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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35] 한국기독교의 역사...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2-13 05:08:41
  • 수정 2024-04-10 10:2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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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1), 한국기독교역사실

한국기독교박물관 전경[이승준 기자] 한국기독교박물관은 숭실대학 출신의 장로교 목사이자 고고학자였던 故 김양선 교수의 일생에 걸친 열정과 그 가족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설립됐다. 한국기독교박물관은 원래 1948년 4월 20일 서울 남산 기슭에 설립돼 운영되던 중에 1950년 6.25전쟁으로 임시 휴관했다가 1953년 휴관과 동시에 다시 개관했다. 그 후 박물관 부지가 국회의사당 신축지로 결정돼 1958년 2월 폐관했다. 그 후 김양선 선생의 민족문화와 기독교문화 창달을 위한 숭고한 뜻에 의해, 1967년 10월 10일 숭실 개교 70주년을 맞아 숭실대학교 부속 박물관으로 새롭게 출발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보 제141호 '정문경',한국기독박물관은 국보 제141호 '정문경', 국보 231호 '청동기용범'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 보물 제883호 '지구의' 등 국보급 문화재를 포함한 약 1만 600여 점의 한민족 및 한국기독교 관계 자료와 유물을 소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고대중국과 로마시대의 유물을 다량 소장하고 있다. 고고.유물 외에 한국기독교박물관은 한국기독교, 국학, 만족운동 및 서학.실학관계의 귀중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어, 한국기독교의 역사와 민족문화의 정수를 살펴볼 수 있는 한국문학의 보고(寶庫)로서의 위상을 갖추고 있다. 


# 김양선과 한국기독교박물관의 역사


매산 김양선의 생애


김양선 교수상(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1층)한국기독교박물관의 설립자인 매산(梅山) 김양선(金良善)은 1907년 2월 평안북도 의주에서 김관근 목사와 백관성 권사의 3남으로 태어났다. 매산은 아버지가 세운 중원중학교를 거쳐 선천의 신성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 그리고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서 수학했다.


숭실 재학중 그는 비밀결사인 ‘청구회(靑丘會)’에 가입해 항일활동을 전개했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 당시 평양학생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뤘고,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하다 투옥되기도 했다.


긴양선 목사와 부인 한필려해방 이후 월남한 매산은 한국기독교박물관 설립운동을 추진했다. 그가 교회사나 고고학에 열정을 쏟기 시작한 것은 숭실전문학교 재학 때부터 였다. 이 때부터 많은 양의 자료와 유물을 수집.정리했다. 그는 외할아버지 백홍준이 1870년대 말 만주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고 한글성경번역 작업에 참여했다는 점과 그의 집안이 한국 초기 교회 설립에 직접 관련됐다는 데서 한국 교회사 정립에 뜻을 두게 됐다.


또 숭실전문학교 시절 양주동 교수와의 만남을 통해 그는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을 찾아 연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닫게 됐다.


한국기독교박물관의 탄생과 역사


1948년 4월 매산은 서울 남산의 옛 ‘조선선궁’ 자리에 한국기독교박물관을 설립했다. 이 때 남북을 오고가면서 북한에 남겨둔 자료와 유물을 남한으로 반출하다가 그는 부인과 딸을 잃었다. 한국기독교박물관은 매산의 목숨을 건 열정, 부인과 딸의 생명을 대가로 설립될 수 있었다.


영세명장박물관의 유물은 6.25 전쟁 중 해외로 옮겨졌다가 다시 국내로 돌아오기도 했다. 전쟁 이후 한국기독교박물관이 남산에 재건립됐었으나, 1967년 4월 매산은 박물관 유물 일체를 자신의 모교인 숭실대학교에 기증했다. 오늘의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은 이렇게 탄생했다. 목회자와 교육가로서 많은 교회와 학교 설립에 관여했던 매산은 1954년 숭실대학 교수 부임한 이래 1970년 타계할 때까지 한국사, 한국교회사, 고고학 등의 연구와 교육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기독교와 한국의 민족문화에 대한 매산의 열정으로 설립된 한국기독교박물관은 민족 문화의 우수성을 밝혀주는 수준 높은 고고학 자료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각종 기독교 자료, 실학을 비롯해 개화기의 근대화 문물, 민족운동사 자료를 소장.전시해 사회 교육에 이바지하고 있다.


