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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와 상사뱀 설화의 유래가 전해지는 '춘천 청평사'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09-25 23:56:42
  • 수정 2024-03-23 00: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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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평사 유무형 문화유산들


청평사 전경/사진출처-춘천시

# 고려선원(高麗禪園, 명승 제70호) 


고려 광종 24년(973)에 백암선원으로 창건돼 1,000년 이상을 이어 온 선원이다.


고려시대에는 이자현 원진국사 승형, 행촌 이암 등이, 조선시대에는 김시습, 보우, 환적당 의천 등 이 이 곳에 머물렀다. 고려선원에 머문 당대 최고의 고승과 학자들은 학문과 사상을 전파했고 뛰어난 문인들은 시문으로 이 곳의 자연과 문화를 노래했다. 청평사는 아름다운 자연 환경에 시문과 설화가 어우러진 곳이다.


사진-이승준 기자 

고려 선종 6년(1089) 이자현이 문수원으로 중창하면서 선원을 확대한 곳이고, 37년간 머물면서 지형지세를 자연과 인공을 조화롭게 암자와 정자, 연못 등을 조성했다. 구송폭포를 비롯한 많은 폭포들이 계곡을 수놓고 있고 자연 그대로 보존된 선동과 서천계곡, 이들을 에워싼 부용봉의 바위들이 청평사 주변을 장식하고 있다.


사진/이승준 기자또한 고려 초기에 건립된 삼층석탑, 이자현이 조성한 영지, 한국 서예사에 빛나는 문수원기와 문수사장경비, 조선시대 스님들의 사리를 안치한 부도, 비를 기원한 기우단 터, 하늘에 제사 지내던 천단, 공주와 상사뱀 설화의 유래가 전해지는 회전문 등은 고려선원의 풍부한 인문자원이다.


# 공주와 상사뱀(공주설화 / 公主說話) 



신라 선덕여왕 때 당나라 태종의 딸인 평양공주가 있었는데 청년이 그를 사랑했다고 한다.


이에 황제는 일반 백성인 청년이 황제의 딸을 사랑한다는 노여움을 받아 처형됐다. 청년은 죽어서 뱀으로 변해 공주의 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상사뱀의 이름은 이런 이유로 생기게 되었다). 황제는 점술가와 의원을 불러 치료를 부탁했으나 모든 방법이 듣지 않았다. 또한 중국의 여러 사찰을 돌면서 부처님께 빌어 보았으나 효험이 없자 신라에서 온 스님에게 말을 듣고 신라의 산하를 두루 다녔다.



그렇게 다니던 중에 청평사에 도착한 공주는 공주굴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아침 종소리를 듣고 뱀에게 절에 가서 밥을 얻어 올 테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동안 공주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던 상사뱀이 공주의 몸에서 떨어져 공주는 절에 올라갔다. 마침 절에서는 가사불사를 하고 있었는데 공주는 공주탕에서 목욕재계를 하고 가사에 서너 바늘을 뜬 다음 법당에 들어가서 염불을 하고 있었다.


기다리다 지친 상사뱀이 공주를 찾아 정문을 들어가려 할 때 뇌성벽력과 함께 소나기가 쏟아져 물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후세 사람들은 이 문을 회전문이라 부르게 됐다. 공주가 밥을 얻어 동굴로 돌아와 보니 상사뱀이 죽어 폭포에 떠 있었다. 공주는 시원하기도 하고 가련하기도 해 청년의 화신인 상사뱀을 묻어 주고 이 사실을 본국에 알렸다.


사진출처-청평사 

당나라 태종은 재상 저수량에게 공주의 혼인 때 쓰려고 비축해 뒀던 금덩어리 세 개를 주어 화려한 법당 을 세우게 했다. 저수량은 금 한 개로 법당과 공주 이궁 및 저수량 봉교서비를 세우고 또 한 개는 장차 중건할 때 쓰라고 어디에 묻었고 나머지 한 개는 공주의 귀국 여비로 주고 떠났다. 공주는 구성폭포 위에 삼층석탑을 세 워 부처님 공덕을 찬양하고 귀국했다. 그런 이유로 이 탑을 공주탑이라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와 당나라는 급속히 친밀해져 삼국통일에 큰 기여를 했다. 


