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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초수행궁이자 능행용 행궁인 '이천 행궁터' .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1-07-02 02:46:15
  • 수정 2024-03-10 09: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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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행궁의 부속건물이자 후원에 위치하였던 애련정의 모습/사진-박광준 기자 

[박광준 기자] 세종 때에 지어져서 헌종 때까지 사용됐던 행궁으로 만약에 남아있었다면 청주 초정행궁과 온양행궁과 같이 조선의 초수행궁으로 이름을 알렸을 행궁이다. 세종24년에 세워졌고, 이후 세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가 이곳을 다녀갔다.


세종24년 건설될 당시에는 행궁의 규모가 크지 않았을것으로 보이지만, 이후 행궁의 규모는 애련정 북쪽부터 이천초등학교 일대를 포함하는 거대한 행궁으로 변했다. 이후로 많은 왕들이 다녀갔고 구한 말까지도 존속했다.


행궁은 다른 초수행궁들처럼 탕실과 정전, 내행전으로 이뤄져 있었고 1970년대에 정비 당시 80대 할아버지의 증언으로 행궁의 전각들의 위치와 형태가 확인됐다. 


이천부지도(利川府地圖, 규10378), 조선후기 지방지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1907년 정미의병으로 일본군이 불을질러 행궁을 불태웠다. 이후로는 재건되거나 쓰이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행궁의 본궐이 있던 지역에 이천초등학교를 건설했고, 탕실이 있었던 지역의 일대를 공원화해 공원으로 쓰였고 지금까지 공원이 돼있다. 사실 이때는 이미 대한제국은 망국의 길로 가고있었고 행궁이 소실된 년도가 한일합병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이었던 1907년, 즉 3년 망국 바로 직전이라서 이천행궁을 재건할 여지는 대한제국 측에서도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본래의 이천행궁이 있던 자리는 초등학교로 변했고, 탕실이 있었던 부지는 1972년 온천공원을 조성케 됐었다. 이때 이 일대에 있었던 행궁의 탕실 초석들과 일부 남아있던 담장들을 모조리 없에고 행궁이 있던 부지에다가 공원으로 탈바꿈해 시민공원으로 만들었다. 


이천 행궁 표지석/사진-박광준 기자현재 행궁의 복원계획은 없다. 2002년 당시 설문조사를 통해서 높은 지지율을 보였던 이천행궁과 관아의 복원은, 이후 이천시의 부지활용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면서 타결을 보지 못하고 묻히고 말았다. 


특히 18년이 지나면서 시민의식 또한 변했고, 이천시에서 적극적으로 밀어 붙이지도 않는데다가 "현재 온양행궁에 비해 존재감도 떨어지는 이천행궁을 굳이 복원해야 하나?"라는 시민들의 인식이 행궁을 복원하거나 재현하려는 움직임이 없는 실정이다. 


이천 이천초등학교와 동쪽에 위치한 온천공원 주차장에서부터 잔디광장 일대가 모두 행궁과 관아터로 추정된다. 현재 추정하는 바로는 애련정 북쪽부터 계단식으로 행궁이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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