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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이야기 27] 편안한 살림집 구조의 ‘건청궁’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8-19 09:14:42
  • 수정 2024-04-15 17: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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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청궁 특별개방...9월 15일까지 예약 없이 관람 가능



[박광준 기자]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경복궁 내 건청궁을 특별 개방하고 용상, 용교의, 문갑, 경대 등 당시의 궁중 생활상을 볼 수 있는 유물을 선보였다. 건청궁은 1885년부터 1896년까지 고종과 명성황후가 생활하는 공간이었고 1887년에는 국내 최초로 전기를 생산해 전등을 밝혔다. 오는 9월 18일까지 예약 없이 관람이 가능하다.


건천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복궁에 있는 조선후기 왕과 왕비의 거처 및 외교관 접대 장소로 이용된 궁궐건물이다. 



건천궁은 경복궁 중건이 끝난 지 이듬해인 1873년(고종 10)에 궁궐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자리에 창건됐다. 고종은 정부 대신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비밀리에 내탕금으로 건청궁을 짓다 공사 도중 문제가 되어 중지할 것을 요청받기도 했으나, 공사가 강행돼 여러 건물이 지어졌고, 그 뒤 국왕과 왕비의 거처로 이용되거나 외교관 접대의 장소로 활용됐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때 건청궁 곤녕합(坤寧閤)에서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되어 한국 근세사의 비극을 상징하는 장소가 됐다. 일본인들이 경복궁 안에 있던 수많은 건물을 파괴되기 시작한 1909년에 건청궁도 함께 헐렸다. 광복 후인 1945년 11월 이 자리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세워졌고, 그 동쪽에 3단으로 기단을 쌓아 ‘明成皇后遭難之地(명성왕후조난지지)’라고 새긴 표석을 세워 놓았다.






건청궁 창건 당시의 원형은 ‘북궐도형(北闕圖型)’과 ‘궁궐지(宮闕志)’ 등을 통해 전체의 구성, 규모 등은 알 수 있고 2007년 건청궁의 복원이 이뤄져 건청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건물 전체의 배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장안당(長安堂).곤녕합.복수당(福綏堂)으로 이루어진 구역이 162.5칸, 장안당 서쪽에 있는 각감청(閣監廳) 60칸, 남쪽에 있는 연못과 그 가운데에 만들어진 섬과 향원정(香遠亭), 섬과 건청궁을 잇는 취향교(醉香橋)로 이루어진 궁궐 안 후원 등이 있다.




건청궁은 근세사의 중요한 두 사건인 명성황후 시해와 최초로 전기 설비를 했던 역사적 장소일 뿐 아니라 건축사적 측면에서도 주목해야 할 건물이다. 중국에서도 명나라 때 자금성(紫禁城)에 건청궁.교태전.곤녕궁 등을 세웠는데, 남북 방향으로 일직선 위에 늘어놓는 형식을 택하고 있어, 우리의 것과 이름만 같을 뿐 배치 형식은 전혀 다르다.


경복궁 안에 지은 건청궁의 배치 형식은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공간 구성과 거의 비슷하다는 점에서 창덕궁 후원에 있는 연경당(演慶堂)과 비교, 고찰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



그러면 왜 고종이 왕의 거소인 강녕전을 놔두고 따로 건천궁을 지었을까?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보자. 


먼저 아버지의 간섭에서 벗어나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뜻이었던 듯하다. 건천궁이 완공될 무렵고종 10년 11월 ‘친정선언’ 선언한 것으로 보아 고종의 통치구상과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고종이 거소만은 인간으로서의 편안함을 갖고 싶었던 면이 있을 수 있다. 있을 수 있다. 사실 평생을 왕으로 산다는 것은 일거수일투족이 구속의 연속일 수 밖에 없다. 순조는 창덕궁에 양반 가옥을 본뜬 99칸 집의 연경당을, 헌종은 낙선재를 짓고 거기에 기거했다. 



이런 배경에서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건천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옥 중 하나로 꼽힌다. 건천궁에는 당안당, 곤녕합, 복수당으로 나뉜다. 


장안당은 고종이 기거했던 사랑채이고, 곤령합은 명성황후가 기거했던 안채이며, 복수당은 상궁들의 거소.생물방.곳간 등이 있던 부속건물이다. 


건천궁에 들어서면 행각으로 둘러진 네모반듯한 써비스공간이 나오고 정면에는 곤령합으로 들어가는 함광문이 있고, 왼쪽에는 장안당으로 들어가는 초양문이라는 덧문이 있다. 이는 우리나라 한옥은 사랑채와 안채가 절대로 바로 보이지 않게하고, 또 들어서면 사람이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여백을 제공한다. 



초양문에 들어서면 높직한 석축 위에 장안당 대청과 네모난 석축 기능에 번듯하게 올라앉은 누마루가 기역자로 꺽여 있다. 누마루 이름을 ‘추수부용루’라 한다. 여기서 창밖을 내다보면 향원정 연못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장안당과 곤령합은 긴 회랑으로 이어져 왕과 왕비의 공간이 연결돼 있다. 


곤령합은 장안당과 같은 구조로 약간 작고 여성공간다운 아기자기한 방배치로 되어 있다. 여기에도 기역자로 내어지은 누마루가 있어 ‘옥호루’라 이름했다. 



건청궁은 이처럼 간명한 구조지만 그 외관과 내관 모두가 하나의 공예품처럼 다등어져 있어 우리나라에서 한옥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준 건물이다. 


건청궁이 완공된 것은 1873년으로 이 당시에는 서구 열강들이 쳐들어와 각축을 벌이고 근대문명이 속속 들어오던 시절이었다. 1887년 건청궁에는 국내 최초로 전기가 가설됐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의 궁정설비보다 2년이나 앞선 것이다. 


이때 옥호루 앞마당에 석유등이 외등으로 설치되었던 것이 옛 사진으로 남아 있고, 간청궁 맨 뒷쪽에는 발전기가 들어 있던 긴 건물이 있다. 이처럼 고종은 근대문명을 적극 받아들이려고 했다. 고종은 장안당 뒤편에 관문각이라는 서양식 서재를 짓기 시작했다. 이 건물은 고종 25년(1888) 2월에 착공돼 3년 6개월 만인 1891년 8월에 완공됐다. 



관문각은 완전한 서양식 건물로 지어져 양관이라고 불렀고, 외국 외교관들을 접대하는 장소로 활용됐다. 그러나 이 건물은 10년 만에 헐렸다. 어쩌면 처음 시도한 서양식 건물이었기 때문에 경험부족 탓인지도 모르지만 부실공사였다고 전한다. 이 관문각의 형태가 어떤 것이었는지 지금 알 수는 없으나, 사진에 건청궁 위로 솟아 오른 육중한 이층집으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 


1895년 8월 20일 건청궁 곤녕합에서에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옥호루에 잠시 안치됐다가 건청궁의 뒷산인 녹산에서 불태워졌다. 그리고 6개월 뒤인 1896년 2월 11일,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황세자와 함께 러시아공관으로 옮겨가는 아관파천이 있었고 이후 고종은 건청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주인을 잃은 건천궁은 1909년 일제가 자신의 범행 자취가 남아 있는 이 건물을 경복궁 훼철의 첫 번째 대상으로 헐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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