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조선후기 '경세유표' '목민심서' '여유당전서'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자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
  • 이승준
  • 등록 2021-09-13 21:03:27
  • 수정 2023-12-21 13:46:58

기사수정

다산 정약용 선생의 동상/사진-이승준 기자 

[이승준 기자]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經世遺表' '牧民心書' '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고,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해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해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했다.


다산의 18년 강진 유배 생활 중 1808년(순조8)부터 10여년 동안 거쳐하던 다산 초당에서 약 10m 정도 떨어진 곳에 세워진 정자로, 이 곳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심신을 달래고 소일(消日)을 하였다고 한다. 초당 안에는 해배(解配)를 앞두고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려는 뜻에서 바위에 글자를 새긴 정석(丁石)과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이던 크고 넓적하 바위인 다조(茶竈), 바닷가의 돌을 주워 만든 작은 연못인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그리고 다산이 손수 바위틈의 수맥을 찾아 만들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맑은 물이 솟아난다는 '약천(藥泉)'이라 부르는 조그만 샘이 있는데, 이 모두를 일컬어 다산 4경(茶山四景)이라 부른다. 아쉽게도 이 모든 것이 전라남도 강진에 있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정갈한 낭만을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도록 이 곳 다산문화의 거리에 일부를 재현 연출했다./사진-이승준 기자

18세기 후반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당쟁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정치 참여로부터 소외됐던 근기(近畿) 지방의 남인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통치방식에 회의를 갖게 됐다.


그들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들이 존중하는 성리설과는 달리 선진유학에 기초한 새로운 개혁의 이론을 일찍부터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들의 학문적 경향을 ‘근기학파’라는 범주 안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정약용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갖고 태어났고, 소시적부터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를 접하게 됐다. 그가 태어난 양근(楊根: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땅 일대는 뒷날의 연구자들로부터 실학자로 불리게 된 일군의 학자들이 새로운 학풍을 형성해 가던 곳이었다. 그의 친인척들도 이곳의 학풍을 발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던 정재원(丁載遠)과 해남윤씨 사이에서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음사(蔭仕)로 진주목사를 지냈으나, 고조 이후 삼세(三世)가 포의(布衣: 벼슬이 없는 선비)로 세상을 떠났으니, 비록 양반이며 그 이전까지는 대대로 벼슬을 했지만, 그의 집안은 당시로서는 권세와 별로 가까운 처지가 아니었던 셈이다. 


사진-이승준 기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년)이 태어나서 살다간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의 조선 사회는 농경 사회에서 상공업 사회로 변화하는 시기로, 농경 사회에서 그 나름의 보편성과 합리성을 가진 철학 체계로 사상적 지주가 됐던 성리학은 시대 사상으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상공업 사회에 부응하는 기술 문명과 부국강병의 관심을 제고하는 북학 사상이 새로운 시대 사상으로 18세기 중반에 태동한 배경이다.


정약용은 자신의 사상적 기반인 성호학파(성호 이익이 중심이 된 중농학파)의 경학(經學)적 기초 위에 그 학파의 비판적이고 개혁적인 학문 풍토를 계승했다. 그는 한 걸음 더 전진해 노론 북학파의 북학 사상도 적극 수용함으로써 선배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전진적인 지식인상을 수립했다. 


또 토지의 공유와 균등 분배를 통한 경제적 평등의 실현을 기저로 하는 그의 경제 사상이나, 인정(仁政)과 덕치(德治)를 통한 민본주의적 왕도 정치를 중핵으로 삼는 그의 정치 사상은 기본적으로 선배 실학자들의 입장을 계승했다. 


하지만 정약용의 정치.경제 사상은 세부적인 면에서 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다산 정약용 선생 사당 전경/사진-이승준 기자

그의 균전론(均田論)은 사.농.공.상의 직업 차이나 개인 능력을 무시한 인구 비례의 토지 균등 분배 사상이 아니다. 직업 분화를 철저히 인식하고, 토지는 오직 농민에게만 점유돼야 하고 농민의 경작 능력에 따라 토지 점유와 소득 분배에 차등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정치 사상에서도 사(士)를 정치 담당 세력으로 인정하고, 학자인 독서 계급이 민본주의적 왕도 정치 내지 현인 정치(賢人政治)를 해야 한다고 한 점에서는 종래 사림의 주장과 다를 것은 크게 없지만, 통치권의 근거를 백성에서 찾음으로써 민권 사상을 이론화한 점에 그 독창성이 있다.


