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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56] 한국 영화 실미도 2003 와 북파 특수 부대들...영화 '실미도' 사건 현장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7-22 11:56:26
  • 수정 2024-04-10 10:5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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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 2003'는 한국 영화 역사에서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한국 영화 시장 확장에 큰 기여를 했다.


이 영화는 북파 특수 부대였던 '실미도 684 부대'를 모델로 그들이 겪은 3년간의 일들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최초의 북파 공작 부대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육군 첩보 부대 산하의 HID가 최초였다. 한 기수에 300여 명씩 3개 기수에 900여 명의 넘는 요원들을 배출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임무를 받고 계속 북한으로 보내졌다.


북파 공작원들 중에는 여성들도 있었다. 그녀들 대부분 남자 대원들의 신분 위장을 위해 군사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고 보내졌다.


한편으로 남자 대원들이 활동이 어려운 경우에는 인민군들의 주둔지 파악과 병력 등을 파악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에도 계속 북파 공작원들이 양성됐고 비밀리에 파견된다. 1994년까지 양성된 북파 공작원은 13,000여 명 정도로 추산되고 1972년까지 북파공작원으로 파견된 인원은 10,0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 중 7,726 명은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는 반공과 북진통일이 확산됐다. 1965년 9월부터 자주 국방과 경제 개발을 위한 선택이었던 연인원 32만 명에 달하는 월남 파병이 이뤄진다.


1965년 'Y 공작 보고서'에는 북한 침투 경로, 임무, 발각되었을 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명령이 들어있었다. 청계산 인근에 특수부대 소속의 북파 공작원 양성 훈련소가 있었다.


1968년 북한 특수부대 민족보위성 소속 124군 부대 31명의 간첩 사건으로 대한민국은 발칵 뒤집힌다.



그들은 1월 16일 황해도 연산을 떠나 남한 국군 복장으로 침투해 1윌 21일 청와대 800m 앞까지 오는데 성공한다.


31명 중 29명이 사망하고 그 와중에도 한명은 북한으로 복귀하고 김신조가 생포됐다. 김신조의 증언으로 북한 간첩들은 기관단총 31정, 실탄 9,300발, TT 권총 31정, 대전차용 수류탄 252발, 방어용 수류탄 252발, 단도 31개 로 무장하고 내려왔다고 한다.


그들은 다양한 특수훈련을 받은 부대였다.


1.21 사태 2일 후 1월 23일 동해 공해상에서 미국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납북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긴장감이 조성된다. 그리고 청계산 특수부대 훈련 강도도 더욱 높아진다.



김신조를 데려와 북한 124군 부대와 똑같은 훈련을 시키면서 그들을 능가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청계산 부대에 북한에 침투하여 살인, 폭파, 요인 암살 및 납치 등의 작전들이 떨어진다. 1.21 사건을 계기로 1968년 4월 1일 향토 예비군 부대가 창설되고 1968년 11월 21일 주민등록증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서울을 요새화하기 위해 유사시에 거대한 방공호가 될 수 있는 남산 1호 터널 공사가 1969년 3월 13일 착공돼 1970년 8월 15일에 완공됐다.


당시 향토 예비군은 전국적으로 200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북파 공작원들이 촬영한 북한 노동 적위대가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1968년 4월 비무장 지역에서 미군 순찰차가 북한군의 습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한다. 같은 해 11월 2일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일어난다. 이번에도 북한군 124군 부대 60여 명이 침투한 것이었다. 1968년 11월 13일 북파 특공대 부대에 명령이 내려졌다.

작전명 황소 2호 공작, 그들은 북방 한계선을 넘어 소련 고문단, 북한군 장교들을 포함해 30여 명을 크레이머 공격으로 전멸시키고 돌아온다.



1.21 간첩 사건 이후 김일성을 제거할 목적으로 북파 공작원 부대들이 만들어진다. 영화로 잘 알려진 공군 소속 실미도 684 부대, 육군 소속 선갑도 부대, 해병대 소속 MIU 부대 등이 그것이다.


'실미도 부대'는 영화에 나온 것처럼 죄수들로 만든 부대는 아니었다. 부대원 대부분은 공군 모병관이 중앙 정보부를 사칭하면서 모집한 평범한 청년들로 시골 청년들, 운동 선수, 서커스단 단원, 운전 기사 등이었다. 부대원 구성으로만 따지면 '선갑도 부대'가 그러했다.


실미도 훈련병 31명들(1.21 간첩 숫자와 같다)은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청년들에게 많은 정부의 경제적 지원(당시 공무원 1년 연봉에 해당되는 월급과 작전 성공 후 거액의 성공 보수 및 미래의 안정적인 직업으로 장교로 임관이나 미군부대에 취직 등)을 약속하며 모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딴 무인도인 실미도에서 김일성 제거를 목표로 1년 6개월 동안 생사를 넘는 극한의 힘든 오소리 작전 훈련 중에 사망하는 훈련병(가혹한 수영 훈련 도중 탈진상태로 익사 1명)도 생겼다. 다른 사망자는 즉결 처형으로 6명이 희생됏다.



그들 중 2명은 무의도에 사역을 나갔다가 미복귀로 발각돼 부대원들에게 집단으로 폭행 당해 죽는다. 그런데 1969년 10월 오소리 작전은 최정예 부대원 9명이 비행정으로 침투 시행 직전에 취소된다.


작전이 취소된 이후 훈련병들의 분위기는 예전같지 않았다. 훈련은 계속되지만 약속했던 훈련병 월급도 안나오고 식사나 대우도 악화됐다.


