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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32] 한.중 연합작전으로 영릉가 전투에서 대승 거둔 '양세봉'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2-14 04:4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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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양세봉 梁世奉, 1896.06.05 ~1934.08.12. 평안북도 철산, 독립장 1962


"친애하는 동지들, 이번 전투는 동포 동지들의 생사를 담판하는 결전입니다. 나를 따라 생명을 각오하는 동지들은 손을 들어주십시오.(중략) 조국 광복군과 동만 백만동포들의 생명을 두 어깨에 짊어진 우리는 일당백의 용감한 정신과 아울러 이번 전투에 승리의 믿음을 선포합니다" - 1932년 초 홍경현 대회전을 앞두고 장군이 연설한 대목의 일부분 -


# 어릴 적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에 크게 감동


양세봉(梁世奉, 1896. 6. 5(음) ~ 1934. 8. 12(음)) 장군은 1896년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세리면(洗里面) 연산동(連山洞)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명은 서봉(瑞鳳), 윤봉(允奉)이며, 호는 벽해(碧海)이다. 선생은 어려서 가정이 매우 어려워 철산군 어느 서당에서 소사(小使)로 일하면서 천자문, 동몽선집, 명심보감 등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일제의 침략행위가 이 지역에도 미쳐 선량한 주민들을 약탈하고 온갖 만행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어린 가슴에도 항일 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일제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 의사의 기개에 경탄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다.


16세가 되던 1912년에 부친이 사망하자 선생은 일찍부터 집안 살림을 맡게 됐고 1916년 임재순(任再順)과 결혼해 가계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어 더 이상 국내에서 생활하기가 곤란해 1917년 엄동설한(嚴冬雪寒)에 가족과 같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 관전(寬甸), 환인(桓仁)을 거쳐 영릉(永陵)에 도착해 중국인의 소작농으로 가족의 생계를 연명해 갔다.


1919년 봄 신빈현 홍묘자(紅廟子)로 이사해 살던 중 국내에서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흥동학교(興東學校) 교장 이세일(李世日)과 함께 주민들을 규합해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했다.


# 천마산대에 가입, 무장활동에 참가하다


1922년 독립단 대장인 김명봉(金明奉).정창하(鄭昌夏) 등과 연계해 항일운동을 지원했고 또한 독립단 소속 지방공작원이 되어 식량을 공급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동년 겨울에 의주(義州), 삭주(朔州), 귀성(龜城)군의 경계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천마산대(天麻山隊:隊長 崔時興)에 가입해 창성군 대유동(大楡洞) 경찰서, 금광사무소와 영림창을 기습, 군수물자와 금괴 등을 노획하여 군자금으로 충당했다.


천마산대는 1920년 12월 최시흥.최지풍(崔志豊).박응백(朴應伯) 등이 중심이 돼 청장년 500여 명으로 조직한 무장독립군으로서 재래식 무기인 화승총 및 적에게 빼앗은 무기로 무장하고 도내 각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적의 주재소, 경찰서,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일제의 밀정과 경찰들을 처단하는 등 맹활약을 했다.


동아일보 1933년 1월 26일자 기사1923년 초 천마산대에 대한 일제의 소위 토벌계획(討伐計劃)으로 독립군의 근거지는 물론 그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게 되자 국내에서는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해 최시흥은 천마산대를 이끌고 만주 유하현으로 이동했다. 


그 후 천마산대는 그곳에서 무장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과 합류해 광복군철마별영(光復軍鐵馬別營)으로 확대 개편됐다. 이때 선생은 동영(同營)의 검사관으로 임명돼 불량한 병사들을 선도하는 등 군기 확립에 진력하는 한편 훈련을 강화해 의용군을 정규군 수준으로 끌어올려 총영장인 오동진 장군으로부터 크게 신임을 받았다. 광복군총영은 1920년 9월 중국 관전현 안자구(安子溝)에서 발족한 무장 단체로써 임시정부의 직할군대였고 북한일대를 관할했다.


