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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유형문화재 21] 흥천사 목조여래좌상-흥천사 목조보살좌상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10-12 14: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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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3호 목조여래좌상-제414호 흥천사 목조보살좌상

[박광준 기자] # 흥천사 목조여래좌상


 흥천사에 전해오는 목조여래좌상은 높이 56.3㎝로 조선시대에 조성된 중소형 불상이다. 불상의 크기로 보아 조선총독부 관보(1933년)와 '봉은본 말사지'에 실린 '흥천사 귀중품 목록'에 보이는 1척8촌의 아미타불상으로 생각된다.



불상은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데, 허리가 길고 어깨가 넓은 장대한 신체의 비례는 조선시대 불상 가운데서도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전기 불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으로 주목된다.


얼굴을 약간 앞으로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하고, 불신(佛身)의 크기에 비해 얼굴은 작은 편이며, 그에 비해서 머리의 측면 폭은 넓다.


육계가 낮아 머리와의 경계가 드러나지 않는 두부에는 나발이 큼직하고 중앙에 반달형의 중간계주와 정상에 둥근 원통형의 정상계주(頂上髻珠)가 표현됐다. 개금이 두꺼워 이목구비의 세부를 알아보기 어려우나 미간의 백호에는 수정이 박혀있고 우뚝한 콧날과 넓은 인중, 미소 띤 자비로운 입가에서 차분하고 단엄한 상호를 보인다.



대의(大衣)를 입은 착의형식은 가사를 두벌 겹쳐 입은 이른바 이중착의법(또는 변형 편단우견)으로 오른쪽 어깨에 부견의(覆肩衣)로 불리는 옷이 걸쳐지고 대의자락이 왼쪽 어깨 뒤로 넘겨져 늘어졌다. 앞가슴은 U자형 넓게 열려 안에 입은 내의(승각기)가 접혀서 사선의 주름을 이루는 것이 잘 드러나고 가부좌한 두 다리를 덮은 옷자락은 오른발을 반쯤 덮고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양 무릎위에 주름을 이루고 있다. 양 손은 통통하고 손가락 하나하나가 힘 있게 조각됐다.


수인(手印)은 설법인(說法印, 下品中生印으로도 불림)으로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댈 듯이 가까이 하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엄지와 중지를 맞댈 듯 가까이 하고 있다.


불상의 뒷면에는 넓은 직사각형의 복장공이 있으나 현재 불상의 바닥에 인위적으로 뚫은 가로지름 10.2cm, 세로지름 11cm의 원형 복장공이 뚫려있고 복장물은 없어진 상태이다. 다만 지본묵서의 다라니 2건과 발원자명이 묵서된 목판(13cm x9.1cm)이 남아있는데, 다라니 2건은 처음 조성 당시의 것일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불상은 얼굴을 앞으로 내민 듯한 자세를 비롯해서, 허리가 길고 어깨가 넓은 장신형의 신체 비례와 체구에 비해 작은 얼굴과 이목구비의 표현, 상호 등, 세부 표현에서 1606년에 조성된 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제 1719호)과 매우 유사함을 보인다. 특히, 사선으로 표현된 내의가 비스듬히 물결처럼 휘어진 것과 살이 많아 두터운 손과 구부린 손가락의 형태는 동학사 아미타불상과 비교될 만하고, 다리를 덮은 옷주름의 표현은 본존 동학사 석가여래좌상과 흡사하다. 공주 동학사 석가여래삼불좌상이 17세기 초의 작품인 것을 감안할 때, 흥천사 목조여래좌상 역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보아서 무리가 없을 것이다.


특히, 동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조각승 석준(釋俊)과 각민(覺敏) 등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이 삼불좌상과 여러 면에서 유사한 흥천사 목조여래좌상도 이들 조각승 유파에 의해 제작됐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2017년 6월 8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413호로 지정됐다. 


# 흥천사 목조보살좌상(興天寺 木造菩薩坐像)


흥천사 극락보전에 봉안된 목조보살좌상은 높이 101.5㎝의 중대형 보살상으로, 나무로 된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보관은 정면을 향해 날고 있는 두 마리의 봉황이 좌우대칭을 이루면서, 화문(花文)과 연화문 장식 등이 붙어 있고, 상단에 다섯 개의 화염문과 측면에 좌우로 관대(冠帶)가 매달려 있다. 보관 겉면에 몇 개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장식 일부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머리 정상에 높은 보계[상투]가 있고, 보관 밑 이마에 머리카락이 단정히 처리돼 있고, 보살의 머리카락이 귀를 타고 내려와 어깨 위에 세 가닥으로 늘어져 있다. 얼굴은 조선후기 제작된 불상에 비해 역삼각형에 가까운 갸름하다. 머리는 어깨에 비해 큰 편이지만, 상반신이 길고 하반신이 넓어 안정된 신체비율을 보인다. 이목구비가 단정한 편이고, 선정(禪定)을 하듯이 가늘게 뜬 눈의 눈꼬리가 많이 올라가 있고, 코는 뾰족하고 콧등은 짧아 조선후기에 제작된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정형화 된 인상과 다르다. 미간 사이에는 얼굴에 비해 큰 백호가 있다.


양 손은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고, 무릎에 놓인 오른손과 어깨까지 치켜든 왼손에 연봉오리가 달린 줄기를 자연스럽게 들고 있다. 대의 안쪽에 편삼을 걸치고, 오른쪽 어깨에 걸친 대의자락이 복부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끝자락이 엉덩이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대의 안쪽에 가슴을 덮은 승각기는 상단이 자연스럽게 접혀 있어 연판형으로 처리된 17세기 중반 이후에 제작된 보살상과 차이가 난다.



흥천사 목조보살좌상의 복장물은 이전에 대부분 없어졌고, 조성 시기와 연화질을 밝힐 수 있는 복장발원문도 남아있지 않다. 흥천사 목조보살좌상은 제작 시기를 밝힐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조선시대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기년명 불상이 수 백점 조사돼 양식적인 비교가 가능하다.


우선 흥천사 목조보살좌상은 신체비례에서 조선후기, 특히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보살상보다 머리가 크고 어깨가 좁은 편이다. 또한 보살상이 상반신이 길고 하반신이 넓어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신체비례는 조선후기보다 조선전기에 유행했다. 



흥천사 목조보살좌상은 15세기에 조성된 경북 영주 흑석사 불상(1458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천주사 불상(1482년) 과 달리 신체비율에 약간의 왜곡이 있고, 16세기 후반에 제작된 문경 대승사 불상(1586년) 등과 유사한 편이다. 또한 발견된 복장물 중에 묘법연화경이 모두 16세기 간행돼 보살상의 조성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흥천사 목조보살좌상은 내부에서 조성발원문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양식적인 특징을 통해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보살상이 흥천사에 언제부터 봉안 됐는지 알 수 없지만, 조선전기에 왕실 후원 사찰로 유명한 흥천사는 1536년에 한성부에서 흥천사의 빈터를 직급에 따라 관료들에게 나누어 준 것을 보면 16세기 중반에 완전히 폐사됐다. 이후 1799년에 스님들이 흥천사 중창을 발원한 후, 1853년(철종4) 5월에 구봉계장(九峰啓 壯)이 대웅전을 창건하고, 다른 사찰에서 불상들을 이운해 삼존상으로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2017년 6월 8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414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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