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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109] 송학선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나라를 강탈한 일제 총독을 처단 못한 것이 한이 될 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4-03-29 05: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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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송학선, 1897 ~1927, 독립장 (1962)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 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총독을 못 죽인 것이 저승에 가서도 한이 되겠다. - 선생의 법정 진술 중에서(1926.7) 


# 정직하고 청결한 것을 좋아하던 외유내강의 성품


송학선(宋學先, 1897.2.19 ~ 1927.5.19) 선생은 1897년 2월 19일 서울 천연동(天然洞)에서 아버지 송성근(宋聖根)과 어머니 김씨 사이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1922년부터 애오개[阿峴] 마루턱 북아현동(당시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아현북리)에 이주하였다. 선생의 아명은 인수(仁壽)이고, 또 학선(學善)이라고도 불렀다. 학선(學善)이라고 이름한 것은 배움을 좋아하고 매사에 학문과 선행을 일삼으라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집안의 이 같은 분위기에 따라 선생의 아우 이름도 ‘또학선[又學善]’과 ‘삼학선(三學善)’이라고 불렀다.


선생의 성품과 자질에 대해 송상도의 [기려수필]에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과묵하여 일생을 두고 남과 언쟁을 하지 않았고, 밖에 출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항상 청결함을 좋아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거사 직후 ≪동아일보≫에도 어머니가 선생의 성격에 대해 기자에게 한 말 가운데 “성질이 본래 정직하고 청결한 것을 좋아해서 평소에 음식을 먹어도 깨끗한 것만 좋아했다.”고 하고(≪동아일보≫ 1926년 5월 3일자), 동생인 ‘삼학선’의 증언에도 “청결한 것을 몹시 좋아하는 결벽증이 있었던 모양으로 늘 몸을 깨끗이 가꾸었으며 하루에도 발을 두 세 번씩 씻었다.”고 한다. 주위의 그 같은 평가와는 대조적으로 선생의 성품과 자질은 의거와 거사 이후 보여준 대담성과 침착성을 볼 때 외유내강하는 강직한 성품을 가졌다고 보인다. 그러한 선생의 성품은 재판과정의 의연한 태도로 방청하는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선생은 13세(1909년) 때 서대문공립보통학교 1학년에 다니던 중, 아버지의 사업이 파산하는 바람에 가정이 궁색해져 가족들이 이산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전라도로 연근장사를 떠났고, 선생과 아우도 집을 떠나야만 했다. 이때 선생은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갖은 고생을 하였다. 17살(1913년) 때 장사를 갔던 아버지가 돌아와서 만리동에 있는 조선인쇄소(朝鮮印刷所)에 취직하였다. 다시 가족들이 함께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살(1916년) 때 서울 남대문통에 있는 일본인 토다[戶田春藏方]가 경영하는 농구회사(農具會社)에 고용원으로 취직하였다. 이 회사는 시골 정미소에 발동기를 판매하는 회사였다. 여기서 선생은 장사 심부름도 하고 발동기 운전과 수선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동생 ‘삼학선’도 같은 회사에 다녔다. 아버지와 아들들이 직업을 가지면서 집안 살림이 조금씩 나아지게 되었고, 1922년 2월 드디어 북아현동에 집을 장만할 수 있게 되었다.


이즈음 가족들은 그런 대로 살만한 처지가 되었으나, 선생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 이유에 대해 판결문 등에는 급성 각기병에 걸려 전신을 못쓰게 되어 노동을 할 수 없어 회사에서 해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생의 증언에 따르면 같은 회사에 다니던 아우 ‘삼학선’과의 불화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회사를 그만둔 선생은 실직상태에서 급성 각기병에 걸려 병을 치료하면서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1925년 봄에 완쾌되었다.


# 일본인 직장에서 받았던 민족적 차별.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며 흠모


송학선 선생 가족 사진선생이 반일 감정을 느낀 것은 매우 어렸을 때부터였다고 한다. 어느 날 동무들과 진고개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하얼빈 역두에서 침략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보았다. 이때 안중근의 의거에 대해 동무들과 얘기를 하였고, 그를 흠모하면서 본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그 후 선생이 본격적으로 반일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일본인 농구회사에 있을 때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정사정으로 취직을 하였지만 그 직장이 일본인 회사였다. 이때 선생은 민족적 차별을 받았고, 병으로 강제 해고당하면서 그러한 의식이 더욱 뚜렷해졌을 것이다.