# 대한통의부 의군으로 활동. 일제 기관들을 분쇄


1922년 8월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을 비롯해 대한광복군 군영(大韓光復軍 軍營), 대한광복군 총영(大韓光復軍 總營), 평안북도 독판부(平安北道 督瓣府) 등 8단 9회의 대표들이 중국 환인현 마권자(馬圈子)에서 남만 한족 통일회의를 개최해 남만의 각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했다. 통의부는 총장(金東三), 부총장(蔡相德) 아래 민사, 교섭, 군사, 법무, 재무, 학무, 실업, 권업, 교통, 참모의 10부를 두었고 부 밑에 국을 두고 비서과와 사판소를 설치해 남만지역에서의 민, 군정을 통합한 독립정부 형태를 갖추었다. 이때 선생은 대한통의부의 의군 산하 제3중대(중대장:최지풍) 소속으로 활동했다. 1923년 5월경에는 평북 창성군(昌城郡), 초산군(楚山郡) 판면(板面), 의주군(義州郡) 고령(古寧) 영산(永山) 일대의 일본 경찰서, 면사무소 등을 습격해 수 십 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23년 8월 독립운동 방략의 대립으로 대한통의부가 의군부로 분할되자 통의부의 의용군 소속 제1, 2, 3, 5중대를 주축으로 해 환인현 마권자에게 참의부를 조직했다. 임시정부 군무부에서는 참의부를 군사단체로 인정해 압록강 연변과 중국의 집안현(輯安縣)을 중심으로 무송(撫松), 장백(長白), 안도(安圖), 통화(通化), 유화(柳河) 등의 동포 사회의 민정과 군정을 관할토록 했다. 참의부는 국내진입 작전을 통해 활발한 무장투쟁을 전개했는데 이때 선생은 참의부의 소대장으로 임명돼 활동했다.


# 국경 순시 온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 저격을 지휘


참의부 소속 제3중대 소대장으로 임명된 선생은 1924년 5월 16일 평북 초산군 성남동(城南洞), 강계군(江界郡) 고산하(高山河)에서 일경과 교전해 수명의 적을 사살했고 특히 일제 침략의 원흉인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국경지역인 압록강을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자 같은 달 19일 참의부 제2중대 제1소대(소대장 한웅권)와 합세해 일제의 경비가 미치지 못한 만주 쪽 강변인 마시탄 절벽에 정예병을 배치하고 사이토가 국경 순시차 압록강 경비선을 타고 지나갈 때 저격을 지휘했다. 경비선이 다가오자 사격이 시작됐으나, 의외로 사거리가 너무 멀었다. 경비선은 빗발치는 탄환을 피해 전속력으로 도주했다. 결국 조선 총독 처단이라는 큰 일은 시도에 그쳤지만, 한국 독립군의 정보력과 실행력으로 일본의 간담을 철렁 내려앉게 한 작전이었다.


조선혁명군기특히 사이토가 3.1운동 후 소위 문화정치라는 미명으로 한국통치에 대해 거짓 자랑만 하고 있었으니 그에게 폭탄적 경고가 됐음은 물론 대내외에 한국 독립군의 활동을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1925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삼시(三矢)와 만주의 봉천성 경찰청장 간에 소위 삼시협정(三矢協定)이라는 재만한인취체법(在滿韓人取締法)을 체결하게 됐고 중국 당국은 독립운동을 탄압할 의무를 갖게 돼 독립군 활동에 적지 않은 타격을 받게 됐다.