유교 경전의 해석이나 철학 사상의 근거가 되는 정약용의 경학 사상은 독자적 경지를 채척했다. 성리학 체계에서는 천리(天理)와 인륜(人倫)을 하나의 체계 속에 일원적으로 파악해 ‘천리를 밝혀 인심을 바로 잡는다(明天理 正人心)’고 했다. 정약용은 천리와 인륜 도덕을 완전히 분리했다. 


인간 문제는 어디까지나 인간 사회의 문제로 파악하고 천리와 분리함으로써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했고, 역사 인식 역시 독자적 영역을 개척했다. 신라 중심의 연구 경향에서 탈피해 최초로 백제사 연구에 주목하고, 백제 최초의 도읍지인 위례성의 위치는 직산(稷山)이 아니라 현재의 서울이라고 밝혔다. 


사진-이승준 기자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연구였다. 발해의 중심지는 요동이 아니라 백두산 동북쪽 연변 지방이라고 고증해 낸 것도 그의 실증주의적 학풍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정약용유적지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한다. 나라의 부패를 꾸짖던 선생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꼿꼿하고 검소한 그의 생활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생가 여유당, 이백 년 세월의 흐름 앞에 절로 고개 숙여지는 정약용 선생의 묘,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의 업적과 자취가 전시된 기념관과 정약용 선생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해 보는 문화관이 있다. 


정약용유적지 입구 '다산문화의 거리'에 정약용 선생의 얼이 느껴지도록 수원성 축조에 사용된 거중기 전시 및 동판에 선생이 집필하신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이 새겨져 있다. 기념관 내에 들어서면 정약용 선생의 일대기를 디오라마로 연출했고, 생가에는 당시의 생활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연출돼 있다. 생가 뒤 나지막한 언덕위에 정약용 선생과 부인(풍산 홍씨)의 합장묘가 있다.


# 정약용 생가-여유당(與猶堂)


정약용 선생의 묘에서 바라본 여유당/사진-이승준 기자

여유당/사진-이승준 기자정약용 선생의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 있다. 그 옛날에는 이곳을 소내(苕川) 또는 두릉(杜陵)이라고 했고 정약용 선생의 5대조부터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에 정약용 선생의 생가인 여유당이 고졸한 자태로 은근히 나그네 유혹하지만, 정작 발걸음을 재촉하게 되는 곳은 여유당의 오른편을 돌아 뒤편 동산의 정약용 선생의 묘소이다. 


여유당/사진-이승준 기자

정약용 선생은 여기서 세상을 떠났고 이 집 뒷산에 묻혔다. 모진 비바람에도 든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박한 護石의 보호아래 부인 풍산 홍씨와 함께 조용히 누워있는 정약용 선생은 여유당을 휘감고 도는 한강의 여유로운 흐름을 관망한다.


여유당/사진-이승준 기자

여유당/이승준 기자

여유당의 우물과 장독/사진-이승준 기자

# 문도사-사당 문도사(文度祠) - 문도(文度)는 다산 선생의 시호(諡號)


사당 문도사(文度祠) /사진-이승준 기자

사당 문도사(文度祠)  전경/사진-이승준 기자

사당 문도사의 정약용 선생 영정 /사진-이승준 기자# 기념관


다산기념관/사진-이승준 기자

기념관에는 정약용 선생의 친필 서한 간찰(簡札).산수도 등과 대표적 경세서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사본이 전시돼 있다. 특히 실물 크기의 4분의 1 과 2분의 1크기의 거중기와 녹로가 눈길을 끈다. 


다산기념관 내부/사진-이승준 기자

1997년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성(수원성)을 쌓을 때 역학적인 원리를 이용해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는 데 사용돼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줬던 거중기와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서 만든 일종의 크레인인 녹로는 바로 실학정신에 바탕한 정약용 선생의 설계로 제작된 기계이다.


다산기념관 내부/사진-이승준 기자

다산기념관 내부/사진-이승준 기자

다산기념관 내부/사진-이승준 기자

# 문화관


다산문화관/사진-이승준 기자

기념관 옆에 있는 문화관에는 정약용 선생의 인간적 고뇌와 삶의 철학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해 정약용 선생의 꿈, 새로운 학문의 세계로, 유배지에서 그리운 마현, 새로운 조선의 발견, 다산 근대의 길 등 5가지 주제를 가지고 그래픽 패널로 전시했고, 정약용 선생의 사상과 삶의 철학이 잘 드러나는 '다산의 삶'이라는 애니메이션 영상물이 자동으로 상영되고 있어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


도산문화관내부/사진-이승준 기자도산문화관내부/사진-이승준 기자

도산문화관내부/사진-이승준 기자

# 정약용 선생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한 정약용 선생의 묘는 경기도 기념물 제7호로 지정돼 있다. 


선생은 정조 13년(1789)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수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형조참의를 지내면서 규장작의 편찬사업에 참여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순조 원년(1801) 신유박해 때 유배된 후 다시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강진으로 옮겨 순조 18년(1818)까지 18년간의 귀양살이를 했다.