# 한국 기독교 역사실


한국기독교역사실은 통일신라시대 한반도에 유입된 경교 관련 유물을 통해 한국기독교 역사의 시원(始原)을 추적해볼 수 있고, 천주교와 개신교의 주체적 수용과 발달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한국기독교는 외국선교사가 공식 입국하기 이전에 한국인들 스스로 신앙공동체를 형성했고 나아가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 출판해 읽었다는 특수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소장, 전시하고 있는 초기 기독교 유물은 한국기독교의 수용과 성장 및 발전과정을 알려주는 귀중한 역사자료가 되고 있다.


경교(景敎)의 한국전래



경교(景敎)는 7세기경 페르시아로부터 중국에 전해진 기독교의 일파로서 네스토리우스(Nestorius)파를 말한다.네스토리우스파는 431년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유럽에서는 교세를 잃었지만 동방으로 옮겨가 기독교를 전래하였습니다. 중국의 경교 역사는 선교사 알로펜(Alopen, 阿羅本)이 635년 당(唐)의 수도 장안(長安, 西安)에 들어오면서 부터 시작되며, 원대(元代)에는 ‘야리가온(也里可溫)’이란 이름으로 다시 유행하기도 했다.


경교돌십자가

경교가 중국사회에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은 토착종교나 불교와 습합되면서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경교가 유행하던 시기에 당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신라가 당에 수많은 사신과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 당시 빈번한 문화교류를 행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한반도에 경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주로 초기 기독교사가들에 의해 주장된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은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돌십자가, 동제십자무늬장식, 마리아상 등을 통해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볼 때 한국기독교의 역사는 통일신라시대까지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천주교의 성장과 발전



천주교는 명대(明代)에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등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중국사회에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당시 조선사회는 양란을 겪으며 사회변화에 대한 자각의 움직움 속에서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문물을 접하게 됐다. 특히 연행사절단에 의해 서구 과학지식과 문물 수용이 이루지면서 천주교가 조선사회에 전래됐다. 초기 천주교는 ‘신앙적 체계’보다는 ‘학문적 관심’, 즉 서학(西學)의 차원에서 조선사회에 수용됐다. 


하지만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 등 천주교 관련서적이 전해지면서 점차 종교로서 신봉되기 시작해 급속하게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천주교의 확산은 전통적 유교사회를 동요시켰고, 성리학(性理學)을 신봉하는 보수세력으로부터 갖은 박해를 당했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박해는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1839년 기해사옥(己亥邪獄),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를 거치면서 수많은 순교자를 낳았고 조선 천주교는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적 열정과 고귀한 희생은 오히려 천주교의 확산과 성장을 가져왔다. 초기 천주교회를 주도했던 양반층과 지식인층의 역할은 점차 중하층의 일반 교인들이 대신하게 됐고, 박해를 피해 산간벽지로 피신한 신자들을 중심으로 교우촌(敎友村)이 형성되면서 천주교 신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천주교리서의 유입


천주교리서의 유입 17세기 이후 조선사회에 중국을 통해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와 서양선교사들이 제작한 세계지도를 비롯한 서구과학문물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한역서학서가 유입되면서 천주교 교리를 담은 서적도 함께 들어왔다. 천주교서적의 유입은 주로 중국 수도인 북경을 방문하는 외교사절단인 ‘입연사행’(入燕使行)을 통해 이뤄졌다. 외교사절로 중국 북경에 갔던 조선 사신 일행 가운데는 북경의 천주당을 찾아보고 선교사들과 학문적·종교적 교류를 행하였다. 현실 비판적인 유학자들은 천주교 서적을 학문적 관심에서 주목하고 접근하였다. 이들을 통해 국내에 소개된 한역서학서 가운데 《천주실의》(天主實義)·《칠극》(七克)·《성세추요》(盛世芻璧)·《진도자증》(眞道自證) 등 천주교리서는 유교전통의 조선사회에 천주교 신앙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천주교신앙의 성숙 