# 삼층석탑(淸平寺 三層石塔)/강원도 문화재자료 제8호


삼층석탑(淸平寺 三層石塔)/강원도 문화재자료 제8호/사진-이승준 기자

청평사 입구의 구송폭포 동북쪽 환희령 위의 자연암반 위에 건립됐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8호(1984.6.2. 지정)이다.


탑의 구조는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됐고, 노반 이상의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다. 3층 옥개석은 계곡에서 찾아 복원했고, 3층 탑신석은 새로 만들어 얹었다. 2중기단의 3층석탑으로 상층과 하층의 기단에는 우주와 탱주가 2:1로 새겨져 있다. 


삼층석탑(淸平寺 三層石塔)/사진-이승준 기자각층의 탑신석에 는 우주를 모두 새겨 놓았고 옥개받침은 모두 4단이다. 3층 옥개석 윗면에 찰주를 세웠던 구멍이 남아 있다.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다. 옥개석의 추녀선이 위로 올라가 날렵한 감을 준다. 총높이는 3.1m이다.


삼층석탑(淸平寺 三層石塔)/사진-이승준 기자청평사 창건설화로 전해오는 공주설화로 인해 당나라 태종의 딸인 평양공주가 건립했다고 해 공주탑이라고도 한다.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청평사 창건시기로 볼 때 고려초에 건립된 석탑으로 추정된다.


# 공주굴(公主窟)


공주굴/사진-이승준 기자구송폭포 동쪽에 있다. 공주와 상사뱀 설화에서 평양공주가 청평사에 도착해 하루를 상사뱀과 묵었다고 전해지는 바위틈이다


# 거북바위


거북바위/사진-이승준 기자

구송폭포를 가지 직전에 있는 바위로 거북이를 닮았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거북이는 물에 사는 동물이므로 거북이가 물 가까이에 살면 잘 살 것이고 청평사 근처에 큰물이 생기면 청평사가 번창한다 는 전설이다. 그런데 1970년대에 소양강댐이 건설되자 청평사 앞에 큰물이 생겨 전설대로 절이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한다.


거북바위에는 '신규선(申圭善)'과 '김교창(金敎昌)'이 새겨져 있다. '신규선'은 '청평사지'를 편찬토록 권고하고 문수원기를 극락전으로 이전할 당시인 1914년에 춘천군수를 지낸 인물이다.


# 구송폭포(九松瀑布)


구송폭포/사진-이승준 기자

9그루의 소나무가 있는 대(臺)가 있어서 구송대(九松臺)라 하고 그 아래의 폭포를 구송폭포(九松瀑布)라 한다.


조선 후기에 구송대의 소나무는 없어졌다. 또한 아홉 가지 소리를 낸다고 구성폭포(九聲瀑布) 라고도 한다.


# 진락공 이자현 부도(眞樂公 李資玄 浮屠)


부도란 스님이 입적하고 화장을 하고 나온 사리를 봉안한 석조물을 말한다. 승탑(僧塔)이라고도 한다


영지 서쪽의 각산당 부도와 함께 담장 안에 건립돼 있다. 부도의 주인공을 진락공 이자현으로 알려 져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진락공 이자현 부도/사진-이승준 기자

조선시대 후기 강원도 관찰사 정두원이 청평사 스님인 문옥(文玉)에게 진락공의 유골을 다시 묻도록 했고 심중량이 춘천부사를 지낼 때 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심중량은 청평식 암이 있던 계곡에 1706년에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중수했다는 암각문이 있다.


