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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69] 근현대사의 아픈 과거 품고 있는 '한양공원비'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1-10-06 12:03:19
  • 수정 2024-04-02 05:4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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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1885년부터 일본인들의 도성 내 거류가 정식으로 허용되고 충무로 일대가 일본인들의 거류지역이 됐다. 1908년 서울에 거주한 일본인들은 남산 기슭 30만평을 무상 임대받아 2년 여 간의 공사 끝에 1910년 5월 29일 정식으로 공원을 개원했다. 고종은 칙사를 보내 '한양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양공원비는 공원의 입구를 알렸던 비석으로 앞면의 '한양공원'은 고종의 친필로 전한다. 166cm의 높이로 원래는 공원의 입구 쪽인 남산 3호 터널 입구에 세워졌다가 터널 공사 때 현재의 위치로 이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 앞에는 비석 보호용으로 보이는 사각 돌기둥 3개가 꼽혀 있다. 



해방 이후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던 이 비석은 2002년 케이블카 광장 근처 철조망 안쪽 풀숲에서 발견됐다. 비석 뒷면은 정으로 쪼아놓은 듯 인위적으로 훼손이 되어 정확한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1925년 '조선신궁'에서 바라본 조선의 풍경과 당시 생활상을 담은 사진집인 '은뢰'(1937)에 비석 뒷면의 사진이 공개되면서 그 내용이 대부분이 해독됐다 이 비석은 명치(메이지) 45년인 1912년 조성됐고 전체 내용은 일본은 경성거류민단장이 쓴 평범한 '한양공원기'로 전한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아픈 과거를 품고 있는 한양공원비는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등록된 문화재다. 서울시 미래유산은 국가, 서울시지정  등록문화재로 등재되지 않은 것으로 미래 세대를 위해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무형자산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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