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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둘러보기1] 실용적인 구조로 돼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 '수원화성(1)'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0-10 21:04:13
  • 수정 2023-12-21 14:3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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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축성공사의 전말을 소상히 기록한 보고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박광준 기자]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됐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됐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됐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고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키 위한 것이었다.


1900년대 초에 찍은 수원 팔달문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해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했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해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면서 쌓는데 이용했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했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됐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해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화서문과 서북공신돈 사진엽서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10, 은구 2 총 49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시설물 일부가 소멸됐다.(현재 소멸된 시설물 :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돼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돼 있다.


화성은 정약용의 실학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그가 발명한 거중기는 화성 축조에 사용됐다./출처: jjw at ko.wikipedia.org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구조로 돼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다.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 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 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해 축성했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수원화성 성곽정조는 성곽이 완성되자 화성 축성공사의 전말을 소상히 기록한 보고서를 작성케 했다. 그렇게 작성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의하면 축성 역사에 동원된 공장(工匠)은 1,280명, 연 동원 일수는 37만 6,342일, 축성에 사용된 벽돌은 모두 69만 5,000장이었다. 당시 동원된 공장들에게 생활보장이 넉넉히 될 만큼의 임금이 지불된 사실도 여기서 밝혀지고 있다. 


‘화성성역의궤’에서 계획, 도제, 의식, 동원된 인력과 경비, 사용된 기계 등 축성의 전말과 당시의 모든 상황을 소상히 알 수 있다. 따라서 ‘화성성역의궤’는 경제를 비롯한 당시의 사회형편을 연구하고 성역을 보수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이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많이 파손된 성곽을 복원할 수 있었던 것도 ‘화성성역의궤’를 참고했기에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팔달문에서 동남각루 사이의 일부와 행궁이 복원되지 못했으나 수원화성은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다.


서장대로 올라가는 수원화성수원화성 축성은 정조의 효성에서 비롯된 결단이긴 했지만, 기실 정조는 개혁정치의 이상을 새로운 도시 수원에서 펼치고 실현하면서 마무리짓고자 했었는지 모른다. 오랫동안 정치권력을 장악했던 노론 벽파의 세력을 탕평책과 규장각 설치만으로는 약화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조는 수원화성이 완성된 이듬해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이땅에 다시는 정조와 같은 현명한 왕이 출현하지 않았고, 조선은 다시 혼미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수원화성 역시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오랫동안 방치됐으나 그 아름다운 자태만은 변함이 없다. 수원화성은 사적이다. 여러 기록에는 성벽의 전체 둘레가 8.36㎞에 이른다고 돼 있으나, 실제 둘러보며 만난 수원화성의 안내판에는 5.52㎞라 돼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화서문(보물), 장안문, 서북공심돈(보물), 방화수류정(보물)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수원화성에서 바라본 수원시 전경성문(城門)은 성곽 내외를 연결하는 중요한 관문이다. 전시에는 적의 첫째 목표가 되지만, 평시에는 성곽의 외관을 돋보이게 하는 아름다운 의장 기능을 한다. 수원화성은 북쪽에 장안문(長安門), 남쪽에 팔달문(八達門), 동쪽에 창룡문(蒼龍門), 서쪽에 화서문(華西門)이 있다. 


그 중 수원화성을 대표하는 성문이 장안문과 팔달문이다. 규모도 크거니와 홍예 위의 누(樓)가 2층의 높직한 팔작지붕으로 돼 있어 화려하고 장중하다. 창룡문과 화서문은 아담한 단층이다. 네 곳의 성문은 모두 안팎으로 아치형의 홍예문을 이룬다. 홍예에는 두 짝의 나무문에 철엽(鐵葉)을 대고 커다란 빗장을 질렀다. 홍예 위에는 불이 나거나 적이 불을 질렀을 때 얼른 끌 수 있도록 물을 준비해 두는 물탱크가 있다. 구멍이 5개 뚫렸다 해서 오성지라 한다. 2층에는 멀리 적의 동태를 조망할 수 있는 누각이 설치돼 있다. 


성문 밖으로는 본 성문에서 약 7보쯤 떨어진 곳에 좌우로 반원형의 자그마한 옹성을 쌓고, 다시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된 적대(敵臺)가 있어 웅장한 분위기를 더한다. 옹성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모습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적대와 함께 성문을 향해 다가오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한 장소이다. 수원화성의 옹성은 서울의 동대문 다음으로 시도됐고, 장안문은 옹성을 제외한다면 서울의 남대문과 흡사하다. 수원 성문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장엄한 것이 장안문과 팔달문이다. 그 중에서도 장안문은 수원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 장안문


장안문장안문은 수원화성의 북문이면서 정문에 해당하고, 수원의 관문이면서 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한 수원시의 상징이다. 팔달문과 함께 수원화성의 대표적인 건물로 꼽히는 화려하고 장엄한 건축물이다. 홍예문의 높이는 3.8m,너비 3.6m,두께 7.9m이다. 2층으로 된 누각은 위풍이 당당하다. 문루는 정면 10칸 측면 5칸으로 매우 크고 우람한 편이다.