암각문은 ‘강희사십오년병술이월일/행부사심중수/석수이강금(康熙四十五年丙戌二月日/行府使沈重修/石手李康金)’인 데 이로 보면 진락공의 부도는 청평식암이 있던 계곡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영지 서쪽에 세워진 부도는 진락공이 아닌 다른 스님의 부도라는 설도 있다. 단지 이중환의 '택리지'에 진락 공의 부도가 절의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근거로 후대인들이 진락공의 부도로 부른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 영지 명문 바위(影池 銘文 바위)


스님이 깨우침을 얻고 나서 지은 시라는 뜻으로 알려진 오도송(悟道頌)은 세월의 흐름 속에 암각문의 원문은 확인할 수 없었다./사진출처-청평사 

영지 앞 바위로 윗면에 한문으로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이 시는 스님이 깨우침을 얻고 나서 지은 시라는 뜻의 오도송(悟道頌)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오도송(悟道頌)


심생종종생(心生種種生) 마음이 일어나면 모든 만물 일어나고

심멸종종멸(心滅種種滅) 마음이 사라지면 모든 만물 사라지네

여시구멸이(如是俱滅已) 이와 같이 모두가 사라지고 나면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 모든 세상 곳곳이 극락세계일세


# 영지(影池)


영지/사진-이승준 기자

영지란 천단(天壇)의 주변에 건립됐던 견성암(見性庵)이 연못에 그림자처럼 비친다고 해 지어진 이름이다. 전체적으로 직사각형의 연못으로 물이 맑으며 작은 바위 서너 개가 못 가운데 나란히 있다.


고려시대 진락공 이자현이 청평사 골짜기 전체를 사찰 경내로 삼아 선원(禪園)을 가꿨는데 그 중심에 영지가 있도록 했다고 하고 조선 초기 김시습의 한시를 비롯한 많은 문인들의 시에 언급돼 있다.



일본이 자랑하는 교토(京都) 사이호사(西芳寺)의 고산수식(枯山水式) 정원보다 200년이나 앞선 정원이라고 한다. 한국 정원사(庭園史)에 중요한 자료이다.


지금도 연못에 물결이 일지 않으면 부용봉과 주변의 경관이 물속에 그림자처럼 비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청평선동(淸平仙洞)


사진출처-청평사 

청평사에서 서천을 지나 선동으로 진입하는 선동계곡 입구 동쪽 암벽에 새겨 놓았다. 누구의 글씨인지 암각문에 새겨져 있지 않으나 이자현이 썼다고 전해온다


# 공주탕(公主窟)


사진출처-청평사 

공주와 상사뱀 설화에서 평양공주가 상사뱀을 공주굴에 떼어 두고 절에 올라 와서 가사불사를 하기 전에 목욕재계를 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청평사의 요사채가 있는 서쪽 계곡에 있다. 실제 목욕탕과 같이 패여져 있다. 불교에서 목욕은 단순히 몸을 씻는다는 의미 외에도 마음의 때를 벗어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 척번대(滌煩臺)


사진출처-청평사 선동계곡을 올라오면 인공적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자연석으로 균열이 생겨 만들어진 단(壇)으로, 아래쪽에는 청평선동, 우측으로는 선동부도와 오층석탑이 멀리 있고 위쪽에는 청평식암이라는 이자현의 큰 새김글이 있다. 주변에는 나한전 터 등 여러 건물의 터와 폭포가 있다.


이자현을 비롯한 수행자들이 이 바위에 앉아 참선수행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번뇌와 망상이 사라진다고 해 이름을 척번대라고 했다. 과거엔 첩석성산이라고도 했다.


# 선동부도(仙洞浮屠)


훼손전/사진출처-춘천문화원 춘천학연구소이 부도는 적멸보궁과 거의 같은 해발고도의 동쪽 산능성이에 위치하고 누구의 부도인지 알 수 없어 무명부도라고도 불린다.


1990년대 후반에 부도의 중대석이 멸실돼 현재의 모습이 됐다. 사리함을 도굴키 위해서 훼손된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훼손 사유를 알 수 없다. 중대석이 멸실되고 탑신석과 옥개석이 다시 올려져 있는 것을 보면 중대석이 인근 계곡에 있을 가능성이 있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훼손전 탑신부/사진출처-춘천문화원 춘천학연구소훼손 전에는 전체높이가 1.3m였다. 거칠게 다듬은 적심석은 구릉지에 건립됐기 때문에 하부가 거의 드러나 있다. 방형의 지대석과 중대석 괴임이 같은 돌로 만들었고 연꽃문양을 조식했다. 중대석은 팔각이고 상대석은 앙련을 돌려 새겼다. 탑신은 원구형이나 상하가 조금 체감돼 원통형에 가깝다. 옥개석은 팔각원당형이고 추녀에서 반전이 심하다. 전체적으로 옥개석이 커서 둔중한 감을 주고 있으나 작고 아담한 부도였다.


