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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72] 옥인동 윤씨(尹氏) 가옥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1-10-10 21:03:59
  • 수정 2024-04-02 05:4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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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남산 북쪽 기슭 한옥마을이 들어선 필동(筆洞) 지역은 조선 시대에는 흐르는 계곡과 천우각이 있어서 여름철 피서를 겸한 놀이터로 이름 있던 곳이다. 또한 청학이 노닐었다고 해 청학동으로도 불렸다. 청학동은 신선이 사는 곳으로 불릴만큼 경관이 아름다워 한양에서 가장 경치 좋은 삼청동(三淸洞), 인왕동(仁王洞), 쌍계동(雙溪洞), 백운동(白雲洞)과 함께 한양 5동(漢陽五洞)으로 손꼽히던 곳이다.





남산골 제모습찾기의 일환으로 이곳의 옛 정취를 되살려 시민들에게 제공키 위해 골짜기를 만들고 물을 흐르게 했고, 정자를 짓고, 나무를 심어 전통정원을 조성했다. 7,934m² 대지 위에 서울의 사대가로부터 일반평민의 집에 이르기까지 한옥 다섯 채를 옮겨놓았다. 이들 한옥에는 집의 규모와 살았던 사람의 신분에 걸맞은 가구들을 예스럽게 배치해 선조들의 생활모습을 직접 보고 알 수 있게 했다.<편집자 주>  


이 집은 대략 1910년대에 지었다고 알려진 옥인동 47-133번지 가옥을 그대로 본떠서 새로 지은 것이다. 당시 옥인동 47번지 일대 너른 땅은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의 큰아버지 윤덕영(1873~1940) 소유였다. 





그는 이 집 근방에 20여 채에 달하는 집을 짓고 일가붙이와 모여 살았는데, 그 가운데 서양식으로 지은 사위 집(옥인동 박노수 가옥,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1호)과 윤덕영의 측실이 거처했던 옥인동 47-133번지 가옥만 남아 전한다.


1998년에 남산골한옥마을을 조성하면서 이 집을 옮겨 지으려 시도했으나 부재가 너무 낡고 손상이 심해 신축했다. 그러나 세밀하게 고증해 지었고, 원래 터가 진 땅의 높낮이 차이까지 일부나마 되살려 본래 분위기를 재현했다. 매우 규모가 큰 ‘ᄆ자형’ 안채에 사랑채 구실을 하는 마루방과 대문간이 더해져 전체 배치는 ‘ᄆ자형’을 이루지만 아무래도 안채를 위주로 짠 공감임을 짐작할 수 있다. 


간소하게 민도리집을 채택했으나 안채 앞쪽은 일반 민가에서는 보기 드물게 기둥머리에 익공(翼工)을 치장하는 등 건축구조와 세부기법은 당시 최상류층 주택의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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