장안문 측면

장안문을 이중으로 감싸고 있는 외성은 북옹성으로, 축성 당시에는 문루가 없었으나 나중에 세웠다. 옹성은 벽돌로 쌓았고, 높이는 6.6m,둘레는 67.5m이며, 좌우에 적대를 뒀다. 장안동에 있다. 


수원화성의 네 문은 모두 시내 중심지의 통과지점에 있어 완전히 열린 상태이지만 그 밖에 끊긴 성곽은 없다.


# 팔달문



팔달문은 수원화성의 남문이다. 이어지던 성벽이 끊긴 채 큰길 네거리에 서울 남대문처럼 고립돼 서 있다. 본래 성벽이 이어지고 좌우에 적대가 있었으나 팔달문은 워낙 시가지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어 복원하지 않았다.


석축의 홍예 위에 2층으로 지붕을 올렸고, 처마가 한데 모아지는 듯한 형식의 우진각지붕의 문루가 있다. 문루 주변으론 여장(女墻)을 둘러쌓았고 전면에는 반원형의 옹성을 마련했다. 원래 적대가 있었으나 복원하지 않았다.



팔달문은 특히 서울의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같다. 문루의 네 귀에 높은 기둥이 없는 것이 다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문의 홍예는 높이가 3.17m,너비 3.56m이다. 장안문과 함께 수원시의 상징으로 꼽히는 웅장한 건축물이다. 해마다 10월이면 화홍문화제가 열린다. 장안동에 있고, 보물이다.


팔달문 2층 누각에는 육중한 동종이 있다. 본래 조선 숙종 13년(1687) 화성 만의사(萬義寺)에서 조성해 봉안했던 종인데 언제 어떤 경로로 이곳에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전통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는 이 종은 전체적인 비례와 구조가 조화로워 안정감이 있다. 용의 꼬리가 휘감고 있는 음통과 종뉴, 종신의 상단은 활짝 핀 꽃으로 장식했고, 중대로 내려오면서 풀무늬의 유곽과 연꽃을 쥐고 있는 4구의 보살상을 배치하고 명문을 새겼다. 하대는 연화당초문을 둘렀다. 전체적으로 이와 같은 범종양식은 17세기 후반에 유행하던 것인데, 팔달문 범종이 그 모양새를 잘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이다.


# 창룡문



동 1포루를 지나 성벽을 따라가면 수원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이 서 있다. 장안동에 있고 사적이다. 한국전쟁 때 문루와 홍예가 크게 손상을 입었는데 1975년 옛모습대로 복원했다. 창룡문은 안팎의 홍예 규모가 서로 다른 것이 특이하다. 내홍예의 높이는 4.8m인데, 외홍예의 높이는 4.5m이다. 너비도 그만큼 차이가 난다. 문루는 내외 3포에 2익공의 단층 건물이고, 정면 4.9m에 협문이 있다. 창룡문의 외성으로 동옹성이 있는데, 한쪽이 열려 있는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동옹성의 높이는 2.9m,둘레는 17.2m이고, 총안 14개가 나 있다.


창룡문의 왼쪽으론 서울과 오산간의 산업도로로 이어지는 큰길이 나 있고, 그 길을 건너면 연무대와 탁 트인 푸른 잔디밭의 활터가 보인다.


# 화서문


사진/박광준 기자화서문은 수원화성의 서문으로, 장안동에 있고, 보물이다. 옹성을 비롯한 화서문의 모든 시설과 규모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와 형식이다. 홍예문 위에 단층의 누각이 있고, 바깥쪽으로 평여장을 쌓았고, 소재는 벽돌이다. 문 안쪽으로 수문청이 있고, 바깥으론 벽돌로 쌓은 반원형의 옹성이 있으며 총혈 19개, 사혈 9개가 뚫려 있다.


공심돈은 수원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원거리 초소이다. 성벽보다 높은 2층으로 된 망루여서 특이하다. 둥그스름한 원통형에 촘촘히 벽돌로 쌓고 누각을 세웠다. 내부는 3층 구조에 나선형으로 돼 있다. 층마다 총안과 포혈이 바깥을 향해 뚫려 있다. 목조 누각인 위층에도 총안이 뚫려 있어 먼 거리에서부터 가까운 거리까지 한꺼번에 적을 감시하고 방어할 수 있다. 공심돈은 생김새를 본떠 일명 소라각이라 부르기도 했다./다음호에 계속(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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