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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4] 자연과 조화 이룬 가장 한국적인 궁궐 ‘창덕궁’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06-14 14:20:35
  • 수정 2024-01-26 21: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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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세계유산)/사진-이승준 기자

[이승준 기자]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건립된 조선왕조의 왕궁으로, 처음에는 법궁(法宮)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離宮)으로 창건했다. 이후 임금들이 주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때 한양의 궁궐들이 모두 불탄 후에 경복궁은 그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재건되지 않고 1610년(광해 2)에 창덕궁이 재건된다. 그 후 창덕궁은 경복궁이 재건될 때까지 270여 년 동안 법궁으로 사용됐다. 


사진/이승준 기자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해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왕가의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창덕궁의 공간 구성은 경희궁과 경운궁 등 다른 궁궐의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시대에는 궁의 동쪽에 세워진 창경궁(昌慶宮)과 경계 없이 사용했고, 두 궁궐을 ‘동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또 남쪽에는 국가의 사당인 종묘(宗廟)가, 북쪽에는 왕실의 정원인 후원(後苑)이 붙어 있어서 조선 왕조 최대의 공간을 형성했다. 


사진/이승준 기자그러나 왕조의 상징이었던 궁궐은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소실과 재건을 거치면서 많은 영향을 가져왔고, 1991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이 시작돼 현재에 이르렀다. 또한 1997년 12월 6일에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궁궐이 됐다. 


창덕궁 탄생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조선 개국 후 규모가 큰 경복궁이 창간됐는데도 태종이 새로운 궁궐을 세운 까닭에 대해 태종은 경복궁의 형세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실제적인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 같다.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정적 정도전과 이복동생을 죽이고 왕 위에 오른 태종으로서는 그 피의 현장인 경복궁에 기거하는 것이 꺼려졌을 것이다. 창덕궁이 세워짐으로써 조선 왕조의 궁궐 체제는 법궁(法宮)-이궁(離宮)의 양궐 체제가 된다. 


순조 연간에 도화서에서 동궐(東闕)인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을 조감도 형태로 그린 궁궐 그림/고려대학교 소장본동궐도(東闕圖)는 국보 제249호로,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체 모습을 그린 가로 576cm, 세로 273cm의 큰 그림이다. 열여섯 폭의 비단에 동양화와 서양화의 기법을 모두 활용해 아름답게 채색한 이 그림은 1826년에서 1830년 사이에 궁중 화가인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뿐 아니라 다리와 담장 괴석까지 실제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고 각 건물의 이름도 기재해 궁궐 연구와 복원작업에 결정적인 자료가 됐다. 동궐이 가장 번성했던 시절을 기록한 그림으로 예전의 영화를 재현했다.  


# 규모와 품위 함께 갖춘,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 일원’


돈화문/사진-이승준 기자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건립됐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고,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췄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됐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다음 해인 1609년에 재건됐고, 보물 제383호로 지정됐다. 


예로부터 궁궐을 조성할 때에는 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명당수를 건너게 했다. 이 물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해주는 경계 역할을 하므로 금천(禁川)이라고 하고, 창덕궁의 금천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돈화문 동쪽 궐 밖으로 빠져 나간다. 1411년(태종 11) 금천에 다리를 놓았다. 비단처럼 아름다운 물이 흐르는 개울에 놓인 다리라 해 ‘금천교(錦川橋)라 불렀고,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서 2012년 보물 제1762호로 지정됐다. 


진선문(진선문 앞에는 금천교가 있다)/사진-이승준 기자돈화문은 영조 재위 4년째인 1728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 진압된 후, 돈화문 2층 돈화문루에서 헌괵례를 받았다. 헌괵례는 싸움에 나간 장수가 적장의 머리를 왕 앞에 바치는 의식을 말한다. 이때 영조는 서울에 사는 노인들을 돈화문 앞에 초청해 난의 원인이 당쟁에 있음을 지적하고 여기에 가담한 백성들에겐 중죄를 주지 않을 것이라 했다. 돈화문 광장은 이처럼 대민광장이기도 했다. 


금천교를 지나면 진선문이 있다. 이 문에는 신문고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경국대전’에는 ‘원통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는 소장을 내되, 그래도 억울하다면 신문고를 두드려라’라고 신문고 치는 절차를 밝혀 놓았다. 일반 백성들이 이러한 절차를 다 밟기도 어려웠거니와,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돈화문을 통과해 신문고를 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두드리기 힘든 신문고는 포기하지 않고 왕의 행차에 뛰어들어 어려움을 호소하는 격쟁을 하는 백성들이 많아져 조정의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던 곳 ‘인정전 일원’


인정전/사진-이승준 기자인정전 내부/사진-이승준 기자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으로,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뒤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전각으로 세워져 당당해 보이는데,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도 달지 않아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을 볼 수 있다. 바닥에는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돼 있다. 전등, 커튼, 유리 창문 등과 함께 1908년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인정문 밖 외행각(外行閣)에는 호위청과 상서원 등 여러 관청들을 뒀다. 


