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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15] 경복궁의 광화문과 건춘문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12-05 21:26:09
  • 수정 2024-04-15 17: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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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 '경복궁'(1)

자료/문화재청 제공 

[이승준 기자]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북으로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져, 왕도인 한양(서울) 도시 계획의 중심이기도 하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했고, 1592년 임진 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 됐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중건된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 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 시설, 왕족들의 생활 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이 조성됐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궐안에 다시 여러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모인 곳이기도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해 근정전 등 극히 일부 중심 건물만 남았고,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버렸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사업이 추진돼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했고, 왕과 왕비의 침전, 동궁, 건청궁, 태원전 일원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광화문 - 흥례문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 교태전을 잇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이고,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 됐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돼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췄다. 특히 수도 서울의 중심이고 조선의 으뜸 궁궐인 경복궁에서 격조 높고 품위 있는 왕실 문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편집자 주>



궁성은 궁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담장을 이른다. 경복궁의 궁성은 1398년(태조7)에 동쪽, 남쪽, 서쪽이 조성됐고, 이때 궁성문인 건춘, 광화, 영추문도 세워졌다. 이 보다 뒤에 북쪽 담장이 완성되고 북문인 신무문도 갖췄다. 궁성은 거의 네모난 형태를 이루고 있고 전면 좌우 끝에는 각루(角樓)인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이 있다.


경복궁의 궁성은 임진왜란으로 궁궐 건물이 모두 소실됐을 때에도 일반 백성들로부터 궁궐터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고종 년간 경복궁 중건 시 궁성이 새 단장을 하게 됐지만 일제강점기에 앞부분이 헐려 나가고 또 한국전쟁 때 파손됐다. 현재의 궁성은 그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쌓은 것이고, 일부는 본래 위치보다 안으로 들여 쌓은 상태이다.


# 광화문(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광화문은 조선의 법궁에 해당하는 궁궐의 정문으로서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구조의 누각을 세워서 마치 성곽의 성문과 같은 격식으로 장대하게 지어졌다.


광화문은 중층으로 된 문루를 받치는 기단석축이 세 개의 홍예문으로 이뤄져 있고, 중앙의 홍예문으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문으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했다. 또한 문루(門樓)에는 종을 걸어 두어 시각을 알리는데 사용했다.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모두 소실됐다. 그 후 1968년에 경복궁 정문의 위치로 다시 옮겼으나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위치 또한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현재의 광화문은 2010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또한, 광화문 홍예 개판에는 ‘사령(四靈)’ 인 기린, 봉황, 거북이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1968년 광화문 복원시 그려진 것을 현황 모사한 것이다.


# 건춘문






건춘문은 궁성의 동쪽 문으로 만물의 기운이 움트는 ‘봄이 시작 된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건춘문은 주로 세자와 동궁 영역에 위치한 각사에서 일하는 신하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현재의 문은 고종 2년(1865) 경복궁 중건 당시 건립됐다. 


건춘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건물. 경복궁 중건 당시인 1865년(고종 2)에 세웠다.


홍예문()을 낸 석축() 기단 위에 단층으로 세운 이익공식() 우진각 지붕의 건물이다. 




내부를 살펴보면, 가운데칸 천장은 가구()를 노출시킨 연등천장이고, 가장자리 쪽 들보 위는 우진각 지붕을 짤 때 생긴 복잡한 이음매를 감추기 위해 소란()반자로 마감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마루는 모두 양성(: 지붕마루 수직면에 회반죽을 바름)을 한 뒤 취두(: 매머리 모양의 장식)·용두()·잡상() 등을 늘어놓았고, 추녀 끝에는 토수(: · 모양의 장식)를 끼웠다. 축대 위 건물 둘레에는 여장(: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둘러 보호하고 있다.


홍예문의 천장에는 널판을 대고 그 위에 용을 그려서 궁성의 출입문임을 상징하고 있다. 일본인들에 의해 조선총독부청사가 세워진 뒤로는 광화문을 대신해 경복궁의 정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원래는 문반()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이었다./사진-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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