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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독립민주지사 특별전 ‘철혈광복-민청학련’전 개최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10-07 23:40:31
  • 수정 2021-10-08 00:4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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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공작사...독립민주지사 기억공간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공작사에 독립민주지사 기억공간을 새롭게 조성해 특별전을 마련했다./사진-이승준 기자[이승준 기자] 서울 서대문구는 지난 2010년부터 2019년까지 독립.민주지사를 선정하고, 그들의 역사적 발자취를 기억하기 위해 풋프린팅식을 하고 그 기록을 남겼다. 


독립.민주지사의 삶과 정신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린 의미 있는 행사로, 올해부터는 더 많은 독립.민주지사를 기억하기 위해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공작사내 독립민주지사 기억공간을 새롭게 조성해 특별전을 마련했다. 


전시는 올해의 독립.민주지사가 관련된 사건 설명과 각 지사들을 조명하는 영상작품과 설치물, 그들을 활동을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살펴보는 것으로 구성된다. 각 기억공간 중심에는 철혈광복단의 간도 15만원 군자금 탈취의거를 주도한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독립지사와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사건의 김윤, 이철, 장영달 민주지사에 대한 영상작품이 설치됐다. 


철혈광복단의 간도 15만원 군자금 탈취의거를 주도한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독립지사전이 열린다./사진-이승준 기자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학생들이 참여해 제작한 애니메이션과 인터뷰 중심의 영상작품은은 독립.민주지사의 위험을 무릅쓴 독립과 민주화를 향한 열망과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영상 외에도 올해의 지사들이 참여한 사건과 단체에 대해서는 문헌자료를 비롯해 사진, 영상을 폭넓게 제시해 이해를 돕고자했다. 이와 함께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대표적 사건을 정리해 역사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전시했다. 


과거 서대문형무소, 서울구치소로 명명되면서 지사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안긴 장소였던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독립과 민주화를 위한 그들의 노력과 희생을 기억하는 공간이 마련됐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 간도 15만원 군자금 탈취의거


북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청년들 주축으로 조직된 철혈광복단의 간도 15만원 군자금 탈취의거는 항일무장투쟁운동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사진-이승준 기자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방향은 무장투쟁의 성격으로 빠르게 변화된다. 북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청년들 주축으로 조직된 철혈광복단의 간도 15만원 군자금 탈취의거는 항일무장투쟁운동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으로, 무장투쟁의 군자금 마련이 그 목적이었다.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해 철혈광복단의 단원이었던 인국정, 윤준희, 최봉설은 조선은행 습격을 모의했다. 1920년 1월 4일 중국 옌지와 함경도 회령을 잇는 길회선 철도 부설자금을 수송 예정이었다. 


수송 정보를 얻게 된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김준, 박웅세, 최봉설은 4월 4일 오후 5-6시경 용정에서 6km 떨어진 동량리 어귀(용정시 지신향 수동촌)에서 권총과 포승, 철봉 등을 가지고 매복했다. 탈취 과정에서 총격전이 있었지만, 철혈광복단원들은 현금 15만원 탈취에 성공했다. 당시 총 1자루가 30원임을 감안하면 15만원으로 살 수 있는 총은 5천 자루에 달해 독립군 5천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거액이었다. 


탈취의거에 성공한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최봉설은 무기구입을 위해 러시아로 향했다. 그들은 무기거래를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엄인섭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엄인섭은 변절자로, 그가 총을 주기로 약속한 1월 31일, 블라디보스토크의 일본 헌병대는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최봉설의 숙소를 급습했다. 최봉설은 도주에 성공했지만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는 현장에서 체포됐고 그들이 탈취한 현금 가운데 13만원이 회수됐다. 


간도 15만원 군자금 탈취의거는 비록 실패했지만 탈취한 돈 일부로 구입한 무기가 청산리전투에 사용돼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다./사진-이승준 기자

간도 15만원 군자금 탈취의거는 비록 실패했지만 탈취한 돈 일부로 구입한 무기가 청산리전투에 사용되어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다. 또한 연변지국의 항일운동을 평화시위 형식에서 무장투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가진다. 탈취의거 이후 한인을 중심으로 한 항일 의지는 더욱 고무돼 연변지구의 항일무장투쟁사가 새롭게 쓰여졌다. 


