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서울시 구석 구석 117] 단종 복위운동에 목숨 바친 6명의 무덤 '사육신묘'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1-18 21:54:11
  • 수정 2024-04-10 10:13:49

기사수정


충절의 상징인 사육신묘를 둘러보다./영상-문화재청 제공


[박광준 기자]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있는 조선전기 단종 복위운동에 목숨을 바친 6명의 무덤으로 시도유형문화재이다.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다. 원래는 박팽년(朴彭年).유응부(兪應孚).이개(李塏).성삼문(成三問)의 묘만 있었고, 하위지(河緯地)와 유성원(柳誠源)의 묘는 없었으나, 서울시에서 1977∼1978년까지 사육신 묘역의 정화 공사를 할 때, 하위지와 유성원의 가묘(假墓)를 추봉(追封), 사육신의 묘를 모두 갖추게 됐다. 


이 묘가 있는 곳은 지난날 사형이 집행되던 곳이라는 말이 전하기는 하나, 사육신 중 박팽년은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옥사했고, 유성원은 잡혀가기 전에 자기 집에서 자인(自刃 : 칼로 자결함)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군기감(軍器監) 앞길에서 거열(車裂)을 당했으므로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이들의 시체를 거둬 정중히 장사지내 줄만한 사람도 당시에는 없었다. 박팽년의 유복자만이 겨우 살아남아 대를 이었다고 한다. 나머지 사육신의 아들들은 모두 교형(絞刑)을 당했고, 남은 가족들도 노비가 됐다. 또, 먼 일가나 이웃들도 국가적인 기휘(忌諱)를 받은 이들을 장사지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므로 이곳에 육신묘가 처음 마련된 과정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 육신묘가 있는 곳에는 일찍부터 박씨지묘.유씨지묘.이씨지묘.성씨지묘라 새겨진 표석이 서 있는 4개의 묘가 있었고, 그 뒤편에 또 하나의 묘가 있었다. 일찍이 민간에서 이 묘소를 육신묘라 일컫고, 뒤편에 있는 묘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묘라고 전해왔다.


이렇게 민간에서만 인정되어 오던 육신묘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숙종 때부터였다. 1679년(숙종 5)에 왕이 노량에 열무(閱武 : 군사 검열을 관람)갔다가 유사(有司)에게 명해 육신묘를 봉식(封植 ; 흙을 북돋우고 나무를 심음)했다. 1691년에는 왕이 김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노량사장(露梁沙場)에서 열무를 하고 나서 관원을 보내 사육신묘에 치제(致祭)하게 했다. 곧 이어 사육신을 숭장(崇奬)했다.


한편, 1681년에는 사육신 묘역에 사육신의 사우(祠宇)로 민절서원(愍節書院)이 세워지고 1692년에 편액(扁額)이 하사됐다. 또, 이 때 박팽년의 7대 손인 좌익찬 숭고(崇古)가 육신묘를 수축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사육신묘가 공식화돼 사람들의 존숭을 받게 됐다.


그 뒤 1782년(정조 6)에 이르러 육신묘비인 신도비(神道碑)가 건립됐다. 신도비의 비명은 태학사 조관빈(趙觀彬)이 찬하고, 글씨는 당(唐)나라의 안진경(顔眞卿)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사육신 묘역에 사육신의 사우로 설치된 민절서원은 대원군에 의해 철폐되고, 지금 그 자리에는 1954년 서울시가 세운 6각(角)의 육신묘비가 있다. 비면 상단에는 김광섭(金光燮)이 짓고 김충현(金忠顯)이 쓴 비문이 새겨져 있고, 중.하단에는 손재형(孫在馨)이 쓴 육신의 이름과 그들이 지은 시가 각각 1면씩 새겨져 있다. 또,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의절사(義節祠)와 정문인 불이문(不二門)이 있는데, 모두 1978년 사육신 묘역의 정화 사업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


사육신(死六臣)은 조선 세조 2년(1456)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돼 처형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6명을 가리킨다. ‘병자사화(丙子士禍)’라고도 불리는 당시의 사건에서 이들 외에 권자신(權自愼).권저(權著).김문기(金文起).박중림(朴仲林).박기년(朴耆年).박대년(朴大年).박인년(朴引年).박쟁(朴崝).성승(成勝).성삼고(成三顧).송석동(宋石同).심신(沈愼).윤영손(尹令孫).이유기(李裕基).이의영(李義英).이호(李昊).이휘(李徽).조청로(趙淸老).최득지(崔得池).최사우(崔斯友).최치지(崔致池).허조(許慥).황선보(黃善寶) 등 70여 명이 모반 혐의로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등 화를 입었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은 단종에 대한 충심과 함께, 왕권 강화를 꾀한 세조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됐다. 이들은 대체로 세종 때에 설치된 집현전(集賢殿) 출신의 유학자들로 문종의 즉위 이후 대간(臺諫)으로 조정에 진출했고, 신권(臣權)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여론정치를 지향했다. 세조가 1455년 단종에게 양위(讓位)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오른 뒤 의정부서사제도(議政府署事制度)를 폐지하고 6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는 등 왕권의 전제화를 꾀하자 이들은 단종을 복위시키고 관료지배체제를 실현하려 했다.

