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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7] 자연과 조화 이룬 가장 한국적인 궁궐(1)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10-17 20:12:58
  • 수정 2024-04-15 17: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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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세자가 거주했던 동궁 창덕궁 '성정각' 일원

동궐도

[이승준 기자] 성정각은 세자의 교육장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내의원으로 쓰기도 했다. 성정각은 단층이지만 동쪽에 직각으로 꺾인 2층의 누((樓)가 붙어 있어 독특한 모습이다. 누각에는 희우루(喜雨樓), 보춘정(報春亭)이라는 편액들이 걸려 있다. 성정각 뒤편에 있는 관물헌(觀物軒)은 왕이 자주 머물면서 독서와 접전을 했던 곳으로, 현재는 ‘집희(緝熙)’라는 현판이 남아 있다. 


희우루성정각 뒤편에 있는 관물헌.음 왕이 자주 머물면서 독서와 접견을 했던 곳으로, 현잰ㄴ '집회'라는 현판이 남아 있다. 현재 성정각과 낙선재 사이, 후원으로 넘어가는 넓은 길은, 원래 높은 월대 위에 당당하게 자리한 중희당(重熙堂)이 있었던 곳으로, 이 일대가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東宮)이었다. 






동궁일대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중희당은 1891년(고종 28)에 없어졌고, 중희당과 연결된 칠분서(七分序), 6각 누각인 삼삼와(三三窩)와 승화루(承華樓)등이 남아 있다. 이들이 서로 복도로 연결해 서고와 도서실로 사용했다. 


동궐도를 살펴보면, 중화당에 연결된 칠분서와 사삼와, 승화루 모습을 볼 수 있다 # 昌德宮 七分序


중희당과 후술할 부속 건물인 삼삼와를 연결하는 복도로, 단순 복도임에도 분합문과 난간을 설치해 격식을 차렸다.

칠분서

처마는 홑처마에 공포는 초익공 양식으로, 총 6칸이면서, ‘ㄱ’ 자 모양을 하고 있다. 중희당에서 칠분서로 들어와 동쪽으로 두 칸을 가면 길이 남쪽으로 꺾인다. 거기서 4칸을 더 가면 삼삼와가 나온다. 내부는 전부 마루이고, 난간은, 위에는 빗살무늬로, 아랫 단은 장수를 상징하는 덩굴무늬로 장식했다.


# 昌德宮 三三窩


중희당의 부속 건물로, 과거에는 칠분서를 통해 연결됐다. 6각형 건물로 이름이 특이하다.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으나, 다만 3(三)이 2번 쓰인 것을 보아 6각형 형태를 나타낸 듯 하다. ‘와(窩)’는 직역하면 음집, 굴이라는 뜻으로, 일상에서는 주로 별장장이나 창고 등으로 의미를 확대해서 사용한다. 그래서 용도도 서재나 서고, 또는 휴식 공간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삼삼와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그리고 지붕 꼭대기에는 절병통을 얹어 장식했다. 문짝은 분합띠살이며 교창은 설치하지 않았다. 난간은, 위에는 평 무늬로, 아랫 단은 장수를 상징하는 덩굴무늬로 장식했고 난간 밑에는 낙양을 설치해 화려함을 더욱 살렸다. 건물 본체와 기단 사이의 벽면은, 벽돌을 이용해 거북이 등껍질 문양으로 장식했다. 내부는 한 칸으로, 바닥은 마루이다.


지금도 남아있다. 다만 '동궐도'의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동궐도'에선 석조 기단이 창이 날 정도로 높아 사실상 1층 공간이 있었지만 현재는 단순한 기단으로 낮아졌다. 


# 昌德宮 承華樓

승화루

삼삼와와 연결된 2층 누각으로, 원래 1층은 세자가 읽을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 의신각(儀宸閣), 2층은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는 소주합루(小宙合樓)였다가 헌종때 낙선재를 지으면서 승화루로 바뀌었다. ‘승화(承華)’는 ‘정화(精華)를 잇는다’는 뜻으로, 많은 책과 글, 그리고 그림을 수집해 그 빼어난 정화를 이어받는다는 의미이다.'승화루서목'을 보면 보관하던 책이 무려 3742권, 글과 그림들이 665점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본 기능을 잃고,일제가 순종과 왕실의 경호라고 쓰고 감시라고 읽자 를 명목으로 설치한 창덕궁 경찰서의 건물로 쓰이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에 2층이므로 총 6칸에 달한다. 기둥은, 1층은 전부 긴 화강석으로 돼 있고 2층의 기둥은 나무를 네모나게 깎아 세웠고 동쪽 측면에 나무 계단을 놓아 이동이 가능케 했다. 지붕은 팔작지붕에, 처마는 겹처마이고, 공포는 이익공 양식으로 쇠서를 2개 뒀다. 용마루,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다 기와로 쌓았고 치미만 올리고 잡상은 놓지 않았다.



문짝은 분합띠살이며 교창은 설치하지 않았다. 2층의 난간은 결연초 문양으로 복을 기원한다는 의미이다. 1층도 원래는 문과 벽이 설치돼 있었으나 제강점기 이후에 다 뜯기고 현재는 외부와 트여있다. '동궐도'를 보면 승화루 앞 기단에는 화려한 괴석들이 3개가 놓여있어 주변을 아름답고 운치있게 했다. 지금은 기단도 괴석도 다 사라지고 그 앞엔 낮은 과 조그만 벽돌 만만이 자리하고 있다.

승화루 뜰엔 '향천연지(香泉研池)'라는, 큰 돌을 움푹 파서 만든 작은 연못이 있다. ‘향기(香)나는 샘(泉)과 벼루(研)같은 연못(池)’이란 뜻으로 맑은 정신으로 학문에 힘쓰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사진-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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