선생은 귀양살이 중에도 학문연구에 전념했고, 고향인 양주에 돌아와서도 여생을 오직 저술에 몰두해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정약용 선생 묘/사진-이승준 기자

정약용의 自撰墓誌銘 (자찬묘지명) 원문-集中本 (집중본)


此洌水 丁鏞之墓也。 本名曰若鏞, 字曰美庸, 又曰頌甫, 號曰俟菴。 堂號曰與猶, 取冬涉畏鄰之義也。 父諱載遠, 蔭仕至晉州牧使, 母淑人海南 尹氏, 以英宗壬午六月十六日, 生鏞于洌水之上馬峴之里。 時惟乾隆二十七年也。


丁氏本貫押海, 高麗之末, 居于白川, 本朝定鼎, 遂居漢陽。 始仕之祖, 承文校理子伋, 自玆繩承, 弘文館副提學壽崗·兵曹判書玉亨·議政府左贊成應斗·大司憲胤福·江原道觀察使好善·弘文館校理彦璧·兵曹參議時潤, 皆入玉堂。 自玆時否, 徙21)居馬峴, 三世皆以布衣終。 高祖諱道泰, 曾祖諱恒愼, 祖父諱志諧, 唯曾祖爲進士也。


鏞幼而穎悟, 頗知文字。 九歲有母之喪, 十歲始督課, 五年之間, 先考閒居不仕, 鏞得以是讀經史古文頗勤, 又以詩律見稱。


十五而娶, 適先考復仕, 爲戶曹佐郞, 僑居京內。 時李公 家煥以文學, 聲振一世, 姊夫李承薰, 又飭躬勵志, 皆祖述星湖 李先生【瀷】之學。 鏞得見其遺書, 欣然以學問爲意。


正宗元年丁酉, 先考出宰和順縣, 厥明年讀書東林寺。 庚子春, 先考移醴泉郡, 遂游晉州, 至醴泉, 讀書廢廡中。 壬寅秋, 栖奉恩寺, 習經義之科。 癸卯春, 爲經義進士, 游太學。 內降《中庸》講義八十餘條。 時鏞友李檗, 以博雅名, 與議條對。 理發·氣發, 檗主退溪之說, 鏞所對偶與栗谷 李文成【珥】所論合。 上覽訖, 亟稱之爲第一。 都承旨金尙集出語人曰: “丁某得褒諭如此, 必大振矣。”


甲辰夏, 從李檗舟下斗尾峽, 始聞西敎, 見一卷書。 然專治儷文, 習表箋詔制, 蒐輯累百卷, 太學月課旬試, 輒被高選, 賞賜書籍紙筆, 數賜對登筵如近臣, 固未暇馳心于物外也。


원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정약용이 자신의 일생을 정리한 묘지명으로 ‘집중본(集中本)’이다. ‘광중본(壙中本)’은 무덤에 넣을 목적으로 작성한 것이고, 집중본은 문집에 수록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광중본이 요약본이라면 집중본은 훨씬 자세하다. 자신의 회갑을 맞이할 때까지 삶의 역정을 정리하고 평생 주력한 학문적 성과의 핵심과 요지를 밝혀 놓았다.정약용의 自撰墓誌銘 (자찬묘지명)/사진-이승준 기자

사진-이승준 기자# 거중기


다산 정약용은 조선후기 실학의 완성자로 평가된다. 그는 실학에 관심을 가진 집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성리학만이 아니라 토목학과 건축학도 공부했다. 이러한 능력을 정조에게 인정받아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이전할 때 한강을 건너기 위한 배다리를 설계했고 정조의 명을 받아 화성 축성 계획에 참여했다. 


정약용은 기존에 있던 조선의 축성술을 총망라하고 중국와 일본 성곽의 장점을 참고했다. 더욱이 축성의 편리한 시공을 위해 거중기, 유형거 등 여러가지 기구들을 설계했는데, 기술자들의 안전과 효율성을 높임은 물론 축성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를 거뒀다. 


정약용이 저술한 '기중도설'에 거중기에 대해 그림과 함께 자세한 설명이  실려 있고 1794년 화성을 건설할 때 처음으로 사용해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명나라 때 중국에 온 선교사 겸 과학자 요한네스 테렌츠가 지은 '기기도설'이 참고가 됐다. 이밖에 화성 축성과 관련된 정약용의 글을 '성설', '옹성도설' 등이 있다.


전시모형은 축소규모로 제작됐다./사진-이승준 기자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