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준 기자] 도암대(陶巖臺)는 정면 2칸 측면 1.5칸 목조와가 팔작지붕으로,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이 조선 명종 3년(1548) 풍기군수로 재임시 고향 예안(禮安) 나들이 길에 쉬어 가던 장구소(杖屨所: 지팡이 놓고 신발을 벗어 머물던 곳)이다.
1921년 감천면 유림에서 선생의 발자취를 기념키 위해 도암대계(陶庵臺契)를 결성한 후, 유림이 주도하고 선생의 후손들이 조력(助力)하여 1934년에 도암대(陶庵臺)를 세웠다. 그 후 1958년과 1989년, 두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陶巖臺(도암대)라는 현판 외에 세 개의 편액이 있다. 먼저 陶巖亭記(도암정기)는 戊戌(무술) 流火節(유화절)에 永嘉(영가) 權相圭(권상규)가 썼다고 했으니 아마도 1958(戊戌)년 음력 7월(流火節) 중건할 때에 안동(永嘉) 권씨 상규가 지은 것이다.
陶巖臺重修記(도암대중수기)는 ‘光復後五十週年靑狗重陽節也(광복후오십주년청구중양절야) 郡守(군수) 眞城(진성) 李京洛(이경락) 謹記(근기)’라 한 것으로 보아, 1994(甲戌=靑狗)년 음력 9월 9일(重陽節)에 군수 진성이씨 이경락이 쓴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안내판에 적힌 1958년, 1989년 외에 1994년에도 수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陶巖臺重修記(도암대중수기)는 ‘檀紀七十二戊辰後靑狗濯枝節(단기칠십이무진후청구탁지절) 漢陽(한양) 趙光永(조광영) 謹記(근기)“라 한 것으로 보아, 한양조씨 조광영이 1994(甲戌=靑狗)년 음력 6월(濯枝節)에 쓴 것이다./사진-이승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