정약종 초상 천주교신앙의 성숙 17세기 초 입연사행(入燕使行)을 통해 호기심 단계에서 유입되기 시작한 서학 서적은 18세기 중엽부터 이익·홍대용 등과 같은 실용적 학자들에 의해 학문적 연구대상이 되었다. 이 탐구 과정에서 서학의 사상적 근거로 등장한 서교, 즉 천주교까지도 수용하여 이를 실천하려는 학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권철신·권일신·정약용·정약종·이가환·이 벽·이승훈 등은 서학의 사상적 근거인 천주교 신앙을 직접 실천하고자 하였다. 주로 정치권의 소외된 기호(畿湖)지역의 남인계(南人系)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1777년 ‘서학교리연구회’를 조직하고 신앙실천에 나섰다. 권철신·정약용·이 벽을 비롯한 수명의 학자들이 천주교 교리를 연구할 목적으로 광주군과 여주군의 경계를 이루는 앵자산(鶯子山) 중턱에 위치했던 천진암(天眞庵)과 주어사(走魚寺)라는 사찰에 모여 서학과 천주교 관계 서적을 연구하였다. 이들은 아침 저녁기도, 주일(主日)의 노동금지, 금육재(禁肉齋) 등 천주교에서 요구하는 몇 가지 계율을 지켜나가기 시작하였다. 천주교서적에 대한 학문적 접근에서 연구되기 시작한 천주교 교리는 이들의 신앙적 고백이나 실천으로까지 연결되었다.


천주교의 시련과 박해 


천주교의 시련과 박해 성리학을 숭상하던 조선사회에서 외래 종교사조인 천주교는 사학(邪學)으로 간주되었다. 1886년 한불조약 체결로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1백여년 동안 천주교인들은 잦은 공격과 박해를 받았고, 수천 명의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천주교 문서출판 



천주교 문서출판 천주교회는 신앙교리서의 보급으로 점차 확대, 발전하여 갔다. 한글로 쓰여진 최초의 교리서인 정약종의 《주교요지》(主敎要旨)나 천주교 교리를 창조적으로 소화한 이벽의 《성교요지》(聖敎要旨)는 초기 교인들의 신앙의 요체를 잘 보여준다. 한편, 외국 신부들은 중국에서 전래된 교리서를 필사하여 보급하였고 이어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1859년 베르뇌(S.F.Berneux) 주교가 서울에 목판인쇄소를 차린 이후 《천주성교공과》(天主聖敎功課), 《신명초행》(神命初行), 《성찰기략》(省察記略) 등 각종 한글교리서가 간행되었다. 이처럼 교리서의 대량 인쇄, 보급으로 천주교 신앙은 점차 확산되어갔다.


#  자생적인 개신교 수용


한국에서 개신교는 1832년 입국한 독일 선교사 귀츨라프(K.F.A. Güzlaff)와 1866년 이땅에서 첫 순교자가 된 영국 선교사 토마스(R.J. Thomas)의 선교 시도에서 시작됐지만 본격적인 선교는 1884년 이후 입국한 선교사들에 의해 이뤄졌다. 초기 선교사들은 주로 교육과 의료사업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벌였는데 특히 성경과 찬송가의 발행은 한국민들이 주체적으로 복음을 수용하고 기독교의 본질을 파악케 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고, 선교사들에 의해 간행된 교리서와 전도서는 개신교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했다. 


한국 개신교의 수용과 성장은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요구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미 선교사들이 입국하기전에 성서가 들어오고 교회가 설립되는 등 자생적인 신앙의 바탕이 형성되고 있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만주지역에서 진취적인 서북청년들을 중심으로 한글성경이 간행되었고, 일본에서는 개화파 지식인에 의해 성서가 번역되어 국내에 들여와 외국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한국민들에게 읽혀지고 있었다.


개신교 선교의 시도 


개신교 선교의 시도 1870년대 말에서 1880년대 초 한국인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 이전에 한국에 대한 서구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 시도가 있었다. 귀츨라프(K.F.A. Güzlaff) 선교사와 토마스(R.J. Thomas) 목사가 대표적이다. 독일 출신의 귀츨라프는 해외선교 목적으로 1832년 7월 17일 황해도 장산곶 부근에 도착해 한문성경과 물건을 주면서 접근했으나, 정부당국과의 접촉은 실패했다. 