임국정(1894-1921)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3.1운동 이후 간도로 망명해 철혈광복단으로 활동했다. 1920년 북로군정서에 가담해 특파원이 됐고, 간도 15만원 군자금 탈취의거에 참여했다. 이와 함께 서성권을 회장으로 하는 간도청년단의 운동부장으로 강백규, 이광 등과 함께 활동한 바 있다. 엄인섭의 밀고로 러시아에서 체포된 임국정은 윤준희, 한상호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1963년 정부는 임국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의 유해는 1966년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탈취의거 이후 한인을 중심으로 한 항일 의지는 더욱 고무돼 연변지구의 항일무장투쟁사가 새롭게 쓰여졌다./사진-이승준 기자

윤준희(1892-1921)은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던 1919년 3.1운동을 목격한 후 독립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심했다. 간도로 건너가 이상설이 이끄는 서전서숙에 입학해 신문학을 배웠고, 이후 용정 영신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철혈광복단에 참여한다. 1920년 북로군정서에 입단한 윤준희는 특파대장으로 활동하면서 간도 15만원 군자금 탈취의거에 가담했다. 탈취한 군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한 윤준희는 무기를 북로군정서에 제공해 청산리전투의 대승에 공헌했다. 1920년 엄인섭의 밀고로 체포된 그는 동지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받고 순국했다. 1963년 정부는 윤준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1966년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한상호(1899-1921)는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어릴적 간도에 건너가 명동중학을 졸업한 뒤 와룡소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간도에서 철혈광복단을 조직해 항일독립운동에 힘썼다. 그 뒤 북로군정서의 특파원이 됐고, 1920년 1월 4일 간도 15만원 군자금 탈취의거에 가담했다. 탈취한 자금으로 당시 그 곳에 출병했던 체코 군대로부터 최신식 무기를 구입해 북로군정서에 제공했다. 그러나 엄인섭의 밀고로 체포돼 다음 해 8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1963년 정부는 한상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1966년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 민청학련 사건(1974)


민청학련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1974년 4월 유신 반대운동을 하던 인사들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중심으로 국가 전복을 꾀하고 공산정권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를 조작해 구속기소한 사건이다./사진-이승준 기자

민청학련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1974년 4월 유신 반대운동을 하던 인사들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중심으로 국가 전복을 꾀하고 공산정권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를 조작해 구속기소한 사건이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은 한 사람이 모든 권력을 거머쥔 유신 체제를 선포했고, 전국 대학에서 반유신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다. 이 대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이끈 청년층과 박정희 군사정권을 비판해온 지식인, 양심적 종교인 등은 학생들과 합세해 거국적인 반유신항쟁을 계힉했다. 하지만 정보 공안기관의 주동자 사전체포와 학내로 투입된 진압대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오히려 왜곡.매도 당하면서 권력 강화의 구실로 악용됐다. 


민청학련 사건 이후 항쟁의 외연은 확대돼 학생뿐 아니라 비판적 지식인, 재야 반정부 인사와 정치인들이 결합하고 양심적인 종교인들까지 가세하는 양상을 보였다./사진-이승준 기자 

민청학련 사건은 국가의 이름으로 고문과 사법살인이 자행된 사건이었지만 민주화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사건으로 이후 항쟁의 외연은 확대돼 학생뿐 아니라 비판적 지식인, 재야 반정부 인사와 정치인들이 결합하고 양심적인 종교인들까지 가세하는 양상을 보였다. 


종교인의 참여는 자연스럽게 신자들을 유입시켜 운동의 저변을 일반 국민으로 확대하는 성과를 가져왔고 국제적인 반(반) 박정희 여론을 이끌어 정권에 타격을 주었다. 


민청학련 사건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인적자원을 일궈냈다. 거듭되는 반유신 항쟁으로 새로운 반정부 인사들이 늘어나면서 유신체제 말기, 그 수는 수만명에 이르렀고 전국적인 유대관계를 형성하면서 위협적인 반정부 세력이 됐다. 결집된 관계에서 민청학련은 그 구심점이 됐다. 그들은 유신붕괴를 촉발했고 부마민주항쟁, 나아가 1980년 서울의 봄, 5.18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10민주항쟁의 기반이 됐다. 


