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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20] 낙락장송으로 남은 지성인 '성삼문'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1-21 19:55:57
  • 수정 2024-04-10 10: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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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성삼문은 조선전기 홍문관수찬, 예조참의, 예방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신. 개성유후(開城留后) 성석용(成石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성달생(成達生)이고, 아버지는 도총관(都摠管) 성승(成勝)이다.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襜)의 딸이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는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했고, 1447년에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다시 급제했다.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승진했다.


1442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를 했고, 세종의 명에 따라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펴냈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이개(李塏) 등과 함께 이를 도왔다. 특히 신숙주와 같이 명나라 요동을 여러 번 왕래하면서, 그 곳에 유배 중인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만나 음운(音韻)을 질문했다.


또한,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 제도를 연구해와 1446년 9월 29일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1453년(단종 1) 좌사간으로 있을 때, 수양대군(首陽大君: 뒤의 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고는 성삼문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의 칭호를 내렸다. 이를 사양하는 소를 올렸다.


사육신공원 홍살문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가 됐다. 같은 해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 선위(禪位)를 강요할 때, 성삼문이 국새(國璽)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니 세조가 성삼문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이후 아버지 성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박중림(朴仲林).박팽년.유응부(兪應孚).허조(許慥).권자신(權自愼).이개.유성원(柳誠源) 등을 포섭,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했다.


성삼문은 거사일 전날에 집현전에서 비밀 회의를 열고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박쟁(朴崝) 등 무신들에게는 세조와 윤사로(尹師路).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를, 병조정랑 윤영손(尹鈴孫)에게는 신숙주를 각각 제거토록 분담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중신들은 여러 무사들이 나눠 제거키로 정했다. 그리고 김질(金礩)에게는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으로 하여금 상왕 복위를 주장하도록 설득하라 했으나, 당일 아침에 갑자기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의 시립이 폐지돼 거사는 일단 중지됐다. 이에 거사는 세조가 친히 거둥하는 관가(觀稼: 임금이 봄에 권농하기 위해 곡식의 씨를 뿌리는 것을 관람하던 행사) 때로 미뤄졌다.



거사에 차질이 생기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장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밀고해 모의자들이 모두 잡혀갔다. 성삼문은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進賜: 종친에 대한 호칭)’라 호칭하고 떳떳하게 모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세조가 준 녹(祿)은 창고에 쌓아두었으니 모두 가져가라고 했다.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으면서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또한 신숙주에게는 세종과 문종의 당부를 배신한 불충을 크게 꾸짖었다. 격노한 세조가 무사를 시켜 불에 달군 쇠로 다리를 태우고 팔을 잘라내게 했으나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 사건에 연루돼 문초를 받고 있던 강희안(姜希顔)을 변호해줘 죽음을 면했다. 


같은 달 8일 아버지 성승과 이개.하위지(河緯地).박중림.김문기(金文起).유응부.박쟁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했다. 그 때 동생 성삼빙(成三聘).성삼고(成三顧).성삼성(成三省)과 아들 성맹첨(成孟瞻).성맹년(成孟年).성맹종(成孟終) 및 갓난아이까지 모두 죽음을 당해 혈손이 끊겼다.



형을 당한 뒤 성삼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가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고며, 방바닥에 거적자리만 깔려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성삼문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절신(節臣: 절개를 지킨 신하)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일 뿐 아니라,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문명이 높았고, 조정의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도맡아 처리했다.


특히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한 것은 높은 절의에 뒤지지 않는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뒷날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에서 대의를 위해 흔연히 죽음의 길을 택한 성삼문의 높은 절의를 기록, 후세에 전했다.


성삼문 유허지 1691년(숙종 17)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고,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1791년(정조 15)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묘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 묘역에 있으나, 성삼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은진에 있다.


장릉(莊陵: 단종의 능)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됐고,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서울 노량진의 의절사(義節祠), 공주 동학사(東鶴寺)의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됐다. 송시열(宋時烈)이 쓴 '홍주성선생유허비(洪州成先生遺墟碑)'와 '연산성선생유허비(連山成先生遺墟碑)'가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고, 저서로 '매죽헌집(梅竹軒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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