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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60] 문곡성의 빛을 타고 태어난 고려의 명재상 '강감찬'이 태어난 곳 '낙성대'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9-24 09:45:21
  • 수정 2024-04-10 10:5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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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낙성대(落星垈)는 강감찬이 태어난 곳으로,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228번지에 위치해 있다. 낙성대는 그가 태어날 때 별이 떨어진 곳이라는 뜻이다. 강감찬(姜邯贊, 948∼1031) 이 태어난 낙성대를 보존하고, 강감찬을 기리기 위해 조성했는데 1973년 11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1974년 6월 10일에 공원 조성이 완료됐다. 면적은 3만 1,350m2이었다.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출생지에 큰 별이 떨어졌다는 의미로 낙성대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성현(成俔, 1439~1504)이 쓴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강감찬이 몸집이 작고 귀도 조그마했다고 전하면서 강감찬의 관상은 귀인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는 송나라 사신과 관련해 전하길, 어느 날 키 크고 잘생긴 선비를 관리 복장을 하게 하고 강감찬은 허름한 옷을 입고 그 뒤에 섰는데, 사신은 한눈에 강감찬을 알아봤다고 한다. 송나라의 사신이 가난한 선비를 보고, “용모는 비록 크고 위엄이 있으나 귀에 성곽(城郭)이 없으니, 필연코 가난한 선비다.” 하고, 강감찬을 보고는 두 팔을 벌리고 엎드려 절하며, “문곡성이 오랫동안 중국에 나타나지 않더니, 이제 동방(東方)에 있습니다.”고 했다는 기록이다.


'고려사'는 강감찬을 가리켜 문곡성의 화신이라 했고, '용재총화'는 염정성의 화신이었다고 기록돼 있는데 아마도 구전되는 설화이라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일화에 등장하는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4번째 별로 문운(文運)을 주관하고 5번째 별인 염정성은 형살(刑殺)을 주관한다는데 북두칠성은 국자 모양의 맨 앞별에서부터 차례로 탐랑성.거문성.녹존성.문곡성.염정성.무곡성.파군성으로 붙여져 있다.




강감찬이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신이면서도 거란을 물리친 무장의 재능을 갖추었기 때문에 문곡성.염정성이 등장한 것같다. 중국에서는 문곡성의 화신을 판관 포청천으로 봤고 문곡성이 중국에서 고려로 건너왔으니 송나라의 사신이 큰 절을 올렸던 것이다.


강감찬은 고려 정종과 현종 년간에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 중의 영웅으로 고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과 함께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3대 영웅으로 회자되는 인물이다.


강감찬이 막아낸 외적은 거란이다. 우여곡절 끝에 목종을 이어 현종이 즉위하자, 거란의 성종은 목종을 끌어내린 강조의 정변을 구실 삼아 여러 차례 고려를 침공했고, 1018년의 세 번째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인물이 강감찬이다. 이후 현종의 친조를 들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재차 침입한 거란의 소배압을 귀주에서 뛰어난 계략으로 물리침으로써 명장과 명신으로 추앙받는 삶을 살았다.


강감찬이 다른 역사 인물과 다른 점은 역사기록은 물론이고 문헌 혹은 구비설화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강감찬은 사후에 역사와 문학작품 외에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오랫동안 회자됐을 뿐만 아니라, 설화 속 주인공으로 신격화되고 민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역사 속 인물이 설화 속 주인공으로 환생한 것은 아마도 그의 공적이 인간의 힘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삼층석탑


삼층석탑은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고려시대의 명장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강감찬 장군은 거란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우는 등 구국제민(救國濟民)을 위해 일생을 바쳐 백성들의 흠모와 존경을 받았다. 백성들은 장군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장군의 집터에 사리탑(舍利塔) 방식의 삼층석탑을 세웠다. 그리고 장군이 태어나던 날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에 따라 '별이 떨어진 터'라는 뜻의 낙성대라 이름했다. 화강암으로 된 삼층석탑은 13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4.48m이다. 서울특별시에서는 낙성대를 보호하기 위해 1964년 석탑이 파손된 부분을 보수했다. 유형문화재로 지정한 뒤 1973년 11월부터 안국사라는 사당과 부속건물을 신축하고 관악구 봉천동 218번지에 있던 삼층석탑을 이전했다. 


