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궁궐이야기 17] 경복궁의 태원전 일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12-06 00:08:14
  • 수정 2024-04-15 17:14:30

기사수정
  •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 '경복궁'(3)

태원전[이승준 기자] 빈전이다. 빈전은 왕과 왕비, 대비가 죽은 후 발인할 때까지 관을 모시던 곳이다. 빈전은 국상 때 잠깐 사용하는 용도였기에 건물을 따로 짓지 않고, 편전이나 침전의 일부 건물을 활용했다. 그러다 1860년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아예 빈전 전용 건물을 따로 지은 것이다. 이것이 태원전이다.


그렇다고 빈전으로만 쓰인 것은 아니다. 1872년 4월 7일 자 '고종실록'의 기사를 보면, 영희전에 있던 태조와 원종의 어진을 베껴그리기 위해 옮겨온 어진을 모시는 임시 봉안소로도 기능했다고 한다.


1890년(고종 27년) 익종(효명세자)의 비 신정왕후 조씨의 국상 때와 1895년(고종 32년) 명성황후의 국상 때 빈전으로 기능했다.


숙정문‘태원(泰元)’ 뜻은 ‘하늘’이다. '한서' - '예악지'에는, ‘오직 태원이 존귀하고 토지신은 변방을 다스리니, 하늘을 씨줄로 하고 땅을 날줄로 하며, 사계절을 이루었다’는 구절이 있다. 당나라의 학자인 안사고가 여기에 ‘태원(泰元)은 하늘(天)’이란 주석을 달았다.


존귀한 분의 시신을 모시는 빈전이므로, 하늘이란 존칭을 건물의 이름으로 붙인 듯 하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없었다. 1860년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처음 지었다. 일제가 허물고 그 자리에 일제 관료들의 관사를 지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대한민국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제30경비단이 주둔하면서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었다.


경안문1996년 12월에 30경비단이 떠난 후 다음해 10월부터 복원을 위한 발굴 조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망가진 유구때문에 위치 확인이 불가능할 뻔했다. 그러나 다행히 부속건물 영사재 터와 행각 터가 온전히 남아있어서 위치 파악이 가능했다. 이후 2001년부터 공사에 착수해  2005년 말에 복원 공사를 끝냈고, 2009년 1월 말부터 일반에 공개해 오늘에 이른다.


태원전 권역은 태원전을 중심으로 좌, 우, 남쪽에 부속건물과 행랑이 있는 형태로, 제일 남쪽에 출입문 건숙문이 있고 건숙문 안에 경안문이 있고 경안문을 지나야 태원전이 보인다. 건숙문의 동북쪽, 경안문의 동남쪽에 공묵재란 건물이 태원전의 남행각과 붙어있다.


태원전 건물 동북쪽에는 영사재가 있다. 영사재는 태원전과 붙어있고 동남쪽으로 동행각과 통한 형태이다. 태원전의 서북쪽에는 숙문당이 있고 태원전의 서행각과 동행각 밖에는 빨래를 하던 세답방이 있다.


태원전 현판 왕과 왕비가 죽으면 반전에 관을 모시고, 교외에 마련된 산릉에 시신과 관을 묻은 후에는 혼전(魂殿)에 신주를 모셔 정해진 장례기간을 치룬 후에 종묘로 신위를 옮겨 모시게 된다. 



영사제태원전은 경복궁의 빈전으로, 문경전은 혼전으로 건립됐다. 주변에 공목재, 영사재 등 상례용  건물들도 들어서 일곽을 이루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철거를 겪고 한때 청와대 경호부대가 주둔하는 등 변화를 겪었다. 2006년 이 일원의 공사가 마무리돼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공목재

동북 세답방

숙문당 

우물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