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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63] 조선 태조 때 청계천에 놓인 다리 '광통교'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10-04 05:10:56
  • 수정 2024-04-10 10:5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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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경 광통교[박광준 기자] 광통교는 청계천의 다리이다. 조선시대 청계천에 놓인 다리 중 가장 규모가 컸고 도성 내 주요 도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다리로, 청계광장을 기준으로, 청계천의 2번째 다리다. '광통교(廣通橋)'는 '광통방(廣通坊)의 다리(橋)'란 뜻이다.


이외에 줄임말인 '광교(廣橋)'를 비롯해 '대광통교(大廣通橋)', '북광통교(北廣通橋)', '광충교(廣沖橋)'란 이름도 있었다. 일반 백성들은 주로 '광교'로 많이 불렀다.



이중 대광통교와 북광통교의 경우, 청계천의 지류인 창동천에 놓인 같은 이름의 다리와 비교돼 붙여진 이름이다. 청계천은 창동천보다 북쪽에 있었고, 다리 역시 창동천의 광통교보다 규모가 컸기에 북광통교, 대광통교라 불린 것이다.


원래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와 중구 남대문로를 잇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 35 (서린동)와 중구 청계천로 30 (다동) 사이이다. 




조선 태조 때 창건했고 원래는 흙으로 만든 다리였다. 이후 1410년(태종 10년)에 홍수로 무너지자 돌다리로 고쳐지었다. 이 때 다리 건설에 사용한 돌들은 태종의 계모 신덕왕후가 묻혔던 정릉에서 가져왔다. 이는 신덕왕후에게 원한을 가졌던 태종의 복수의 일환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로 인해 정릉에 쓰인 돌들은 무사해 현대까지 여말선초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 됐다.


이후 조선시대 내내 한성의 큰 길인 육조거리(세종로)와 운종가(종로), 그리고 숭례문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 기능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광통교 일대는 사람이 많이 붐비는 한성의 최대 번화가가 됐다. 다리 주변에 여러 수공업 작업장들이 들어섰고 큰 재래시장들도 생겨났다. 심지어는 거지들도 이 근처에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후대 임금들도 광통교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일단 왕이 숭례문으로 나갈 때 반드시 이용하던 다리였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다리인 만큼 임금 자신이 백성들을 생각한다는 행동을 보여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백성들이 왕에게 직접 민원을 제기하는 격쟁도 많이 열렸고,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구휼미를 나눠주는 곳이 되기도 했다.


1760년(영조 36년) 청계천을 준설할 때 영조가 직접 나와 이곳에서 공사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1762년(영조 38년)에 다리의 기초 부분을 고쳐짓고 난간을 수리했다. 이후 큰 변화없이 있다가 1899년(광무 3년) 종로와 숭례문을 연결하는 전차노선이 생기면서 다리 동편에 전차선로가 깔렸다. 1910년 8월에 이 노선이 복선화되면서, 다리는 1m 정도의 콘크리트 선로 밑에 묻혔다.






그러다 1958년 청계천 복개 공사 때 도로 밑에 묻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때 일부 부재들이 창덕궁과 창경궁, 탑골공원으로 옮겨졌다.


서울특별시에서 2005년 청계천 복원사업 당시에 원 위치에 세우려 했지만 교통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기존 광통교를 서쪽(상류 쪽)으로 150m 가량 옮겨 복원했다. 그리고 원래 광통교 위치에는 광교라는 현대식 다리를 만들었다. 현재 광통교는 사람만 통행이 가능하고 차량은 불가능하다.


길이 12.3m, 너비 14.4m, 높이 3.7m로 재질은 전부 화강암이다. 길이보다 폭이 더 넓은 것이 특징이다.




광교 아래로 지나가다 보면 광통교 돌다리나 벽돌에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돌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정동 정릉에 있던 석물들이다. 그나마도 제대로 놓은 게 아니라 아예 뒤집어서 끼워넣었다. 신덕왕후에 대한 태종의 반감을 조선왕조가 망한 오늘날까지도 확인할 수 있는 유적. 아이러니하게도 광통교 밑에 처박힌 탓에 사람 손을 덜 타서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21세기까지 남을 수 있었다. 건원릉 석물에서와 같은 구름에 휩싸인 도사나 스님이 들고 다니는 금강저, 태극 문양 등 성리학이 집대성되기 이전에 조선 초까지 남아있었던 도교, 불교 문화의 잔재를 느낄 수 있다.


복원한 청계천 너비와 광통교 길이가 맞지 않아서, 광통교 남쪽으로 인도를 덧대었다. 인도 난간은 정릉 석물을 본딴 형태이다. 이 덧댄 인도 밑으로 청계천 물이 흘러가면서, 광통교 본교 밑바닥에는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게 돌이 깔려 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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