# 청평식암(淸平息庵)


청평식암척번대를 지나 계곡을 오르면 식암 터이자 최근 해체한 적멸보궁 터가 있고 뒤편의 암벽에 새겨져 있다. 청평선동과 함께 이자현이 썼다고 전한다.


# 식암폭포(息庵瀑布)


식암폭포 전경 전체 높이 10m정도의 2단 폭포로 위, 아래쪽 폭포 위에 암자 터가 있다. 위쪽 폭포 위 암자 터의 긴 바위에는 ‘강희사십오년병술이월일 / 행부사심중수 / 석수이강금(康熙四十五年丙戌二月日 / 行府使沈重 修 / 石手李康金)’이라는 암각문이 새겨져있다. 이는 1706년 2월에 이곳의 건물지를 부사 심씨가 중수하고 이강금이 새겼다는 것으로 진락공 이자현 부도와도 관계가 있다. 또한 이자현이 손과 발우(鉢 盂)를 씻었다는 진락공 세수터가 있다.


진락공 세수터 진락공 이자현은 이 주변에 작은 암자를 짓고 조용히 수양을 하는 등 참선공부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터는 이자현이 손과 발우(鉢盂)를 씻기 위해 네모로 두 개의 구멍을 파놓아 만들었다고 한다. 주변에는 과거 나한전의 터가 있었고 주변에 진락공 이자현의 유골을 담은 질그릇 함이 조선 후기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진락공 이자현 부도와 연관이 있는 곳이다.


# 세향원(細香院)


객방과 인공연못영지의 서남쪽에 건립된 건물로 설잠 김시습이 머물렀던 건물로 서향원(瑞香院)으로도 불리운다.


조선시대 유산기(遊山記)에는 현재의 세향원이 건립된 곳이 아니라 이 건물에서 뒤편 계곡 100m 지점에 있는 곳으로 복희암(福禧庵) 터라고 전하는 곳이라고 한다. 김시습의 매월당집(梅月堂集)에 ‘청평산 세향원(細香院) 남쪽 창문에서 쓰다’ 라는 한시도 기록돼 있다. 현재는 청평사 방문객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 환적당.설화당 부도(幻寂堂.雪花堂 浮屠)


정면/좌-설화당, 우-환적당 동쪽의 부도가 환적당 부도로 환적당 의천은 서산대사의 손제자이다. 1690년에 해인사 백련암에서 입적한 조선 후기 승려로 평생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수행한 스님이다.


환적당 부도 음각전국 9곳에 사리를 봉안한 부도를 건립했다. 이중에 하나가 청평사에 세워진 부도이다. 부도의 기단부 중간 팔각형 부재의 뒷면에 환적당(幻寂堂)이라고 새겨 놓아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다. 전체높이는 약 2.4m이다. 서쪽의 부도와 매우 비슷하다. 지붕이 부른 형태이고 부도 중간의 둥근형태의 탑신석이 타원형으로 만든 세부적인 면이 다를 뿐이다.


설화당 부도음각서쪽의 설화당 부도는 어느 시대의 누구의 부도인지 알려진 것이 없으나 문양이 섬세하 고 지붕이나 상륜부의 장식 등으로 보아 환적당 부도보다 오래된 조선 중기 이전에 세워진 부도라 추측된다.


# 각산당 석진부도(覺山堂 石眞浮屠)


각산당 석진부도/사진-이승준 기자 1990년대 초에 대웅전을 중창한 주지 석진 스님의 부도로 휘는 석진이다. 법호는 각산이다.


서기 1946년 11월 9일 충남 당진국 우강면 고리에서 출생, 15세 마곡사에 출가, 22세 팔공산 동화사에서 서운 대선사의 법제자가 됐다. 백양사와 마곡사 총무국장, 관악산 삼성암과 약수산 약수사 주지를 거쳐 청평사 주지를 역임했다. 1990년 5월 13일 향년 46세(법남 30)로 청평사에 입적했다. 부도의 양식은 신라말~고려초에 유행하는 팔각원당형의 부도 양식을 복합적으로 도입해 건립했다. 


