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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의 여행이야기 28] 목숨을 순절한 '열녀 공주이씨 정려'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3-12-06 04:36:12
  • 수정 2024-01-26 05:3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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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충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있는 열녀 공주이씨는 조선 후기에 명정에서 윤선거 처(尹宣擧 妻) 공주이씨에게 내려진 정려이다. 공주이씨 정려는 병자호란 당시 오랑캐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강화도에서 순절했다. 그 아들 윤증은 학문이 높아 왕이 직접 관직에 오르기를 명하나, “조정에 나가 벼슬을 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순절에 대한 보답이 아니다”고 사양했다. 윤증은 모든 선비의 흠모의 대상이 돼 “백의정승”이란 대우를 받았고, 공주이씨에게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을 증직했고, 1681년 (숙종 7년)에 명정을 내려 정려를 세웠다.
                                                                                
노서(魯西) 윤선거(1610~1669)처(尹宣擧 妻) 공주이씨는 공주의 토성이자 명문가인 생원 이장백(李長白)의 딸로 태어나 19세가 되던 1626년(인조 4)에 윤선거와 혼인했다. 공주이씨는 이장백의 딸로 문경공 미촌 윤선거의 처이며 명재 윤증의 어머니이다. 윤선거는 김집의 문인으로 1633년 (인조 11년)에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1636년 청국의 사신이 왔을 때 유생들을 거느리고 청나라 사신 용골대를 죽이고 명나라에 대한 의(義)를 지키자고 상소를 올렸다.

그 해 겨울 청태종이 대군을 거느리고 침입하여 병자호란(1636년)을 일으키자 윤선거는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했다. 성문을 지키다가 강화가 함락되자 이씨부인은 오랑캐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으리라하고 강화도에서 순절했다. 그의 아들 윤증은 학문이 높아 현종 때 3사에 천거해 여러 관직에 임명됐으나 부임하지 않아, 왕이 직접 관직에 오르기를 명하니, “조정에 나가 벼슬을 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순절에 대한 보답이 아닌 줄 아옵니다. ”하며 사양했다. 그 덕망이 높은 모든 선비의 흠모의 대상이 돼 “백의정승”이란 대우를 받았다. 그 후 조정에서 공주이씨에게 정경부인(貞敬夫人)을 증직했고, 1681년 (숙종 7년)에 명정을 내려 정려를 건립했다.


                          ▲ 열녀 공주이씨 정려(烈女公州李氏旌閭)

정려는 원래 윤증 고택의 입구에서 남쪽 약 20m 정도 앞에 있는 구릉 위에 세워져 있었으나, 지세가 나빠 정려가 점점 기울고 무너지기 시작해 1997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정려는 솟을대문을 입구로 하고 주위는 담장을 둘렀다. 정.측면 1칸으로 이익공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막돌쌓기 기단 위에 8각형의 주초석을 놓고 둥근 기둥을 세운 뒤 창방을 짜 돌렸다. 4면에는 홍살을 시설하였고, 하방과 중방을 가구했다. 처마는 겹처마이다.  


                     ▲ 열녀 공주이씨 정려(烈女公州李氏旌閭)







                          ▲ 열녀 공주이씨 정려(烈女公州李氏旌閭)

열녀 공주이씨 정려(烈女公州李氏旌閭)는 윤선거의 부인이자 윤증의 어머니인 공주이씨에 대한 자료로, 어머니의 순절에 대한 보답으로 벼슬을 하지 않은 윤증의 인품과 함께 노성의 유력 성씨였던 파평윤씨의 활발했던 사족 활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미촌 윤선거는 1610년 충청남도 논산군 노성(현 논산시 광석면 오강리)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파평 윤씨로 아버지는 사간원대사간을 지낸 윤황(尹煌)이고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서인의 학자 성혼(成渾)의 딸이다. 외할아버지 성혼의 학맥을 계승한 고려말 조선전기의 문신 윤곤의 10대손으로, 세종대왕의 서녀 정현옹주와 결혼한 윤사로는 그의 7대 방조였다. 역시 윤필상, 정현왕후 등도 그의 7대 방조가 된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따로 일명 노성윤씨라고도 부른다. 그의 증조(윤증의 고조)인 윤돈이 처가가 있는 충청남도 노성에 처음 정착해 '노성 윤씨'라는 별칭을 얻었다.