# 평북 강계, 위원 등지에서 국내 진공작전을 활발히 전개


1924년 6월에는 참의부 소대원을 이끌고 평북 강계, 위원에 진입해 일제 경찰대와 교전했고 같은 해 말에는 참의부 제3주대장으로 승진해 남만주 화전현(樺甸縣) 일대에서 항일 무장활동, 부일배(附日輩) 숙청 등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같은 해 7월 통의부 사령장 겸 군사위원장 신팔균 장군이 왕청문(旺淸門) 이도구(二道溝) 밀림리(密林里)에서 무관학교 관병들을 훈련시키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적 떼들이 급습헤 위기에 몰리자 선생은 대원들과 함께 신속히 구출작전을 펼쳐 엄호 사격을 가했으나 신팔균 장군 등 수 십 명의 독립군들이 전사하는 비운을 겪게 됐다. 통의부는 위기에 봉착하게 됐다. 1924년 7월 길림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를 개최해 대동단결에 합의를 보고 동년 11월 25일 통의부를 비롯해 대한군정서, 길림주민회, 의성단 등 10여 개 단체의 대표인 김동삼(金東三).고할신.이진산(李震山).이천민(李天民).김호(金虎).이장녕(李章寧) 등 25명이 회집해 김동삼 선생을 의장으로 선출한 후 협의를 거듭한 끝에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했다.


정의부는 지역군사 재정, 행정, 교육, 사법 등 모든 부문을 국가체제에 준해 조직했다. 그러나 정의부가 성립된 지 1년이 못 되는 1925년 9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선임된 이상룡(李相龍)은 재만(在滿) 독립운동 지도자인 오동진(吳東振).김동삼.윤세용(尹世湧).이유필(李裕弼).김좌진(金佐鎭).현천묵(玄天黙) 등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3부 대표자를 고루 임정 각료로 입각시키게 됨에 따라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는 독립운동상의 실리론(實利論)이 대두돼 정의부의 내분이 표출됐다. 이에 1926년 1월 중앙회의 상임위원장 이해룡(李海龍)은 사태를 수습키 위해 비상의회 격인 군민대표회(軍民代表會)를 개최해 새로운 헌장을 제정하고 이에 따라 새로운 중앙의회와 행정위원회를 구성했다.


조선혁명군 속성군관학교 유적지 사진이로써 정의부는 남만지방에 있어서 공화정체를 뚜렷이 한 한족행정부(韓族行政府)로서 기반을 굳혔다. 같은 해 11월 선생은 정의부 1중대장에 임명돼 일제 군인, 경찰 등을 제거하는데 앞장서 활약했다. 당시 중국의 국민당은 국공합작에 의해 통일전선이 형성되고 국내에서는 좌우익의 통합체인 신간회를 결성하는 등 연합전선을 추진하는 통합운동이 일어나자 만주지역에서도 정의부를 주축으로 해 1928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15일간 중국 화전과 반석 등지에서 18개 단체의 대표 39명이 참석해 전민족유일당조직회의(全民族唯一黨 組織會議)를 개최했다.


# 정의부 대표로 민족유일당 회의에서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앞장


이때 화전현에서 정의부의 의용군 중대장으로 활약하고 있던 선생은 정의부 대표로 유일당 조직회의에 참석해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을 새로 결성했으나 청년동맹이 주축이 돼 결성된 민족유일당 촉성조직동맹(당시 공산주의자와 연계되어 있었음)의 비협조로 유일당 조직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후 1928년 9월 길림 근방 신안둔(新安屯)에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대표가 모여 3부 통합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다음 해인 1929년 4월 정의부를 주축으로 신민부 민정위원회 측(대표 이교원)과 참의부 측(심용준)이 모여 새로운 군정부인 국민부를 조직했다. 이때 선생은 제1중대장으로 임명돼 활약했고, 국민부 산하 선민부토벌 지휘부(鮮民府討伐指揮府)를 조직해 동 지휘부의 부사령이 돼 총사령 이웅(李雄)과 함께 일제의 주구기관인 선민부(鮮民府)를 토벌하는 것을 주 임무로 하여 일제 기관을 습격하고 일제 밀정 등을 처단하는데 앞장섰다.


# 국민부 산하 무장단체인 조선혁명군을 조직해 부사령에 취임


같은 해 12월 국민부 중앙회의에서 민족 유일당조직동맹을 조선혁명당으로 개편하고, 동시에 그에 소속돼 있던 혁명군을 독립시켜 국민부 예하조직으로서 무장단체인 조선혁명군을 조직해 종전의 정의부에 소속돼 있던 부대를 개편하고 참의부와 신민부에 있던 일부 병력을 흡수해 통합시켰다. 선생은 부사령이라는 중책을 맡아 적기관 습격 및 일제의 밀정처단 등 무장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1930년 8월 조선혁명당 대표자 회의가 개최되고 있었다. 


