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서울시 구석 구석 113] 서울양화나루와잠두봉유적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0-18 23:35:49
  • 수정 2024-04-10 10:10:36

기사수정


[박광준 기자]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있는 조선후기 천주교 관련 성지(聖地)로 1997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양화나루는 당산철교 북단 인근에 위치해 있었고 안양천과 한강이 합류하는 남단은 양화나루의 대안으로 이용됐다. 마포의 양화나루는 고려 때부터 한강의 중요 도선장으로 이용됐고, 조선 초기에는 양천, 강화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으로 도승(渡丞 : 조선시대 나루터를 관리하던 종9품 벼슬)이 파견돼 나루를 관리했다. 


절두산순교자기념탑(이춘만 작, 2000년)/절두산에서 치명하신 유명, 무명의 순교자들을 기리며, 기념비를 조각하고 세웠다. 절두산에서의 순교자 중 13위가 현재 '이벽 요한의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돼 시복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가 점점 그 중요성이 인정되면서 1710년(숙종 36)에 어영청 소속의 별장(別將)이 파견됐다. 1754년(영조 30)에는 한강 수로와 한성 방어의 요충지로 지정돼 어영청 관할의 양화진(楊花鎭)이 설치되면서 군사 100명이 주둔하게 됐다. 당시 양화진에는 배 10척이 배정됐고, 그 하류의 공암진(孔岩津)과 철곶진(鐵串津)도 이곳 관할이었다.



양화나루 위쪽의 잠두봉은 봉우리 모양이 마치 누에가 머리를 들고 있는 것 같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됐고, 용두봉(龍頭峰) 또는 들머리[가을두(加乙頭)]라고도 불리었다. 이곳은 한강 연안 중에서도 양화나루 아래에 있던 망원정(望遠亭)과 함께 빼어난 절경으로 유명했다. 특히 ‘양화 나루에서 밟는 겨울 눈’에 대한 시는 한도십영(漢都十詠)의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많은 문인과 명사들이 애상했다.


승리의 팔마를 순교자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최봉자 수녀작, 2001년)/그리스도교에서 '팔마'는 죽음을 넘어 이룬 승리를 상징한다. 작가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가르침을 따라 살았던 순교자들에게 당신이 거둔 승리의 영광을 주는 장면을 그려내고자 했다. 그러나 1866년(고종 3)에 제1차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면서 양화나루와 잠두봉의 역사는 일변하게 됐다. 같은 해 로즈(Roze)가 이끄는 프랑스 극동 함대가 조선 원정을 시도한 끝에 8월 18일(양력 9월 26일) 양화진을 거쳐 서강(西江)까지 올라왔다 중국으로 돌아갔고 9월에 다시 강화를 침략한 사건이 일어났다. 


절두산 순교 기념탑 십자가(1962년)/순교자현양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진 이 탑은, 낙뢰로 훼손됐으나 탑의 일부인 십자가는 남아서 보존되고 있다.  그러자 조선 정부는 이 일련의 사건이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에 의한 것으로 이해했고 프랑스 함대가 거쳐간 양화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했다. 이는 프랑스 함대의 침략에 대한 천주교 신자들의 책임을 묻고 백성들이 프랑스 함대와 내통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었다. 이후 잠두봉은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칼날을 받은 곳이라는 뜻에서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게 됐다.


성녀 마더 데레사상(임송자 작, 2018년)/가난한 이들의 벗, 마더 데레사 수녀의 절두산 순례(1985년 1월 29일)와 시성(2016)을 기념해 세웠다. 천주교회에서는 순교지인 이곳을 1956년에 매입했고, 1962년에는 순교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병인 순교 100주년(1966년)을 기념해 1967년에 성당과 순교기념관을 건립하고 가톨릭 성지(절두산 순교 성지)로 조성했고, 1968년 이래로 한국 성인들의 유해를 옮겨와 안치했다./다음호에 계속, 사진-박광준 기자


세상에 빛으로 오심(안경문 작, 2011년)/성경 속 잃어버린 탕자의 비유와 같이, 잃었던 아들이 되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기브게 맞이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표현했다.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최종태 작, 1973년) 병인박해(1866) 당시 절두산에서 순교한 첫번째 가족인 이의송(프란치스코), 김이쁜(마리아), 이붕익(베드로)을 형상화했다. 

루르드 성모상(초 봉헌)/ 프랑스 루르드에 있는 마사비엘의 동굴에서 발현(1858)하신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본따 조성됐다. 1978년 9월 26일 복자 축일 미사가 끝난 뒤에 교황대사 루치아노 안젤로니 대주교에 의해 축성, 봉헌됐다.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 건립 당시 십자가

오성바위/병인박해 때 순교한 다블뤼(안토니오) 주교, 오메트르(베드로) 신부, 위앵(루카) 신부, 황석두(루카), 장주기(요셉) 다섯 성인이 체포돼 서울로 압송될 때와 가시 서울에서 보령 갈매못 형장으로 끌려갈 때 쉬었다 간 바위라고 전해진다.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전뢰진 작. 1972년)/정부 주도로 출범(1966)한 애국선열조상건립의원회가 민족의 귀감이 되는 인물 15인을 선정하고, 동상 건립을 추진해 세워졌다. 조국 근대화의 선구자로서 공로를 인정받은 김대건 신부는 종교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동상 거립 대상 인물로 선정됐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