7월 23일경에는 충청도 홍주만 고대도(古代島) 앞에 정박해 국왕에게 바치는 통상청원문서와 선물을 보냈으나 거절당했다. 한편 런던선교회 소속 선교사 토마스는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년)으로 순교함으로써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가 됐다. 그는 순교 순간까지도 한문성서를 전하면서 복음전도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다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양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 이후 미국 각 교단의 선교사 파견이 이뤄졌다.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점차 서구열강과의 문호가 개방됨에 따라 개신교의 한국선교가 시작됐다. 1884년 9월 제물포항에 도착한 알렌(H.N.Allen, 安連)은 한국에 상주하는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되었다. 이듬해 4월 5일 부활절에는 미북장로회의 언더우드(H.G.Underwood, 元杜尤), 미감리회의 아펜젤러(H.G.Appenzeller, 亞扁薛羅)가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영국성공회에서 1889년 코르프(C.J.Corfe, 高要翰) 신부가 초대 한국주교로 도착했고, 호주장로회는 선교 준비차 1889년 9월 메리 데이비스(Mary Davies)를 파송한 데 이어 1891년부터 본격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했다. 



미국 남장로회가 1892년 한국선교를 시작했고 1895년에는 미국 남감리회가, 1898년에는 캐나다장로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이후 1907년에는 한국인 전도자에 의해 성결교의 모체인 동양선교회의 선교가 시작됐및 의료.교육사업에 매진하는 한편 선교를 위한 관련서적을 편찬했다.


한글성경 간행 한글 



한글성경 간행 한글 성경의 탄생은 세계 교회사에 있어 주목할만한 의미를 가진다. 외국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한글 성경이 간행됐던 것이다. 한국교회 최초의 한글 성경은 1882년 3월 24일 중국 심양에서 간행된 《예수셩교누가복음전서》이다. 스코틀랜드 연합교회 목사로 중국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일찍부터 한국 선교에 관심이 깊었던 로스(J.Ross, 羅約翰) 목사와 그의 매제되는 매킨타이어(J. Maclntyre, 馬勤秦) 목사, 그리고 의주 출신으로 상업활동에 종사하던 서상륜(徐相崙)·이응찬(李應贊)·백홍준(白鴻俊) 등 한국인 개종자들의 산물이었다. 



이들의 한글 성경 번역작업은 1887년 신약을 모두 완역한 《예수성교전서》로 일단락되었다. 한편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李樹廷)은 1884년 한문성경에 이두 토를 다는 방법으로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간행하였고, 1885년 국한문혼용체로 《마가복음》을 번역, 출판하였다.


전문도서 발간 



전문도서 발간 초기 선교사들은 의료·교육을 통한 선교사업에 주력하면서 동시에 문서선교에 관심을 기울였다. 1890년에는 언더우드·헤론·올링거 등이 주축이 되어 장로교·감리교가 연합한 문서사업기관으로 ‘조선성교서회’(The Korean Religious Tract Socity)를 설립해 체계적인 문서선교를 시작했다. 



조선성교서회는 기독교 서적과 전도지 및 정기간행물과 잡지류를 간행해 전국에 보급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설립된 이래 1890년 《성교촬리》를 시작으로 《훈아진언》(1891년), 《쟝원량우샹론》(1892년) 등 전도교리문서를 출판했다. 선교사들의 성서번역을 비롯한 초기 문서선교 사업은 기독교와 일반 문화발전에 지대한 공을 남겼다.


선교사의 성경 번역 



선교사의 성경 번역 초기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사업에 주력하는 한편 선교체제가 정착되어 가면서 점차 한글 성경 보급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1887년 서울지역 선교사들이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여 성경 번역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1890년에 《누가복음전》을, 1892년 《마태복음전》을 발간했다. 



그후 성서 번역사업은 급진전돼 1900년 마침내 《신약전서》를 출판했다. 번역위원으로 언더우드(H.G.Underwood), 아펜젤러(H.G.Appenzeller), 레이놀즈(W.D.Reynolds), 게일(J.S.Gale), 스크랜톤(W.B.Scranton), 최병헌(崔炳憲) 등이 활약했다. 이렇게 하여 광범위하게 보급된 한글 번역 성경은 기독교계의 한글 교육, 야학·계몽운동을 촉진했고 한글의 민중문자화에 공헌하였다.


복음찬송가의 발간 



복음찬송가의 발간 한국에서 발행한 찬송가의 효시는 1892년 미감리회 선교사가 편집한 《찬미가》이다. 이후 1894년 언더우드가 《찬양가》를 편집 발행했고 1895년 《찬성시》가 발행됐다. 1908년에는 장로·감리교 공동으로 사용한 《찬송가》를 발간해 초교파적으로 사용했다. 기타 교파의 찬송가로 대한기독교회가 《복음찬미》(1899년)를, 영국성공회가 《셩회숑가》(1903년)와 《천도찬사》(1904년)를 발간했다. 