선생을 비롯해 현익철(玄益哲).고이허(高而虛).김문학(金文學).양하산(梁荷山)(본명 梁基瑕) 등 민족주의 이사들은 국민부를 적극 지지하고 당의 위원회에서 결정한 사항의 실행을 주장한 반면, 고할신.김석하(金錫夏).이웅(李雄).현정경(玄正卿).이성근(李成根) 등은 이에 반대해 국민부 및 조선혁명당을 해체하고 군대를 적위군(赤衛軍)에 편성하고 농민은 농민협회를 조직하여 유력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만주사변 후 한.중 연합부대를 편성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한국과 중국의 연대투쟁의 필요성이 절실해 선생은 같은 해 11월 신빈현 왕청문(旺淸門)에서 중국인 왕동헌(王彤軒)의 요녕농민자위단(遼寧農民自衛團)과 협의해 연합부대를 편성했다. 그리고 선생은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에 선출돼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쌍수하자 전경1932년 1월 조선혁명당.군의 주요 간부들은 중국 신빈현(新濱縣) 하북(河北)에 있는 서세명(徐世明)의 집에서 중앙 간부회의를 소집해 9.18사변 이후 당면한 현안 문제를 논의하던 중 친일주구단체인 보민회의 밀고를 받고 출동한 통화 일본영사 분관 경찰의 습격을 받아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이호원(李浩源), 조선혁명군 사령관 김보안(金輔安), 부사령 장세용, 부관장 박치화, 경위대 대장 이규성(李奎星), 국민부 공안부 집행위원장 이종건 등 10여 명이 체포됐고, 이후 3월 초까지 계속된 일경의 검거로 9개 현에서 간부 83명이 체포되는 등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 조선혁명군 총사령이 돼 부대를 재정비하고 군사양성에 힘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선생을 비롯해 양기하, 고이허 등 조선혁명당의 중견 간부들은 조혁군각지부대 수뇌회의(朝革軍各地部首腦會議)를 소집하고 위기에 처한 조선혁명군과 조선혁명당의 자구책을 토의한 후 조직을 재정비했다. 선생은 조선혁명군 총사령에 선임되고 조선혁명당 주석에 고이허, 국민부 집행위원장에 김동산(金東山), 혁명군 참모장에 김학규(金學奎), 재정부장에 이상관(李相官), 외교부 및 임시정부 특파원에 홍심원(洪深元)이 각각 임명됐다.


총사령에 임명된 선생은 일제와의 결전을 수행키 위해 군의 조직을 5개사로 개편해 제1사령에 박대호(朴大浩), 제2사령에 한검추(韓劍秋), 제3사령에 조화선(趙化善), 제4사령에 최윤구(崔允龜), 제5사령에 정광배(鄭光培)를 임명했다. 그리고 총사령 본부를 홍경현 왕청문에 이동해 설치하고 정의부에서 세운 화흥중학(化興中學)을 속성사관학교로 개편해 조선혁명군 관할하에 귀속시키는 동시에 강전자(江甸子)로 옮겼다. 속성사관학교의 교장에 양하산(梁荷山), 총대장에 윤일파(尹一波), 교관에 한국신(韓國信) 등을 임명하고 선생은 명예교장으로 독립군을 양성해 항일역량을 높이는 데 진력했다.


# 한.중 연합군 조직, 200여 차례 항일전


동시에 밖으로는 중국 의용군 총사령 이춘윤(李春潤)과 협의해 요녕 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을 조직하는 협정을 체결한 후 조선혁명군은 특무대와 선전대대로 편성해 선생이 요녕민중자위군의 특무대 사령으로, 김광옥(金光玉)은 선전대대장으로 활동했다. 조선혁명군이 특무대와 선전대대로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게 된 것은 중국군에 비해 부대규모가 작지만 뛰어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중연합군의 편성은 각처에서 발호하고 있는 중국인 무장단체인 대도회(大刀會)와 홍창회(紅槍會) 등의 무질서한 행동을 자제시켰고, 동시에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도 호전됐다.