삼층석탑이 있던 옛터에 따로 유허비(遺墟碑)를 세워 사적지임을 표시하고, 1974년 8월 21일 낙성대유지(落星垈遺址)라 해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했다. 낙성대 안국사 경내에서는 1988년부터 강감찬 장군의 호국정신과 위업을 기리는 추모제향으로 낙성대인헌제가 매년 10월 경에 열린다.




구국의 영웅 강감찬은 서기 948년 금주(衿州)에서 태어났다. 금주지역은 조선시대에 금천이라 불린 곳으로 현재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과 금천구 일대 등 관악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해당된다. 강감찬의 5대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신라시대부터 이 지역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고 전해지며, 부친인 강궁진(姜弓珍)이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우고 벽상공신이 되면서 명망가 집안으로 부상했다.


영웅이 탄생하는데 신화가 없을 수 없다. 강감찬의 탄생일화는 꽤 유명하다. '고려사' 열전에는 세상에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라고 전제하며 다음과 같은 소개 하고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어떤 사신(使臣)이 한밤중에 시흥군으로 들어 오다가 큰 별이 어떤 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어 찾아보게 하니, 마침 그 집 부인이 사내를 낳았었다. 이 말을 듣고 사신이 마음속으로 신기하게 여기고 그 아이를 데려다가 길렀는데 그가 바로 강감찬으로 재상이었다고 전하며, 그가 재상이 된 후 송나라 사신이 그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가서 절하며 말하기를 “문곡성(文曲星)이 오래 보이지 않더니 여기 와서 있도다!”라고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고려사'에 전하는 강감찬의 탄생일화는 막 태어난 아이를 사신이 데리고 가서 키웠다는 앞뒤 안 맞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꾸며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지만, 이 전설의 흔적을 오늘날 낙성대에서 찾을 수 있다.


1974년 세워진 강감찬생가터의 유허비 정측면. 원래 고려시대 석탑이 존재했으나 낙성대공원을 조성한 1973년 안국사경내로 옮기고 세워졌다. 1996년 이전 촬영/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 초기의 문신인 성현(成俔:1439~1504)이 쓴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강감찬이 몸집이 작고 귀도 조그마했다고 전한다. 관상이 실제 맞는지 어떤지는 모를 일이지만, 강감찬의 관상만은 귀인상이었다. 어느 날 키 크고 잘생긴 선비를 관리 복장을 하게 하고 자신은 허름한 옷을 입고 그 뒤에 섰는데, 송나라 사신이 한눈에 강감찬을 알아봤다고 한다. 


송나라의 사신이 가난한 선비를 보고, “용모는 비록 크고 위엄이 있으나 귀에 성곽(城郭)이 없으니, 필연코 가난한 선비다.” 하고, 강감찬을 보고는 두 팔을 벌리고 엎드려 절하며, “염정성(廉貞星)이 오랫동안 중국에 나타나지 않더니, 이제 동방(東方)에 있습니다.”고 했다.


'고려사'는 강감찬을 가리켜 문곡성의 화신이라 했고, '용재총화'는 염정성의 화신이었다 전한다. 아마도 구전되는 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 내용상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일화에 등장하는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4번째 별로 문운(文運)을 주관한다. 반면에 북두칠성의 5번째 별인 염정성은 형살(刑殺)을 주관한다.


북두칠성은 일곱 별마다 도교적 색채의 이름이 있다. 국자의 맨 앞별에서부터 차례로 탐랑성.거문성.녹존성.문곡성.염정성.무곡성.파군성이라 한다. 강감찬이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신이면서도 거란을 물리친 무장의 재능을 갖추었기 때문에 두 별이 등장한 듯싶다. 중국에서는 문곡성의 화신을 판관 포청천으로 봤다. 그 문곡성이 중국에서 고려로 건너온 셈이니 그가 바로 강감찬 장군이다.


