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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75] 강항(姜沆)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 영광 '내산서원(靈光內山書院)'
  • 이승준
  • 등록 2022-09-15 01:37:25
  • 수정 2022-09-15 01:3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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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내산서원은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에 있는 조선후기 강항과 관련된 서원이다. 1977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창건 당시에는 용계사(龍溪祠)라는 이름으로 수은(睡隱) 강항(姜沆) 사후 18년째 되는 해인 1635년에 강항의 도덕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관찰사와 향리의 협의하에 사우(祠宇) 건립의 단초를 마련했다.



최초의 건립지는 강항의 태생지이자 선영이 있던 불갑면(佛甲面) 금계리(金鷄里) 서봉(酉峯)마을이었으나 그 당시의 사우 명칭이나 규모 등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더 이상 상세히 확인할 수 없다.


강항의 유적을 충심으로 보살폈던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 1596∼1668)를 추가로 배향(配享)했고, 훼철(毁撤) 후 복원 시에 내산서원(內山書院)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윤순거는 강항의 수제자였고 향토들의 추앙을 받았는데, 특히 용계사 창건이나 강항의 저서인 '수은집 睡隱集' 편찬 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1684년(숙종 10)에 윤선거의 아버지이자 강항과 함께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업했던 팔송(八松) 윤황(尹煌)을 추배(追配)했다. 


창건 이듬해인 1636년에는 화재로 인해 사우의 이건이 추진됐다. 이때에는 김지수(金地粹), 임담(林潭), 김방급(金方伋) 등의 주도하에 많은 사림들이 참여해 불갑면 순룡리(順龍里) 용산(龍山, 龍溪)마을에 사우를 복설.이건했다. 이때 사우의 명칭도 마을의 이름을 따라 용계사라 했는데, 액판(額板)의 휘호(揮毫)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지었다고 전한다(이 편액은 훼철 후 후손들에 의해 家傳되다가 6.25전쟁 때 소실됨).



1702년에 대대적인 중수를 했던 용계사는 1868년에 다른 서원들과 마찬가지로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철폐돼 그 터만 유지해 오다가, 1974년 후손과 유림들의 발의로 현 소재지에 복원하고 내산서원이라 개칭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서원내의 건물로는 경내(境內) 전면에 사우(용계사), 강당(내산서원), 내.외삼문(內.外三門)과 서원 좌측으로 경장각(敬藏閣)이 있고, 좌측 산기슭에는 묘소가 있다. 1977년 10월 20일 기념물로 지정됐다. 원내에 경장각(敬藏閣), 함평이씨열녀각(咸平李氏烈女閣), 장절비(奬節碑), 용계사사적(龍溪祠事蹟)이 있다.



내산서원의 홍살문 옆에는 수은 강항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앉아계시는 의자 옆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책들이 선생이 훌륭한 문신이었던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강항은 공조좌랑과 형조좌랑에 있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활동하다가 왜적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됐다. 일본에 있으면서 그 나라의 역사, 지리 등을 알아내어 고국으로 보내기도 하면서 일본에는 성리학을 전했다. 선조 33년(1600년) 귀국한 후 벼슬을 사양하고 독서와 후진 양성에만 전념했다.



내산서원은 인조 13년(1635년)에 나라에서 '용계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고 숙종 28년(1702)에 고쳐 세웠다.


일제시대 때에도 고쳐 지었다.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쪽에 교육 공간을 마련했고 뒤쪽에 제사 공간을 마련한 전학후묘의 배치이다. 교육 공간인 강당은 중앙에 마루를 두고 양 옆으로 온돌방을 배치했다. 뒤에 있는 내삼문을 지나면 강항의 위패를 모신 작은 규모의 사당이 있다. 왼쪽 산기슭에는 강항의 묘소가 있다.




내산서원 바로 앞 조금 낮은 지대에 연못을 파고 그 옆에 '승은정(勝隱亭)'이란 사각 정자를 세웠다. 충의문을 지나면 넓은 마당이 나오고 내산서원(內山書院)이 서 있다. 앞쪽에 교육 공간을 마련했고 뒤쪽에 제사 공간을 마련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라고 한다. 


한편, 영광 내산서원 '강감회요'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정유재란 때의 의병장인 수은 강항(姜沆,1567∼1618)이 중국의 역사서인 '자치통감'과 '통감강목'을 보완, 정리한 것이다. 숙종 28년(1702)에 새긴 것으로, 목판은 총 642매.



강항은 1593년 문과에 급제해 교서관정자, 공조와 형조의 좌랑 등을 지냈다. 정유재란 때 왜적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그곳에서 후지와라, 아카마쓰 등과 친분을 나누면서 그들에게 학문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후 그들의 도움으로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귀국했고, 여러 벼슬에 임명됐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죽은 후 이조판서에 추증됐고, 내산서원에 모셔졌다.


연대가 오래 되고 인쇄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1권 뿐으로, 그 가치가 크다. 현재 전남 영광군 소재 내산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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