 자녀(영옥, 상옥, 용화)를 잃어버렸고 자신은 영국군을 지원하는 노무자로 뽑혀 동두천에서 1년간 천막생활을 했다. 1952년 제주도 고아원에서 장녀인 영옥을 찾았다. 같은해 '소년세계'를 창간했고 주간을 지냈다. 


'고향의 봄' 노래비/자료사진1953년 장편동화 '숲 속의 나라' '오월의 노래'를 발표했다. 1954년 아동문학학회를 창립해 부회장을 지냈고 1956년 '어린이 세계'라는 아동 월간지를 창간하고 주간을 지냈다. 1960년 동화집 '파란 구슬' 등을 출판했다. 그 밖에 1961년 '이원수아동문학독본', 1962년 '어린이문학독본' 등을 출간했다. 


1965년 경희여자초급대학에서 아동문학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1971년 회갑을 맞아 아동문학집 '고향의 봄'을 간행했다. 한국문인협회 이사를 지냈고, 1971년 한국아동문학가협회 초대회장 등을 역임했다. 1981년 1월 24일 구강암으로 사망했다. 1982년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됐고 2003년 12월 경상남도 창원시 서화길18(서상동 산60번지)에 '이원수문학관'이 세워졌다./사진-우성훈 기자,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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