그 후 선생은 그 같은 반일의식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였다. 선생이 그토록 흠모해 오던 안중근과 같은 거사를 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 대상으로 조선 총독을 목표로 삼았다. 총독을 제거함으로써 우리민족을 억압하는 일제에 투쟁하는 것을 보여 주고, 나아가 우리의 독립의지를 대외적으로 알리고자 하였다.


거사를 실행하기 위해 치밀한 준비를 하였는데, 신문이나 책 등에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사진을 보고 그 용모를 머리에 새겨두었다. 그리고 사이토 처단에 사용할 칼을 구하였다. 선생은 틈만 나면 이 칼을 갈면서 자신의 마음을 다졌다. 또 시간만 있으면 집 뒤 애기릉이 있는 산에 올라가서 소나무를 상대로 칼 꽂는 연습을 하였다.


# 수리 중이던 사진관 식당에서 양식용 칼을 발견하고 “하늘이 주신 것”


그러던 중 1926년 3월 수리 중이던 경성사진관(京城寫眞館)의 부엌에 양식칼[洋食刀]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내가 사이토를 죽이고자 한 것이 몇 년 전부터의 소망이었는데, 좋은 칼이 없는 것이 한이었는데 오늘 이 칼을 얻은 것은 하늘이 주신 것”이라고 하며 매우 기뻐하였다. 이 칼은 손잡이가 흰 뼈로 되어 있고 칼날이 4촌 5푼 가량 되는 고급 과도였다. 선생은 이것을 숫돌에 갈아 미닫이 창틀 위에 놓아두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 총독을 처단하기로 한 것은 일본인 회사를 그만둔 이후부터가 아닌가 짐작된다.


송학선 선생의 집 사진

병을 치료하면서 직업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정사정은 더욱 열악해졌으며, 1925년 봄부터 병도 완치되었다. 성혼은 못하였지만 나이는 서른이 되어 가정을 돌보지 않을 수 없어 선생은 장사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마침 장충단에서 자전거대회가 열리는데 이곳에서 밀감과 얼음장사를 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밑천이 있어야 하는데 돈이 없었다. 그래서 선생은 어머니에게 장사를 하기 위한 돈을 구해 달라고 하였고, 어머니는 전당포에 겨울 옷가지를 잡혀 3원을 구해주었다. 선생은 그것을 밑천으로 물품을 구입하여 장충단에 나갔다.


그날이 바로 융희황제가 붕어한 날인 1926년 4월 26일이었다. 장사를 나간 아들이 미친 듯이 집에 돌아와 저고리를 벗고, 셔츠 바람에 양복저고리를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때까지 어머니는 장사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왔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장사를 나간 선생은 장충단에서 융희황제가 붕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장사물품을 팽개치고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창덕궁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 융희황제 돌아가신 후 빈소가 마련된 창덕궁 금호문 앞에서 칼을 품고 일제 총독을 기다려


총독을 처단할 것을 결심해 온 선생에게 그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융희황제가 붕어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비통함을 참을 수 없어 곧바로 창덕궁으로 달려가 망곡대열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마치 부모가 죽은 것처럼 슬퍼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융희황제의 빈소는 창덕궁에 마련되었고, 빈소의 출입문은 창덕궁의 서남문인 금호문이었다. 선생은 그 문을 통해 총독부의 고관들이 출입하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문득 이곳으로 총독도 들어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속으로 품고 있던 총독 처단을 이곳에서 할 수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곳에 총독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판단하고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호곡을 하며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일제는 융희황제가 붕어하자 3.1운동 때와 같은 거사로 발전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4월 27일부터 서울시내의 경찰병력을 증강하기 위해 인천·파주·수원·개성 등의 경찰까지 출동시켰다. 그리고 돈화문 앞에 임시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경찰은 물론 기마순사(騎馬巡査)와 헌병까지 포진시켜 삼엄한 경계를 폈다. 그리고 이튿날인 28일에는 다시 경찰 교습생까지 동원하고 새로 권총 1백정을 배부하는 등 비상경계를 강화하였다.