또한 중국 군벌인 당취오(唐聚五).왕육문(王育文).손수암(孫秀岩).장종주(張宗周).왕봉각(王鳳閣).서대산(徐大山) 등도 이에 호응해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협정을 맺은 후 같은 해 10월까지 요녕민중자위군과 조선혁명군의 연합군은 일군과 거의 2백여 차례의 대소 전투를 치뤘다. 1932년 3월 선생은 참모 김학규, 중대장 조화선.최운구.정봉길 등의 3개 중대를 인솔하고 중국 의용군 왕동헌.양석봉 등의 부대와 합세해 신빈현의 왕청문에서 무순 천금채(撫順 千金寨)로 진군하는 도중 신빈 남쪽에 숙영하게 됐다. 이 정보에 접한 신빈현 주둔 적 관동군은 박격포, 기관총 등 중화기로 무장해 연합군을 총 공격했다. 그러나 지리에 익숙한 조선혁명군의 전술에 말려들어 교전 1시간 만에 일군이 고지를 빼앗기고 퇴각하자 30여리를 추격해 이날 신빈 동쪽에 있는 영릉가성(永陵街城)에 이어 상협하(上夾河)까지 점령했다.



# 한.중 연합작전으로 영릉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수많은 전리품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는 한편, 한.중 양 민족간의 갈등을 융화시키고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1932년 3월 하순 영릉가 전투에서 참패 당한 일군이 폭격기까지 동원해 전격적으로 흥경성을 점령하자 장군은 이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고려해 중국 의용군 이춘윤 부대 1만여명과 연합해 조선혁명군은 동문으로 돌입하고 중국 의용군은 북문으로 총 공격했다. 기진 맥진한 적군은 서남문으로 패주하고 말았다. 마침내 흥경성에서도 태극기와 청천백일기가 펄럭이면서 전승(戰勝)축제가 무르익어 사기가 충천했다.


같은 해 5월 초 요녕민중항일자위군(遼寧民衆抗日 自衛軍)의 이춘윤, 왕동헌 분대와 함께 일.만군을 타격키 위해 신빈현 영릉가로 진격,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병력 등의 부족으로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후 10월까지 조선혁명군은 여러 차례의 대소전투를 치뤘으나 공군력이 없기 때문에 열세를 면하기 어려웠다. 당시 요녕민중자위군 중국측의 사령관이던 왕동헌의 기고문을 통해 조선혁명군의 피 눈물나던 혈전을 되새겨 본다. 중경에서 발간했던 <월간 한민(月刊韓民)>에 수록된 내용 중 일부다.


민국(民國) 21년 2월 8일 한.중 민중으로서 총이 있는 사람이면 총, 총이 없는 사람은 호미, 낫, 괭이 심지어는 단도까지 들고 나와서 동지(同志)들을 모았다. 이와 같은 호소에 호응하여 적을 격멸하기를 지원해 나온 자가 한국사람이 8백 명, 그리고 중국측에서는 전 자위단(前 自衛團) 용사 5백 명을 빼고도 2천 5백 명이나 되었다. 곧 맹세해서 의거를 일으켰다.(중략)


슬프다! 산하(山河)는 그대로 있건만, 인사(人事)는 기대에 어긋났다. 양세봉·양하산 두 장군은 전후(前後)해서 전망(戰亡)하고 김학규 대표는 관내(關內 : 산해관 안의 중국 본토)로 들어갔다.(하략)