한국개신교의 발전


19세기말 외국인 선교사 및 기독교 선각자들의 노력으로 한국교회의 성장 발판이 마련됐다. 20세기에 들어와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이 전개되고 교회조직이 정비됐고, 1910년대에는 각 교파별로 전국적인 조직이 확립되어 갔다. 3 1운동 이후에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강압적인 '무단통치'에서 유화적인 '문화정치' 로 바뀌면서 종교계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기독교계에서 특징적인 것은 기독교 신문과 잡지의 발간과 교육사업이었다. 기독교 관련 서적의 발간은 서구 신학(神學)을 국내에 소개하는 역할 뿐만 아니라 주체적인 기독교문화 창출에 기여했고, 비록 일본식 교육제도하에서 위축되긴 했지만 기독교계 학교를 중심으로 꾸준히 교세를 확장하고 근대교육의 실현에 힘썼다. 


이와 함께 문맹퇴치운동과 농사개량사업 등의 농촌운동, 금주·단연·아편금지 공창폐지운동 등의 사회운동은 기독교 신앙의 선교운동이자 문화운동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등 일제의 한국교회 탄압은 노골적으로 진행됐다. 이러한 일제의 정책에 순응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많은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일제의 식민정책과 충돌하면서 집단적 저항운동을 전개하여 많은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기독교 신문.잡지 발간 



기독교 신문·잡지 발간 기독교 신문·잡지는 전교활동의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1897년 2월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죠선크리스도인회보》(The Christian Advocate)를 창간했고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그리스도신문》(The Christian News)을 주간으로 창간했다. 1915년 양교파 연합으로 기독교 주간신문인 《기독신보》를 발행했다. 


한편, 기독교 기관 및 선교사가 발행한 각종 잡지가 발행되었는데, 그 효시는 1892년 미감리교 선교사 올링거(F. Ohlinger)가 발행한 《The Korean Repository》이며, 국문 잡지로는 1900년 12월의 《신학월보》가 효시다. 이후 1916년 2월 협성신학교에서 《신학세계》(神學世界)를, 계간으로 창간했고 1918년 1월에는 조선야소교서회(朝鮮耶蘇敎書會)에서 격월지로 《성경잡지》(聖經雜誌)를 간행했다. 이 외에도 《활천》(活泉, 1922, 성결교 기관지), 《농민생활》(1938, 장로회 총회), 《종교시보》(宗敎時報, 1932, 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 등이 각 교파별 목적에 따라 발행되었다.


신학교육의 발전 



신학교육의 발전 초기 한국기독교인의 주체적 복음 수용과 전파로 한국교회는 성장을 거듭했고, 이 성장을 밑거름으로 하여 신학교 설립과 신학교육이 실시됐다.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교육은 ‘한국인은 한국인이 전도하게 한다’는 네비어스(John L. Nevius) 선교정책에 따라 매서인(賣書人), 전도부인과 같은 전도인 양성에 목적을 두고 시작됐다. 초기 신학교육은 겨울 농한기를 이용해 한국인 전도인을 대상으로 1∼2개월간 실시하는 단기과정이었다. 1901년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문을 열면서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이 본격화됐고, 주일학교에서의 신학교육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만국주일공과》(1911년), 《주일학교공과의설명》(1912) 등 관련 교재들이 발간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주일학교에 대한 높은 관심이 반영돼 1921년 전국 주일학교 대회가 열렸고, 1922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조직돼 수많은 교재들이 발간됐다.


한국교회조직의 확립 


한국교회조직의 확립 1900년대에는 기독교의 순수한 신앙과 정신을 정착시켰던 기독교 대부흥운동으로 한국교회 조직이 정비되어갔다. 최대 교단이던 장로교는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최초의 독노회를 조직했고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조직했다. 한국장로회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창립된 지 25년만의 일이었다. 미감리회는 1908년 정동교회에서 완전한 감리교 조직으로 한국연회(The Korea Annual Conference)를 창립했고 남감리회는 1914년 한국선교연회를 조직했다. 이런 교회조직은 교회 지도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 설립으로 더욱 그 토대가 강화됐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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