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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68] 당신의 역사를 기억합니다(1)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1-10-02 19:05:14
  • 수정 2024-04-02 05:4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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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애족의 뜻을 배우는 역사의 산 교육장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전시관

서대문형무소전시관(전 보안과 청사), 서대문형무소를 관리하기 위해 간수들이 업무를 보았던 청사 건물로 1923년 건축/사진-박광준 기자 

[박광준 기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우리 민족은 일제에 의한 강제점령이라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그 시기는 민족의 자존심을 훼손당하고, 민족 스스로의 발전이 중단되는 고통의 역사였다. 그러나 우리에겐 역사적 현실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민족 독립을 향한 투쟁의 역사가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바로 그러한 역사의 계승을 위한 배움터로 마련됐다. 미래를 책임질 청소년들은 물론, 온 국민들이 순국 선열들의 뜻을 기리고, 지난날의 역사를 극복키 위한 애국애족의 뜻을 배우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 돼야 한다. 


사진-박광준 기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구 서울구치소 시설을 개조해 과거 경성감옥.서대문감옥을 복원한 독립운동 및 민주화운동 관련 역사관으로,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라는 명칭으로 사적 제324호로 지정돼 있다. 


1912년 경성감옥의 수용 능력이 부족해지자, 마포에 새로운 감옥을 지으면서 '경성감옥'이란 이름은 새로 지은 감옥이 승계했다. 기존의 건물은 구분을 위해서 '서대문감옥'으로 개칭한 것이다.


사진-박광준 기자 

1908년 건축된 경성감옥은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현재의 서울구치소로 역사가 이어져오고 있고, 1912년에 마포에 신축한 새로운 경성감옥은 마포교도소를 거쳐 경기도 안양시로 이전해 지금의 안양교도소로 역사가 이어져오고 있다.


과거 일제강점기 당시의 독립 투사와 해방 이후 군사 독재 시절의 민주화 운동가를 수감했던 과거 악명 높았던 감옥이자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살아있는 현장이다. 1908년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됐고, 1987년 경기도 시흥군 의왕읍으로 이전하기까지 사용됐다. 


사진-박광준 기자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이기도 하다. 크기는 부지 19만 8,348m2, 연건축면적 26,446m2, 수감 가능인원 3,200명이다. 지금의 역사관은 당시 부지 중 일부만을 재보수 및 복원해놓은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구성은 출입문 바로 앞으로 보이는 전시관, 바로 뒤로 중앙사, 그리고 그를 이어서 제9~12옥사와 공작사, 한센병사, 추모비, 사형장, 시구문, 격벽장, 여옥사(구 유관순 지하감옥), 취사장 등으로 이뤄져 있다. 취사장은 건물이 부족해서 그런지 기념품 가게와 같은 건물에서 전시돼 있다.


사진-박광준 기자 

전시관 지하 고문실에는 밀랍인형으로 고문을 받는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실감나게 재현한데다가, 당시 일본 제국이 자행하던 고문의 잔혹함을 보여준다. 고문실 자체가 지하에 있어 어두컴컴하기 때문에 견학하러 온 어린 학생들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줄 정도이고 여성 독립지사를 고문 장면을 재현한 데에는 처절하게 음성까지 들린다. 센서라지만 무섭다. 


한 사람이 서 있을 공간만 있어 2~3일 동안 갇혀있으면 전신마비가 온다는 고문실인 벽관도 재현해 놓았는데, 이것도 정말 무섭다. 벽관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지만 답답해 그 당시 독립운동가의 심정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다.


사진-박광준 기자 

대부분의 감옥은 옥문을 닫아놓았지만 몇 개는 열어놓아서, 3평 남짓한 옥내를 구경할 수 있다. 단, 유관순 지하감옥은 완전히 막아놓았다. 유리로 막아놓았기 때문에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조로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 


대부분의 감옥은 3평에서 5평 정도로 운신의 폭이 있지만 지하감옥은 독방이라 그런지 한평 남짓한 좁은 내부를 가지고 있다. 갇혀있던 독립운동가들의 옥고를 짐작하게 할 수 있을 만한 구조이다.


사진-박광준 기자 

서대문형무소 역사전시관과 중앙사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개조해서 영상실, 기획전시실, 자료실, 옥중생활실, 임시 구금실, 고문실 등으로 당시의 생활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 놓았고, 나머지 7개 동의 옥사 중 제 10, 11, 12 옥사는 사적 제324호로 지정됐다. 


2010년부터 전시물 교체 정비를 해 1987년 서대문 형무소 이전 당시 철거됐던 식당, 격벽장, 여옥사(1979년 철거) 등을 복원했고, 보안과 건물 역시 일제강점기 시절 그대로 복원해 냈다. 


특히 서대문 형무소의 옥사와 격벽장은 한국에서 흔한 구조가 아닌 파놉티콘 구조로 만들어졌다. 중앙사는 중앙사로부터 연결된 모든 옥사를 다 감시할 수 있는 구조로 돼있지만 감방에서 간수를 육성으로 부르기는 쉽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박광준 기자 

일제는 한국민의 저항의식을 억누르고 독립운동 세력을 말살키 위해 독립운동을 취조하면서 고문과 구타를 서슴없이 자행했다. 일제의 식민지 한국인들에 대한 이 같은 폭력은 역사적으로 일본이 우리나라로부터 문화를 전수받았고, 정치.사상적으로도 우리보다 우수하지 못하다는 열등의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일제는 한국민을 지배하는데 유화책을 쓰지 못하고, 무차별적인 강압과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폭력적 통치 방식은 서국 제국주의의 식민지배 방식과 바교해 보아도 사상 유례가 없는 비인륜적 행위였다. 


물고문/강제로 수조에 머리를 집어넣거나 코나 입에 물을 마구 들어부어 호흡을 고난하게 해 고통을 주었던 고문 방법으로, 심지어는 폐에 물이 차서 흉막염을 걸려 매우 고통스럽게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사진-박광준 기자

지하고문실. 이곳 서대문형무소 보안과청사 지하실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독립운동가응 취조했던 공간이다. 각 방은 취조실과 임시구금실, 독방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곳에 끌려온 독립운동가는 취조 과정에서 견디기 힘든 온갖 고문을 감당해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곳 지하취조실은 수감자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지하고문실'이아 불렀다. 이렇게 서대문형무소 지하고문실은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에 자행했던 폭력과, 국권을 되찾기 위해 피흘리며 노력한 한민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증명하고 있다.


취조실, 일제는 재판을 받기 전 미결수로 수감돼 있었던 독립운동가를 일일이 경찰서로 이송해 취조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 고등게 형사를 직접 서대문형무소에 파견해  이곳 지하방에서 취재를 했다./사진-박광준 기자

지하독방, 취조 후 옥사로 이송하기 전 감금했던 곳으로, 곳곳에서 들려오는 고통의 비명소리와  다시 올지 모르는 고문의 공포로 휩싸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하독방에서도 독립운동가는 만세소리를 멈추지 않았고, 독립의 다짐을 되새겼다./사진-박광준 기자  

상자고문, 상자 안쪽에 날카로운 못을 박아 놓고, 사람을 상자 안에 집어넣어 마구 흔들어 못에 찔리게 하여 고통을 주었던 고문도구.

벽관 고문, 옴짝달싹 할 수도 없이 좁은 공간에 사람을 감금해 앉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고통을 주었던 고문도구로, 벽에 서 있는 관이라 하여 '벽관'이라 이름을 붙였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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