안국사, 1973년~1974년에 걸쳐 409m의 담장을 쌓고, 영정을 모신 안국사(安國祠)를 지어 일대를 공원을 조성하였다. 안국사는 외삼문인 안국문을 거쳐, 내삼문 안에 건축됐는데, 사당 안에는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안국사는 고려시대 명장 강감찬(姜邯贊, 948∼1031)의 사당으로, 강감찬 장군이 거란군을 물리치고 받은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이라는 호를 따 안국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1974년 강감찬 장군의 출생 지역인 낙성대(落星垈)에 건립했고, 사당 주변을 공원화해 낙성대공원을 조성했다. ‘큰 별이 떨어진 곳’이라는 의미의 낙성대는 장군이 출생하던 날 출생지에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에 따라 지은 이름으로,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됐다. 

 

안국사는 낙성대공원의 연못 뒤쪽에 있고 길이 409m의 사괴석(四塊石)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입구에 기념 휘호석과 관리사무실이 있고 안국문(安國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외삼문을 통과하면 잔디와 수목으로 깔끔하게 조경한 넓은 정원이 펼쳐진다. 정원 좌·우측에는 고려강감찬장군사적비와 ‘강감찬낙성대(姜邯贊落星垈)’라는 명문이 새겨진 삼층석탑이 있으며, 정원 안쪽의 낮은 계단을 올라 내삼문을 지나면 사당(안국사)이 나온다.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은 면적 237.6㎡의 정면 5칸.측면 2칸 팔작지붕 건물로, 고려시대 목조건축물인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1010년(현종 1년) 강조가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추대하는 정변이 일어나자, 이를 구실로 거란의 2차 침입이 시작됐다.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피신했지만, 현종의 친조를 조건으로 이듬해 1월에 거란군이 철수했다. 이후 현종은 병을 핑계로 친조를 거절했고, 결국 고려와 송, 거란 3국의 관계는 거란의 침략이 시작되었던 10여 년 전과 같이 다시 미묘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마침내 1014년(현종 5년) 9월 소적렬이 이끄는 거란군이 통주와 흥화진을 공격하는 것을 신호로 거란의 3차 침입이 시작됐다. 거란의 공격이 계속될 기미를 보이자 고려는 송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했으나 송나라는 국력이 쇠퇴한데다 그 무렵 거란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송나라의 도움을 받지 못한 가운데 고려는 1016년(현종 7년) 또다시 거란의 침입을 받았다. 이렇듯 쉴 새 없이 소모전을 벌이던 거란의 공격은 소합탁이 패배한 뒤로 약 1년 동안 잠잠했다. 잠시 소강기를 갖게 되자 고려는 거란에 화해의 손짓을 보내는 척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빈틈없는 준비에 온 힘을 기울였다.


고려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 마침내 거란의 성종은 1018년 12월 소배압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게 했다. 소배압은 앞서 1차 침입 때에 왔던 소손녕의 형으로 2차 침입 때에는 거란 성종을 따라 개경까지 왔던 인물이다. 거란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됐지만, 고려 역시 거란의 대규모 침략을 예상하고 20만 군대를 조성해 놓고 있었다. 이 20만 군대를 지휘한 상원수가 바로 평장사 강감찬이었다.



고려사절요

강감찬이 처음 병력을 이끌고 진을 친 곳은 영주(안주)였다. 그러나 곧 흥화진으로 나아가 기병 1만 2천을 복병으로 배치해 놓고 흥화진 앞을 흐르던 내를 소가죽으로 꿰어 막았다. 그런 다음 거란군이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일시에 물을 터트려 흘려보내고 복병으로 하여금 거란군을 공격하게 했다. 흥화진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한 소배압은 퇴각하지 않고 개경으로 진군했다. 이후에도 부원수 강민첨과 시랑 조원의 공격으로 꽤 많은 부하가 죽었음에도 소배압은 개경 입성을 고집했다.