기억나무/민청학련 관련자 155명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한 설치물로, 그들의 희생으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듯이 그들의 이름이 적힌 잎들은 햇살을 받아 전시장을 무지개 빛으로 물들인다./사진-이승준 기자김윤(1953-2004)은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서강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1973년 가을과 1974년 봄, 유신 철폐 반시위에서 활동하다 검거, 징역 5년을 선거받고 복역하다 다음 해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1976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다시 수감됐고, 석방 후에는 인권운동과 여성농민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80년 5월 엠네스티 한국지부 간사로 활동 중 5.18광주민주화운동 배후 조종 혐의로 지명수배를 받았다. 


1981년부터 전북 익산, 순창, 완주 등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농촌공동체를 위한 활동과 함께 전국여성농민위원회가 창립될 때까지 준비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여성농민운동 조직화에 힘썼다. 김윤은 지병인 선천성 심장병으로 몇 차례 수술을 받았고, 병세가 악화돼 2004년 세상을 떠났다. 


김윤(1953-2004)은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서강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1973년 가을과 1974년 봄, 유신 철폐 반시위에서 활동하다 검거, 징역 5년을 선거받고 복역하다 다음 해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김윤은 지병인 선천성 심장병으로 몇 차례 수술을 받았고, 병세가 악화돼 2004년 세상을 떠났다./사진-이승준 기자이철(1948- )은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1969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그해 3선개헌 반대시위를 주도하면서 제적된 후 8월 말에 체포, 기소유예되고 강제 징집됐다. 1972년 제대 후 복학해 1973년 서울대 문리대의 10.2유신반대 시위의 배후인물로 수배됐고, 그해 12월부터 1974년 4월까지 반유신궐기를 위한 민청학련의 일선총책을 맡았다. 현상금 3백만원에 수배되는 등 사상초유의 검거작전 끝에 체포됐고,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무기형으로 감형, 복역하다가 1975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이후 10여 년 동안 정보기관으로부터 여러 차례 살해위협을 받았고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주동자로 다시 현상수배되어 도피 끝에 구속됐다. 1984년 사면복권 후 현실정치에 참여해 신한민주당 돌풍의 주역으로 1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13대(무소속), 14대(민주당)까지 정치활동을 했다. 2005년에는 한국철도공사 사장으로 철도혁신을 추진했고, 현재 민청학련계승사업회(2013년 재건) 상임대표, 사단법인 희망래인  이사장, 민주행동 공동대표로 있다. 


민청학련 사건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인적자원을 일궈냈다. 거듭되는 반유신 항쟁으로 새로운 반정부 인사들이 늘어나면서 유신체제 말기, 그 수는 수만명에 이르렀고 전국적인 유대관계를 형성하면서 위협적인 반정부 세력이 됐다./사진-이승준 기자장영달(1948- )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전주고교 3학년 때 3선개헌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 1969년 국민대 행정학과에 입학했고, 군 복무 후 한국기독학생회 총연맹에서 활동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돼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이듬해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재구속돼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후 중앙정보부의 4회에 걸친 반성문 작성을 거부해 민청학련 사건 잔형을 재집행 당했다. 


1980년 목포교도소에 수감 중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면서 다시 ‘인혁당사건조작폭로’를 시비하는 ‘전향서’ 작성을 강요받았다. 이를 거부해 대전교도소로 이송되는 등 전두환 정권 때까지 고초를 겪었고 1981년 다시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이후 민주화운동청년연합회에 참여했고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총무국장과 사무처장으로 활동했다. 1986년 5.3인천항쟁 때 개헌투쟁 사건으로 1년형을 선고받아 다음 해 석방됐다. 14대 국회의원(민주당)으로 정계 활동을 시작한 그는 15대(새정치국민회의), 16대(새천년민주당), 17대(열린우리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이외에도 민청학련 계승사업회 공동대표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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