 




이들은 1456년(세조 2) 6월 창덕궁에서 명나라의 사신을 맞는 자리에 성승.유응부.박쟁이 임금을 호위하는 별운검(別雲劍)으로 참여하게 된 것을 이용해 세조 일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으나 연회 장소가 좁아 별운검이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거사를 뒤로 미뤘으나, 성삼문을 통해 이들의 계획을 알게 된 김질(金礩)이 장인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세조에게 이 사실을 밀고하면서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계획을 주도한 성삼문.이개.하위지.박중림.김문기.성승.유응부.윤영손.권자신.박쟁.송석동.이휘 등은 1456년 7월 10일(음력 6월 8일)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조정의 신료(臣僚)들이 모두 입회한 상태에서 수레로 찢겨 죽임을 당하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했고,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집에서 아내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의 친자식들도 모두 목을 매어 죽이는 교형(絞刑)에 처해졌고, 집안의 여성들은 노비가 됐고, 가산도 모두 몰수됐다.


# 사육신의 유래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 당시 모반 혐의로 처형되거나 목숨을 끊은 사람은 70여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6명을 특별히 ‘사육신(死六臣)’이라고 기리게 된 것은 이른바 ‘생육신(生六臣)’ 가운데 한 명으로 여겨지는 남효온(南孝溫)이 '추강집(秋江集)'에 수록된 ‘육신전(六臣傳)’에서 이들 여섯의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긴 데에서 비롯됐다. 이후 사육신은 충절(忠節)을 상징하는 인물로 숭배됐고, 사대부들은 그들의 신원을 조정에 요구했다. 그 결과 성종 때에는 그들의 후손도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금고(禁錮)된 것을 풀어 줬고, 숙종 때인 1691년에는 사육신 6명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지어 이들의 위패를 안치했다. 



영조 때에는 김문기.박중림 등의 관작도 회복됐다. 정조 때인 1791년에는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울 때 세종의 아들로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해 탄압을 받은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의 충절도 사육신 못지않으므로 함께 모셔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화의군 말고도 사육신에 못지않은 사람들을 모두 함께 배향(配享)키로 해 규장각과 홍문관에 명해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작성했다. 


이때 육종영(六宗英)이라 해 안평대군(安平大君)부터 금성대군(錦城大君).화의군.한남군(漢南君).영풍군(永豊君).이양(李穰)까지 왕실의 종친 여섯 명을, 사의척(四懿戚)이라 해 송현수(宋玄壽)부터 권자신(權自愼).정종(鄭悰).권완(權完)까지 왕실의 인척 네 명을, 그리고 김종서.황보인.정분(鄭苯) 세 재상을 삼상신(三相臣), 민신(閔伸).김문기(金文起).조극관(趙克寬)을 삼중신(三重臣), 성승(成勝).박쟁(朴崝)을 양운검(兩雲劒)으로 했다. 이외에 사육신과 그들의 가족, 허후(許詡).허조(許慥).박계우(朴季愚).이보흠(李甫欽).정효전(鄭孝全) 등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 운동의 과정에서 희생된 인물들의 위패를 함께 안치해 제사를 지내게 했다.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한 성승.박팽년.유응부.성삼문.이개 등은 처형된 뒤에 한강 기슭 노량진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정조 때인 1782년 이곳에는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는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그리고 1955년에는 신도비와 마주보는 위치에 육각의 사육신비가 세워졌다. 1978년에는 묘역을 크게 넓히고 의절사(義節祠).불이문(不二門).홍살문.비각(碑閣) 등을 새로 지어 단장했다. 임진왜란 이후 성승의 묘가 훼손돼 전해지지 않아 원래 이곳에는 박팽년.유응부.성삼문.이개의 묘만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하위지.유성원의 가묘(假墓)가 새롭게 조성됐다.


한편, 1977년 김문기의 후손인 김녕(金寧) 김씨(金氏) 문중을 중심으로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사육신에 포함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들은 '조선왕조실록'의 세조 2년 6월 6일조의 기사에서 성삼문.이개.유성원.박팽년.하위지.김문기 등 여섯 명에 중점을 둬 거론하고 있는 것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를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자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는 김문기의 공적도 현창(顯彰, 밝혀 나타냄)키 위해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의 가묘도 함께 조성토록 결정했다. 그러나 사육신의 구성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자 1982년 국사편찬위원회는 김문기의 공적을 널리 알리되 종전의 사육신 구성에는 변경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는 김문기를 포함해 모두 일곱 명의 무덤과 위패가 모셔져 있고, 사육신의 구성을 둘러싼 논란도 되풀이되어 나타나고 있다. (동작구 둘러보기의 주소는 구 주소로 착오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사진-박광준 기자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