결국 이듬해 정월, 그는 개경에서 백여 리 떨어진 황해도 신은현(신계)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개경을 코앞에 둔 소배압은 기습부대들의 공격을 받고 전의를 상실, 철군하기 시작했다. 거란군이 회군을 시작하자 강감찬은 곳곳에 군사를 매복시켜 두었다가 이들을 급습했다. 퇴각하는 소배압이 외나무다리에서 강감찬과 만난 곳이 바로 ‘귀주’였다.


처음 양 진영은 서로 팽팽하게 맞선 채 좀처럼 승부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개경에 내려갔던 김종현의 부대가 가세하고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거란군이 있는 북쪽으로 불기 시작했다.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거란군은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고려군은 도망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해 거의 몰살시켜 버렸다. 당시 살아서 본국으로 도망친 거란군은 단지 수천 명밖에 안 됐고, 게다가 적장 소배압은 갑옷에 무기까지 버리고 죽기 살기로 압록강을 헤엄쳐 달아났다. 소배압에게는 그야말로 한 맺힌 압록강이었다.


강감찬 한시

강감찬전

소배압이 패전하고 돌아오자 거란 성종은 진노하여 “네 낯가죽을 벗겨 죽여 버리겠다.”며 노발대발했다. 소배압의 낯가죽이 실제로 벗겨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파직돼 귀양갔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다행히 목숨만은 건진 듯하다.


강감찬의 지휘로 거란군의 침략야욕을 분쇄해 버린 이 날의 전투는 우리 역사상 귀주대첩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거란역사에서는 가장 비참한 패전으로 기록됐을 것이다. 패장 소배압이 자신의 낯가죽을 걱정하는 사이, 승장 강감찬은 3군과 포로를 이끌고 당당히 개선했다. 강감찬이 개경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현종은 친히 영파역으로 나가서 그를 맞이하고 금화 8가지를 강감찬에게 꽂아 주었다. 이날을 기념해 영파역은 흥의역으로 개칭되고 이곳의 역리는 지방관리와 같은 관대(冠帶)를 받았다.


귀주대첩으로 거란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다 준 강감찬은 전란 이후에는 개성 외곽에 성곽을 쌓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 낙향한 뒤에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과 '구선집(求善集)' 등 저술에도 힘써 몇 권의 저서도 남겼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강감찬 향나무국가를 위해 헌신한 강감찬은 이후 연로함을 이유로 여러 차례에 걸쳐 은퇴를 청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종이 지팡이까지 하사하며 만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1030년에는 벼슬이 문하시중에까지 올랐고, 1032년(덕종 원년)에 생을 마감했으니 향년 84세였다. 강감찬이 죽자 덕종은 3일간 조회를 멈추고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게 했다.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으로 강감찬은 수많은 설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일궈낸 귀주대첩이야말로 신화라 불릴 만 한 대사건이기 때문이다. 강감찬과 관련한 설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호환(虎患)을 없앤 이야기다.


고려의 강감찬이 현종 때 판관이 되었는데, 한양에 범이 많아 백성의 걱정이 많았다. 강감찬이 편지 한 장을 적어서 아전에게 주며 말하기를, “북문 밖 북동에 가면 늙은 중이 바위 위에 앉아 있을 것이니, 네가 불러서 데리고 오너라.”고 하였다. 아전이 그의 말대로 하니 과연 중이 있었다. 아전을 따라온 중을 보고 강감찬이 꾸짖으며 “너는 빨리 무리를 데리고 멀리 가거라.” 하니, 주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이어 강감찬이 본색을 드러내라고 명령하니, 중이 크게 울부짖고는 한 마리의 큰 호랑이로 변하고 사라졌는데, 이후로 한양에 호환이 사라졌다고 한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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