 

#열녀(烈女)


열녀(烈女)는 남편이 죽은 후에 수절하거나 위난 시 죽음으로 정절을 지킨 여성이다. 열부라고도 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이 중국 전국시대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열녀의 연원은 매우 깊다.


우리나라의 열녀 개념은 유교 사회의 등장과 더불어 정착되었다. 유교 사회에서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과 수절은 부부관계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삼종지도’, 불경이부’, ‘일부종사’로 정의되는 유교적 여성관 확립은 교육을 위한 서적 간행·모범사례 발굴 및 전파, 포상 등 조선시대 위정자들의 엄청난 노력 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정려 (旌閭)

정려(旌閭)는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하여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풍습으로 정문.정려를 세운 것은 신라 때부터이며 고려를 거쳐 조선에 와서는 전국적으로 상당수 세워졌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신라의 경우 ‘삼국사기’ 권48 열전(列傳) 제8 효녀지은(孝女知恩)과 ‘삼국유사’권5 효선(孝善) 제9 빈녀양모(貧女養母)의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신라의 효녀 지은에 대한 포상으로 진성여왕은 조 500석과 집 한 채를 내리고 복호(復戶:役을 면제해 주는 것)하며 그 마을을 정표하여 효양방(孝養坊)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경우, ‘고려사’기사를 보면 고려 명종·성종·충선왕·충숙왕·공민왕 등은 왕명으로 효자, 조부모를 잘 섬기는 손자, 아내가 죽은 뒤 새로 장가들지 않고 혼자 사는 의로운 남편, 수절하는 부인, 정조를 굳게 지키는 여자 등에 대해서는 마을 입구에 정표해 그 풍속을 장려했다.

고려시대에는 정몽주(鄭夢周).김광재(金光載).조희참(曺希參) 등이 효자로서, 권금(權金)의 처와 이동교(李東郊)의 처 배씨, 정만(鄭滿)의 처 최씨 등은 열녀로서 정려의 표창을 받았다.

조선왕조는 삼강과 오륜을 바탕으로 한 유교적 풍속 교화를 위하여 효.충.열의 행적이 있는 자에게 사회적 신분의 고하, 귀천, 남녀를 막론하고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정표했다. 조선왕조의 정려정책은 1392년(태조 1) 7월에 그 방침을 밝힌 이래 계속됐다.

조선 초기의 정려정책은 고려시대의 충신.효자.순손(順孫).의부(義夫).절부(節婦) 등에 대한 정려정책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더욱 강화됐다. 그래서 역대 왕들은 즉위하면 반드시 충신·효자·의부·절부에 대해 각 지방에서 보고를 하도록 하여 그 대상자는 문려(門閭)를 세워 정표하고 그 집의 요역을 면제케 했고, 또 일부 사람들은 그 행적에 따라 상직(賞職) 또는 상물(賞物)을 주기도 했다.

따라서 사족(士族)의 경우는 가문의 명예였고 공사천(公私賤)의 경우는 면천해 신분 상승을 가능하게 하는 등 생활에 이익을 주어 후손들로 하여금 본받도록 했다.

‘국대전’권3 예전(禮典) 장권조(奬勸條)에 의하면 “효도.우애.절의 등의 선행을 한 자(孝子, 順孫, 節婦, 나라를 위하여 죽은 자의 子孫, 睦族, 救患과 같은 등속)는 해마다 연말에 본조(本曹)가 정기적으로 기록하여 왕에게 아뢰어 장권(賞職을 주거나 혹은 賞物을 주며 더욱 특이한 자는 旌門을 세워주고 復戶를 해 주고, 守信한 妻에게도 또한 복호를 해줌)한다.”라고 돼 있다.

정표자들의 사례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교화의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유교적 인간상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특히,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의 전쟁중에 삼강의 행실이 뛰어난 효자·충신·열녀의 수는 평시보다 몇 배나 더 많았다.

국가에서는 이들을 정려·정문·복호 등으로 포상함으로써 민심을 격려하고자 했다. 정려·정문의 유적은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는 곳이 많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고려사(高麗史)’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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