# 헌답비(獻納碑)


헌답비/사진-이승준 기자 앞면에는 권흥식과 부인 박정명, 아들 기준과 병기가 기록됐다. 이들은 청평사에 토지를 기증한 가족의 이름이 있고 뒷면은 1923년 음력 4월 2일에 청평사 주지 황계월이 세웠다고 했다.


청평사에 토지를 헌납하게 된 동기를 알 수 있는 내용이 있는데 비를 세우게 된 동기를 시주자 이름 뒤에 부기한 군자(君子)·만녀(萬年).개이(介爾).경복(景福)에서 볼 수 있다. 이는 '시경(詩經)'의 '대아(大雅)'편 기 취(旣醉)에 “기취이주(旣醉以酒) 기포이덕(旣飽以德) 군자만년(君子萬年) 개이경복(介爾景福)”이란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 만년토록 크나큰 복 누리소서’라는 뜻으로 사찰에 토지를 헌납한 일로 인해 그 가족의 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청평사지에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청평사토지헌납기(淸平寺土地獻納記)'라는 기문 으로 수록돼 있다. 


# 기우단 터(祈雨壇 터)


기우단 터 계곡 건너에 있었고 하늘에 비가 오게 해달라고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조선시대 서종화의 문집인 '약헌유고藥軒遺稿)'의 '청평산기(淸平山記)'에 ‘기우제를 지내면 종종 감응이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에 의하면 청평사에서 기우제를 정성스럽게 지냈음을 알 수 있다.


# 오층석탑(五層石塔)


오층석탑 정면1979년경에 주지 향봉스님이 스리랑카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옮겨와 아래의 식암 터에 적멸보궁(현재 해체)과 함께 이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했다. 고려시대 석탑의 양식을 모방해 건립했다.


# 소요대(逍遙臺)


소요대 전경 이 곳에서는 소양호와 청평사 일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어 등산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조선시대 서종화의 '청평산기(淸平山記)' 에서는 ‘산기슭의 머리 부분이 잘라져 돌이 드러나면서 대가 된 것인 데, 그 위에 너 댓 사람이 앉을 만하다. 험한 골짜기에 임하여 있는데 수천 길이나 된다. 이곳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층층이 쌓여 있는 봉우리가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다. 뛰어올라 솟아나온 듯한 대단한 산 의 기세를 모두 보여주는데, 기이한 형태와 자태를 모두 다 기술할 수 없다. 산의 푸르른 기운은 아래로 퍼지고 상쾌한 기운은 옷소매를 가득 채우는데, 마침 늙은 중 천호(天浩)가 따라왔다. 그와 반나절 동 안 얘기를 나누었는데, 이야기가 맑고 깨끗하여 들을 만 한 것이 마치 신선인 홍애(洪厓)와 선문(羨門)과 함께 세상 끝 아득히 먼 곳에서 같이 있는 듯하다.’라고 표현했다. 


# 천단 (天壇)


촛대바위

주변에 촛대 모양의 촛대바위, 송대바위 등이 있는 이 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고 알려져 있다.


청평사를 중창한 보우대사의 '허응당집(虛應堂集)'에는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淸平八詠 天壇禮象 청평팔영 천단예상 : 천단에서 예를 올리다]

瓊臺金殿後 경대금전후구슬대 금당 뒤로

齋陟五更初 재척오경초오경 초에 재 올리려 오르니

皎皎昭靈象 교교소영상교교히 신령스런 성상 밝고

蒼蒼靜玉虛 창창정옥허창창한 하늘은 고요하구나

三三禮不盡 삼삼예부진끝없이 절해도 다하지 못하고

一一頌無餘 일일송무여하나하나 찬송하여 남음이 없네

應速同桴鼓 응속동부고응보(應報) 신속함은 북채로 북을 침과 같으니

連芳降國儲 연약강국저꽃다운 국맥 이을 세자 탄생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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