1933년 1월에는 중국 당취오 부대가 와해, 붕괴됨에 따라 왕청문 남의(南依) 목수둔(木樹屯)에서 조선혁명군 수뇌부 소집회의를 개최해 선생을 총사령에 재임용하고 부사령에 박대호(朴大浩)를 임명하는 동시에 부대를 3개 방면군으로 개편하고 조선혁명당 총령에 고이허, 국민부 부위원장은 김동산을 임명했다. 그리고 병력 충원과 재정조달방법을 모색하고 군규(軍規)를 제정해 민족단결을 꾀하고 중국 의용군과 연합해 유격전을 전개키로 했다. 같은 해 4월 조선혁명군의 활동무대를 집안현, 임강현(臨江縣) 일대의 한.중 국경지대로 옮겨 유격전과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했고, 5월에는 서원준(徐元俊)을 국내유격대장의 직책으로 황해도에 밀파해 사리원 경찰서 등을 습격했다. 1934년 3월 홍경현 쌍립자(雙砬子)에서 조선혁명군은 간부회의를 소집해 (1) 조선혁명군의 항일연합 범위 확대 (2) 항일근거지 건립 (3) 일본 침략자 타격 등에 대한 방침을 정하여 다른 무장투쟁세력과 연계해 추진키로 했다. 



# 홍경성, 노구대, 쾌대무자 전투에 참전, 연전연승


같은 해 6월 참모장 김학규를 북경에 미파해 중국 관내로 철수한 당취오와 연락하고 장개석의 국민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홍경현 진주령(珍珠嶺)에서 일본군 기차를 습격해 수 십 명의 적을 처단하는 등 같은 해 6월까지 계속 항일전을 전개했다. 같은 해 7월 7일 일군이 영릉가 석인구(石人溝)의 조선혁명군 사령부를 습격했으나 조화선 부대의 지원으로 조선혁명군은 과감한 반격을 하여 일군 40여 명을 사살하고 경기관총 3정과 중포 1문, 소총 80여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7월 중순에 양세봉 부대는 이춘윤 의용군 부대의 잔류병 5백명과 합세해 무순현 노구대(老溝臺)를 점령하고 1개 연대규모의 일군과 교전, 만 2일간의 격전을 치루었다. 그 뒤 일군은 다시 1개 대대의 병력으로 통화현 쾌대무자(快大茂子)에 주둔하고 있는 제1방면군 최윤용 부대를 습격했으나 조화선 부대의 지원을 받아 일군은 격퇴되고 말았다. 이때 패퇴하는 일군을 다시 최주봉 부대가 추격하여 80여명을 사살했다.


# 독립군 최후의 맹장, 일본 밀정에 의해 최후를 마치다


이 무렵 일제의 밀정 박창해(朴昌海)가 혁명군을 직, 간접으로 후원하던 중국인 왕명번(王明藩)을 매수해 환인현에 머물고 있던 장군을 찾아가 중국 항일군과 연합을 논의하자는 구실로 장군을 환인현 소황구(小荒溝)의 골짜기로 유인했다. 1934년 8월 12일(음) 장군은 부관 김광욱(金光旭), 김성해(金星海), 김추상(金秋霜)과 같이 왕씨를 따라 나섰다. 일행이 대랍자구(大拉子溝)로 가던 도중 돌연 좌우 수수밭에서 수십 명의 괴한이 뛰쳐나와 일행을 포위하는 순간 왕씨는 장군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나는 지난날의 왕씨가 아니다. 이 탄환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일본군에게 항복하라”라고 고함을 쳤다. 장군은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위엄 있게 꾸짖었으나 끝내 밀정 박창해와 중국인 왕씨 등 주구배들의 저격을 받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장군이 순국하자 동지들은 일제 측에서 모르게 산 중턱에 평장(平葬)을 하였는데, 통화 일본 영사관 경찰이 이를 탐지하고 묘를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 목을 가져가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인륜도 도덕도 없는 야만이다. 일제의 그 잔악상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을 것인가. 장군이 순국한 후에도 김호석(金浩石)이 총사령에 취임했으나 조선혁명군은 급격히 세력이 위축돼 소규모 유격전으로 겨우 독립군의 명맥을 유지했다. 항일무장투쟁사에 있어서 일찍이 명성을 떨쳤던 김좌진, 홍범도 등과 함께 실력과 명망을 가진 벽해 양세봉 장군의 위국헌신과 멸사봉공은 영원할 것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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