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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5] '조선고적도보'로 보는 경복궁(景福宮)'의 옛 모습
  • 이승준
  • 등록 2021-07-02 22:01:08
  • 수정 2024-03-23 01: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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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광화문(景福宮 光化門)전경과 육조거리/사진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이승준 기자] 경복궁은 사적 제117호로,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해 북궐(北闕)이라고도 불렸다. 조선왕조의 건립에 따라 창건돼 초기에 정궁으로 사용됐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조선 말기 고종 때 중건돼 잠시 궁궐로 이용됐다.


이성계가 왕이 돼 곧 도읍을 옮기기로 하고,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궁의 창건을 시작했고, 다음 해에 완성했다.


경복궁 광화문(景福宮 光化門)  측면/사진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당시 궁의 규모는 390여 칸으로 크지 않았다.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 5칸에 상하층 월대(月臺)와 행랑.근정문.천랑(穿廊).각루(角樓).강녕전(康寧殿) 7칸, 연생전(延生殿) 3칸, 경성전(慶成殿) 3칸, 왕의 평상시 집무처인 보평청(報平廳) 5칸 외에 상의원.중추원.삼군부(三軍府) 등이 마련됐다.


궁의 명칭은 '시경' 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두 자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경복궁 금천교인 영제교(永濟橋)/사진출처-두산백과 

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겨 궁을 비우게 됐으나, 제3대 태종 때 또 다시 환도해 정궁으로 이용됐다. 태종은 궁내에 경회루(慶會樓)를 다시 지었다. 연못을 넓게 파고 장대한 누각을 지어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사신을 접대토록 했고, 파낸 흙으로는 침전 뒤편에 아미산(蛾眉山)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세종은 이곳에 집현전을 두어 학문하는 신하들을 가까이에 뒀고, 경회루 남쪽에 시각을 알리는 보루각(報漏閣)을 세우고 궁 서북 모퉁이에 천문관측시설인 간의대(簡儀臺)를 마련했고, 강녕전 서쪽에는 흠경각(欽敬閣)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사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玉漏器)를 설치했였다.


경복궁 교태전 후정 아미산 온돌 연출/사진출처-연조의 공간구성과 전각 [燕朝-空間構成-殿閣] (한국건축사, 2006. 9. 15., 고려대학교출판부)

1553년에는 궁내에 불이 났는데 강녕전에서 불이 나 근정전 북쪽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됐다. 다음 해 강녕전 외에 교태전(交泰殿).연생전.흠경각.사정전(思政殿)을 복구했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궁은 전소됐다. 이때 창덕궁.창경궁 등도 모두 불에 타버려 난이 끝나고 왕이 환도했을 때 정릉동의 구(舊) 월산대군가(月山大君家)를 임시 어소(御所)로 정했다.


궁의 복구 문제는 왜란 직후부터 논의됐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선조는 환도한 뒤 경복궁에 가가(假家)라도 지을 것을 명했고, 1606년에는 궁궐영건도감(宮闕營建都監)을 설치하고 광화문과 근정전 등 주요건물만이라도 우선 지을 계획을 세웠으나, 일부 대신들이 ‘공사가 커서 1, 2년에 끝낼 수 없으므로 후에 일을 시작해야 한다’면서 만류하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경복궁 자경전- 청연루- 협경당/사진출처-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또 경복궁이 길(吉)하지 못하다는 의견도 있어서 결국 왜란 후 경복궁 대신에 창덕궁을 재건키에 이르렀다. 이것은 과거 경복궁에서 단종이 쫓겨난 일이 있고 중종 때에는 조광조(趙光祖)가 사정전 뜰에서 왕의 친국(親鞫)에 이어 사약을 받은 일 등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광해군도 한때 경복궁성을 수축케 하고 중건의 뜻을 보이기도 했으나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강력한 의지로 여느 궁궐의 규모나 격식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로 다시 세워지게 됐다. 그 규모는 7,225칸 반이고 후원에 지어진 전각은 융문당(隆文堂)을 포함해 256칸이고 궁성 담장의 길이는 1,765칸이었다. 궁이 완성되고 나서 1868년에 왕은 경복궁으로 옮겼다.


경복궁 집옥재(景福宮 集玉齋) 전면과 팔우정(八隅亭)/사진출처-문화재청 그러나 이때 조선왕조는 외국 열강들의 세력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1895년에는 궁 안에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은 이어(移御)한 지 27년째인 1896년에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겨,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됐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궁안의 전(殿)·당(堂).누각 등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방매(放賣)하고, 1917년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동행각.서행각.연길당(延吉堂).경성전.연생전.인지당(麟趾堂).흠경각.함원전(含元殿).만경전(萬慶殿).흥복전(興福殿) 등을 철거해 그 재목으로 창덕궁의 대조전.희정당 등을 지었다.


경복궁 향원정 전경/사진출처-문화재청 

궁전 안에는 겨우 근정전.사정전.수정전(修政殿).천추전(千秋殿).집옥재.경회루 등과 근정문.홍례문.신무문(神武門).동십자각 등이 남게 됐고 정문인 광화문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했다.


또한, 궁의 중심건물인 근정전 정면 앞에 매우 큰 석조건물인 총독부청사를 지어 근정전을 완전히 가려 버렸고, 또한 자선당 자리에도 석조건물이 들어서고 건청궁(乾淸宮) 자리에는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인멸시켰다.


경복궁 동남우루(십자각) 안쪽/사진 출처-경복궁건춘문[景福宮建春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1945년 광복 후 궁은 공원으로 개방되는 한편, 일인(日人)들이 지었던 총독부청사는 정부종합청사로 활용되다가, 1971년에 궁의 동북 담장 가까이에 지어진 목조기와건물 모양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에 들어있던 국립박물관이,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명칭을 고치면서 이 건물로 이건됐다. 구 총독부청사는 1995년 8.15광복 50주년을 맞아 철거됐고, 이 자리에 원래 있던 흥례문 권역이 2001년 10월 복원.낙성됐다.


한편, 일제에 의해 건물이 훼철되는 피해를 입은 경복궁을 복원하는 공사가 1991년부터 침전.동궁.흥례문.태원전.광화문 등 5개 권역으로 나눠, 20년에 걸쳐 5단계로 진행됐다. 이로써 고종 당시 지어진 건물의 40%가 복원되고,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가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로조 지어졌던 광화문도 원래의 모습을 갖게 됐다./다음호에 계속(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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