‘금호문 사건’ 현장 사진선생은 총독을 처단하기 위해 4월 27일에도 집을 나서 창덕궁 앞에서 사이토가 오기를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인 4월 28일에도 칼을 품고 평소처럼 위에는 셔츠를 입고 밑에는 한복 바지를 입고 평상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오전 11시쯤 돈화문 근처에 도착하여 금호문 주위를 서성대며 기다렸다. 그런데 정오쯤에 일본인 세 명이 탄 무개차(無蓋車) 한 대가 창덕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선생은 그 차가 총독부의 고위관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오후 1시 10분 경 조문을 마친 그 자동차가 금호문 안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고, 차 에는 세 명이 타고 있었는데 중앙에 앉은 자가 총독 사이토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사이토 총독이다.”라고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금호문 빠져 나오는 무개차 속의 일본인들 가운데 ‘사이토 총독 얼굴’을 찾아내고 거사 실행


이 소리를 들은 선생은 그동안 준비해 온 거사를 실행할 수 있겠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온몸의 피가 머리로 솟구치면서 머리카락이 쭈뼛해졌고,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품었던 칼로 손이 올라갔다. 하지만 금새 냉정을 되찾고 침착하게 차 안을 살펴보니 가운데 앉은 자가 살이 찐 것이 사이토 총독과 흡사하게 생겼다. 총독이라는 판단이 서자 선생은 거사를 결행하기로 하였다.


선생은 자동차 뒤를 따라가며 동정을 살피면서 실행의 기회를 엿보았다. 금호문을 빠져 나온 자동차는 와룡동(臥龍洞) 창덕궁경찰서장 관사 앞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창덕궁으로 가는 사람들이 길을 메우고 있었다. 자동차는 그곳으로 더 이상 갈 수 없어, 다시 돈화문 방향으로 차를 돌려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잠깐 머물고 있을 때 선생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비호같이 자동차의 왼쪽 승강대로 뛰어 올라 왼손으로 차창을 잡고 오른손으로 칼을 뽑았다. 그 칼로 뒷자리 중앙에 앉아 있는 살찐 자를 찌르려고 한 것이다. 그러자 왼쪽 앞자리에 있던 자가 급히 손을 들며 일어나 저지하려 하니, 선생은 그 자의 오른쪽 가슴과 왼쪽 허리를 찔러 쓰러뜨렸다. 그리고 총독이라고 생각한 자를 향해 가슴과 배를 찔러 쓰러뜨리니 전광석화와 같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선생이 사이토로 생각하고 처단한 사람은 사이토 총독과 체격과 생김새가 비슷한 일본인민회(日本人民會) 이사 사토[佐藤虎次郞]였다. 그리고 자동차의 왼쪽에 앉아있던 사람은 국수회(國粹會) 부회장 타카야마[高山孝行]였고, 오른쪽에 타고 있던 자는 경성부협의회 의원 이케다[池田長次郞]였다.


거사를 실행한 후 선생은 사이토 총독을 처단하였다고 생각하고, 재빨리 차에서 뛰어 내려 재동 쪽으로 달아났다. 갑작스런 사건에 부근에 있던 기마순사 후지와라[藤原德一]가 경적을 불며 그 뒤를 추격하였고, 그 소리를 듣고 선생을 붙잡으려고 서대문경찰서 순사 오환필(吳煥弼)이 달려들었다. 이에 선생은 오환필의 배를 찔러 넘어뜨리고 다시 달아났다. 그러자 기마순사는 말을 돌려 선생의 앞을 가로막았고, 뒤에서 수 십 명의 일경들이 추격하여 왔다.


# 혈혈단신으로 처단을 완성하고 쫓아온 수 십 명의 일경들과 좁은 골목에서 격렬한 접전


선생은 휘문고등보통학교 문 앞 골목으로 들어갔다. 따라오던 후지와라 순사가 칼을 뽑아 선생을 내려치자 날쌔게 몸을 피하니 칼이 땅에 떨어졌다. 이와 동시에 선생은 떨어진 칼을 집어 들고 격투를 벌였다. 그런데도 일경들은 선생의 강력한 저항에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였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일경들은 주위의 돌멩이를 집어 선생을 향하여 던졌다. 선생은 돌멩이를 이리저리 피하면서 도리어 그 돌멩이를 집어서 순사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던 중 겁에 질린 헌병 두 명이 선생을 향해 권총으로 4발의 총탄을 쏘았다. 하지만 선생은 “오냐 쏘아 죽여라.”라고 하면서 두 팔을 떡 벌렸다. 총까지 쏘아도 할 수 없으니, 일경들은 칼을 겨누고 달려들었고 그 중 한 명이 너댓 발이나 되는 대가지로 찌르며 공격하였다. 선생은 다시 옆으로 통한 샛길로 피해 가다가 따라오는 순사 한 명을 칼로 쳐서 쓰러뜨리고 한동안 혈전을 계속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머리에 상처를 입고 일경들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이때 선생은 휘문고보 앞에서 구경하던 학생들에게 “만세 불러라 만세 불러!”라고 소리를 쳤다. 선생의 칼에 찔린 타카야마는 이왕직 의무실에서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워낙 중상이었기 때문에 사망하였고, 총독으로 오인되어 칼에 찔린 사토는 중상을 입고 총독부의원에 입원하였다. 또한 선생을 뒤쫓았던 오환필 순사는 중상을 입고 사망하였으며, 후지와라 순사도 머리에 칼을 맞고 총독부병원에 입원하였다.