훈련 대장이 이중 장부를 적어 중간에 착복했던 것이다. 결국 훈련병들에게 제일 많은 원성을 사게 되는 인물로 훈련병들에게 망치로 맞아 죽는다. 실미도에 고립돼 훈련한 기간이 3년이 되면서 훈련병들은 31명에서 24명이 됏다.


7명은 훈련중 사망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훈련병들이 저녁에 소주를 먹다가 훈련 대장에게 걸려 단체 기합을 받는다. 기합을 받자 그동안 쌓였던 불만과 분노가 폭팔하면서 섬을 탈출해 청와대로 가기로 결정 한다.



다음날 1971년 8월 23일 월요일 새벽 6시 신호와 함께 총격전이 시작된다. 기간병 18명, 훈련병 2명이 사망한다.


훈련병 22명은 3년 4개월만에 인천으로 나온다. 그들은 지나가던 버스를 세워 탈취하고 청와대로 향하다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자폭한다.


이사건으로 훈련병 20명, 기간병 18명, 민간인 6명, 경찰 2명이 사망한다.


당시 생존한 4명의 훈련병들에 대한 국회 조사 당시 월남 파병 등으로 회유하여 입맞음을 하고 다음 해 1972년 4월 모두 사형시켜 버린다.



육군 첩보부대 산하 902정보부대 803대, 선갑도 부대는 부대원 착출 조건부터 매우 까다로웠다. 현역 군인이 아닌 남자 중 처자식, 부모 등 가족이 일체 없어야 하고, 생사를 초월할 마음이 있어야 했다. 선갑도 부대는 교도소 죄수 중에서 선발됐다.


중범죄로 안양 교도소에 복역 중인 죄수들 12명으로 구성됐다. 그들에게 사면과 임무 성공시 성공 보수와 사회 복귀 조건을 제시한다. 그들은 인천에서 배를 타고 3시간 정도 가야하는 무인도 선갑도에서 훈련을 했다. 훈련교범은 일본 특수정보학교, 영국의 MIS, 미국의 CIA 를 모델로 했다.


부대원 12명은 상호 차단의 원칙에 따라 훈련과 식사 모두 따로 했다.


백곰팀 6명과 백곰팀 6명으로 나눠 섬의 남쪽과 북쪽 끝에 분리돼 훈련을 받았다. 훈련은 주로 밤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시행됐다. 훈련이 끝나면 개인 은신처를 만들어 잠을 잤다. 그리고 북한 침투시 극한의 상황을 대비한 체력 훈련을 했다. 30kg 모래배낭을 매고 양쪽 다리에 5kg의 모래 주머니를 달고 산악구보훈련을 했다.



그들이 훈련 중인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부대원들의 버스 탈취 사건이 일어난다. 실미도에서 훈련병들의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로 인해 정부차원에서 북파 공작부대에 대한 조사가 시작된다. 정부에서는 심사숙고 끝에 선갑도 부대원들에게 농축산업 교육 등 사회 적응 훈련을 시킨다. 순차적으로 대원들의 형량을 사면해 사면장을 주고 선각도에서 내보기 시작한다. 처음 조건과는 다른 사면이 아닌 만기 출소자로 나간다.


무기징역수 2명은 안양 교도소에 다시 수감돼 1976년에 만기 출소한다. 이렇게 선갑도 부대는 해체됐다.


2002년 HID 북파 공작원들이 광화문에서 가스통 시위를 벌일 때 이들은 시위 현장에서 이를 지켜보았다고 한다. 2004년 5월 신동아에서 선갑도 부대의 실체가 폭로됐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서로 무장도발을 위해 간첩을  파견하는 공식적인 작전을 중지하기로 한다. 북파 공작원에 대해 계속 부인해 오다가 2002년 북파 공작원의 실체를 인정하는 법원의 판결이 내려지며 일반인들도 알게 됐다.



해병대 MIU 부대는 계급은 없고 부대장은 회장, 부부대장은 사장, 전무, 상무, 부장, 과장, 직원 등으로 불리웠다. 이들은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전천후 부대로 일명 '까치부대'라고도 불리웠다. 이들은 강화도 마니산 부근에 주둔했다. 지금도 부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1968년 11월 해병대 장기 하사관 11명, 사병 2명을 선발하여 부대를 만들었다. 2년 후 하사관 15명, 사병 15명을 선발해 2진으로 투입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장교 13명, 요원 158명이 소속됐다.


북한 8 군단과 같은 특수부대를 격퇴하고 북한 주석궁에 침투해 김일성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았다. 해병대 중에서 장남이나 외아들을 제외하고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과 운동 특기자를 대상으로 했다.



이는 훈련 중 사망할 가능성이 높은 강도 높고 위험한 훈련들을 소화해야 했고, 북한에 대한 모든 내용들을 숙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국가를 위한 일로 보상을 받지 않겠다'는 유서를 작성할 정도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투철했다고 한다.


봄에는 강화도 하수구에서 생존훈련하며 일주일 내내 하수구에서 생활했다. 여름에는 보트를 이용한 해상 침투 훈련을 하고 가을에는 공군 첩보 부대에서 공수 훈련을 받았으며 겨울에는 대관령에서 스키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담력 훈련을 위해 비오는 날 공동묘지를 파서 시신이 묻힌 관 위에서 취침하는 훈련도 했다고 한다. 다른 부대와는 다르게 MIU 부대는 북한 침투 후 작전 성공 후에 복귀하는 훈련은 없었다.


이는 작전에 투입되면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을 염두한 것이었다. 이들도 결국은 북한에는 파견되지 않는다. 1975년 부대에서 사병이 당직 사관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곧 해체됐다고 한다./사진-박광준 기자, 영화 '실미도'의 장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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