금호문 사건’ 보도 기사 # 그러나 실상은 사이토 총독이 아니라 일본인민회 이사 사토였다는 사실


일경에 체포될 때까지 선생은 자신이 처단한 사람이 사이토 조선 총독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도 당당하게 심문을 받았다. 일제 경찰도 선생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살인행위로 알았는데, 사이토 총독 처단을 위해 자동차를 습격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종로경찰서장이 선생에게 “타카야마와 사토를 무엇 때문에 살상하였느냐?”고 추궁하였다. 선생은 자신이 처단한 자가 사이토 총독이 아니고 타카야마냐고 물었다. 처단한 자가 사이토 총독이 아닌 데에 크게 실망한 것이다.


놀란 것은 선생뿐만 아니라 일제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선생이 처단하고자 한 자가 조선 총독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중대사건이기 때문에 그 배후 관계를 추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아가 일제는 융희황제가 붕어한 때에 이러한 사실이 알려진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스럽지 못하다고 판단하였다. 사건이 일어난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호외로 보도되었으나,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배부가 중지되었다. 아무리 보도관제를 하여도 창덕궁 앞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보았고, 특히 휘문고보 학생들이 현장을 적나라하게 목격하였기 때문에 이 일은 입과 입으로 퍼져 나갔다. 이에 일제 당국은 5월 2일에 가서야 그 사실을 발표하고 사실 심리를 빨리 진행하기로 하였다.


일제 경찰은 선생을 ‘살인 및 상해죄’로 기소하여 예심에 넘겼고, 선생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사토미[里見] 검사로부터 취조를 받게 되었다. 이때 선생은 사건의 일체를 숨김없이 밝혔다. 예심이 진행되는 동안 6․10만세운동이 일어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진행되었고,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이어졌다.


# 검찰 취조가 진행되는 동안 6.10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선생의 법정에는 구름 같은 방청객이


금호문사건 宋學先의 二審 公判그런 가운데 7월 15일 제1회 공판이 경성지방법원 제7호 법정에서 열렸는데, 변호사로는 이인(李仁)과 마츠모토(松本正覺) 변호사, 그리고 평양에 있는 한근조(韓根祖) 변호사가 맡았다. 공판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방청하려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법정 안은 물론 밖에까지 사람의 바다를 이루는 엄청난 광경이 벌어졌다. 그리고 법정에는 견학을 빙자하여 경성법학전문학교(京城法學專門學校), 법정학교(法政學校) 학생들이 방청하였다. 재판장이 예심종결 결정서를 낭독한 후 사실심리에 들어갔다. 재판장이 “칼은 무슨 목적으로 가져갔는가, 강도질할 목적은 아니었던가?”라고 질문을 하자, 선생은 대번 “내가 언제 강도질을 하였소?”, “창덕궁 앞에서든가 어디서든지 총독을 암살할 목적으로 가지고 왔었소”라고 반박하면서 총독 처단이 목적임을 밝혔다. 그 후로도 재판장은 선생이 총독을 암살하려는 것이 아니고 생활이 곤란하여 그런 행동을 하게 되지 않았느냐 등의 질문으로 거사 동기와 목적을 희석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선생은 자신의 행동 목적을 분명히 함으로써 재판장의 질문을 막았다.


재판을 받은 과정에서도 선생은 언제나 당당한 태도로 일제의 간교한 조작 행위를 꾸짖고 의거의 동기를 밝혔다. “피고는 어떤 주의자인가, 사상가인가?”라고 물을 때,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 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총독을 못 죽인 것이 저승에 가서도 한이 되겠다.”라고 대답하였다.


#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나라를 강탈한 일제 총독을 처단 못한 것이 한이 될 뿐”


또한 사형을 선고 받는 과정에서도 선생은 의연함을 보였다.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7월 23일 아침 10시쯤 선생은 베 고이적삼을 입고 깊은 삿갓에 쇠수갑을 찬 채 서대문형무소 미결감에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공판의 날이 왔건만, 조금도 근심하는 기색이 없이 평소와 마찬가지로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그런 다음 태연한 태도로 있다가 자동차를 타고 경성지방법원으로 와서는 곧 재판소 구치감으로 들어갔다. 그날 방청석에는 선생의 모친을 비롯해 빽빽이 방청객이 들어찼고, 법정 내외에는 경찰들이 엄중히 경계하고 있었다. 11시 15분 미타무라[三田村] 재판장과 에토[江藤]·와키[脇] 배석판사가 형법 제199조, 제203조, 제55조에 의하여 ‘살인 및 살인미수죄’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사형을 선고 받은 선생은 복심법원에 공소(항소의 옛말)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선생을 형장으로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아우 ‘삼학선’이 연 이틀을 따라 다니며 졸라대자 선생은 식구들의 정성에 굴복해 공소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1926년 7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 공소하였던 것이다.


제2심 재판은 그 해 10월 11일 열렸다. 그러나 방청객이 너무 많아 일제는 방청권을 발부하여 방청을 제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백 명 정도의 사람들이 법정을 가득 메웠고, 방청권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법정밖에 모여 혼잡한 상황을 연출하였다. 법정에는 선생의 두 동생을 비롯하여 친척들, 그리고 경관강습소의 경부보 50여명과 수 십 명의 경찰들이 삼엄하게 경계하였다.


# 일본인 마츠모토 변호사는 “무기나 유기징역이 마땅하다”고 변론하였으나…

송학선 선생 사형집행 보도 기사아침 9시에 선생은 평소와 다름없이 씩씩한 모습으로 법정에 출두하였다. 가족들과 변호사의 간곡한 설득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공소를 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심과 제1심의 진술을 번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츠모토 변호사도 최소한 사형이라도 면해 보기 위해, “송학선이 답변하는 것과 그밖에 여러 가지 태도를 보아 정신이 온전한 사람 같지 않으니 상당한 의사에게 그 정신을 한번 감정시켜 보라”고 주장하였다.


다시 11월 3일 제2차 공판이 속개되었는데, 이날도 제1차 공판 때와 같이 일반 방청객들이 입추의 여지가 없었고, 법정 안팎에는 경찰들이 경계를 엄중히 하고 있었다. 이어 검사는 선생이 경찰조서와, 검사국 예심, 제1심에서까지 범행사실과 살의(殺意)가 있었다는 것을 모두 시인하여 왔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제1심과 같이 사형을 구형하였다. 이에 마츠모토 변호사는 “순사들을 살상한 것은 정당방위로 볼 수 있고, 타카야마와 사토 등을 사살한 것은 상해치사 또는 상해로 볼 수 있다.”고 하면서 정상참작과 박열(朴烈) 의사의 예를 들며, 무기 혹은 유기징역이 마땅하다고 변론하였다.


# 담담히 사형선고 받아들이고, 이슬처럼 순국한 30년 3개월의 짧은 생


복심법원의 선고공판이 11월 10일 오전 10시 50분에 경성복심법원 제3호 법정에서 열렸다. 법정에는 엄숙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침내 수에히로[末廣] 재판장으로부터 사형이 선고되었다. ‘사형’이라는 말을 들은 가족들과 일반 방청객들까지 눈물을 지었다. 하지만 정작 사형을 선고 받은 선생은 사형이라는 말을 듣고도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이 태연한 태도로 재판장에 대하여 고개를 한번 끄덕하고는 자리로 물러가 앉았다. 마치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이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宋學善義士 34周忌 추도식가족들은 다시금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선생보다는 가족들이 혹시 살릴 길이 없을까 하고 한 것이었다. 상고심은 1927년 2월 3일 오전 11시 고등법원 대법정에서 열렸다. 오가와[小川] 재판장은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상고를 기각하였다. 재판 결과가 예상되었기 때문에 선생은 출두하지 않고 서대문형무소 미결감 독방 안에서 쇠수갑을 차고 있었다.


이제 사형일자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1927년 5월 19일 오후 2시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경성복심법원 이하라[井原] 검사의 입회 하에 쥐도 새도 몰래 선생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형이 집행된 다음날 일제는 가족들에게 유해를 찾아가라는 통지를 보냈다. 비로소 가족들은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와 아우들이 선생의 시신을 수습하여 대현(大峴) 화장터에서 화장하였으며, 유골은 그 근방 산에 가매장하였다가 반년 후에 서대문 밖 봉원사에 안치하였다. 결국, 선생은 30세의 한창 나이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 거사와 독립의지는 6․10만세운동의 한 계기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사진-국가보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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