인정문/사진-이승준 기자1405년(태종 5)에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됐으나, 1418년(태종 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 2)에 재건, 1803년(순조 3)에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숙정문/사진-이승준 기자박자청은 창덕궁 공사로 내시에서 1품 벼슬에까지 올랐다. 인정전 외행각마당은 서쪽 진선문 쪽이 넓고 동쪽 숙장문 쪽이 좁은 사다리꼴로,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은 이 마당이 반듯하지 못하다 해 박자청을 하옥시킨 일도 있었다. 그러나 숙장문 바로 뒤에 산맥이 있어 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사다리꼴로 만든 것이었다. 고려 말 내시 출신인 박자청은  조선 개국 후에 궁궐 문을 굳게 지킨 일로 태조의 눈에 들어 왕을 경호하다가 창덕궁의 건축 감독을 맡게 됐다. 창덕궁 뿐 아니라 제릉, 건원릉, 경복궁 수리, 청계천 준설, 경희루, 무악 이궁, 헌릉 등 많은 공사를 훌륭하게 수행했고, 이후 공조판서, 우군도총제부판사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 임금의 집무실로 쓰인 곳 ‘선정전 일원’


선정전/사진-이승준 기자

선정전 내부/사진-이승준 기자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지형에 맞춰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세미나격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선정문/사진-이승준 기자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렀는데, 1461년(세조 7)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뀌었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 화재로 소실됐다가. 1647년(인조 25)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했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을 비서실, 부속실로 이용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뒤편의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을 옮겨 가면서 순조 이후에는 이곳을 혼전(魂殿,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죽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현재 보물 제814호로 지정돼 있다. 


사진/이승준 기자선정전은 원래 왕의 공간이지만 왕비가 사용한 일도 있다. 성종 때 공혜왕후 한씨가 노인을 공경하는 풍습을 권장키 위해 양로연을 이곳에서 베풀었다. 양로연은 80세 이상의 노인 전원을 대상으로 매년 9월에 열렸다. 성종의 계비 정형왕후 윤씨는 이곳에서 친히 누에치는 시범을 보였고, 중종 때는 내외명부의 하례를 받기도 했다. 사관들은 왕비가 편전인 선정전을 사용한 것은 잘못이라는 비판을 남겼다. 


# 침전에서 편전으로 바뀌어 사용된 곳 ‘희정당’



희정당 외경(공사관계로 자료사진 활용)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 2)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이었던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했다. 


희정당 거실,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헐어다가 이전 중건한 건물이나 강녕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요란하고 생경한 서양식 개조 흔적만이 남아 있다./자료사진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년에 복구하면서 경복궁에 있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다. ‘동궐도’에 그려진 원래의 희정당은 여러 개의 돌기둥 위에 세운 아담한 집이었고, 마당에 연못도 있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이 모습과 완전히 다르고, 원래의 강녕전과도 다르다. 재건된 희정당 내부는 쪽마루와 카펫, 유리 창문, 천장에 샹들리에 등을 설치해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보물 제815호로 지정됐다. 


# 비극적 역사가 담겨 있는 침전 ‘대조전 일원’


대조전/사진-이승준 기자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寢殿)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으로,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건물이 에워싸고 있다. 그 가운데 홍복헌(洪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됐던 비극의 현장이다. 1917년 불타 없어진 터에 1920년에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어 현재의 대조전이 됐다. 


흥복헌/사진이승준 기자경훈각/사진-이승준 기자이건하면서 창덕궁의 상황에 맞춰 재구성했다.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 옆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 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했다. 원래 궁궐의 복합적인 구성을 잘 보여 주는 거의 유일한 부분이다.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했고, 왕실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보물 제816호. 


# 세자의 일상이 숨쉬던 동궁 ‘성정각 일원’


사진/이승준 기자성정각은 세자의 교육장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내의원으로 쓰기도 했다. 성정각은 단층이지만 동쪽에 직각으로 꺾인 2층의 누((樓)가 붙어 있어 독특한 모습이다. 누각에는 희우루(喜雨樓), 보춘정(報春亭)이라는 편액들이 걸려 있다. 성정각 뒤편에 있는 관물헌(觀物軒)은 왕이 자주 머물면서 독서와 접전을 했던 곳으로, 현재는 ‘집희(緝熙)’라는 현판이 남아 있다. 


사진/이승준 기자현재 성정각과 낙선재 사이, 후원으로 넘어가는 넓은 길은, 원래 높은 월대 위에 당당하게 자리한 중희당(重熙堂)이 있었던 곳으로, 이 일대가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東宮)이었다. 동궁일대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중희당은 1891년(고종 28)에 없어졌고, 중희당과 연결된 칠분서(七分序), 6각 누각인 삼삼와(三三窩)와 승화루(承華樓)등이 남아 있다. 이들이 서로 복도로 연결해 서고와 도서실로 사용했다. 


 # 왕과 왕실을 보좌하는 궐내 관청 ‘궐내각사’


규장각/사진-이승준 기자관청은 대부분 궐 바깥에 있었지만,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키 위해 특별히 궁궐 안에 세운 관청들을 궐내각사라고 불렀다. 인정전 서쪽 지역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금천을 경계로 동편에 약방, 옥당(홍문관), 예문관이, 서편에 내각(규장각), 봉모당(奉謨堂), 대유재(大酉齋), 소유재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근위 관청이며, 여러 부서가 밀집돼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됐다. 


검서청/사진-이승준 기자일제강점기 때 규장각, 대유재, 소유재는 단순한 도서관으로 변했다가, 그나마도 소장 도서들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옮기면서 규장각과 봉모당 등 모든 전각들이 헐리고 도로와 잔디밭으로 변해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2000-2004년에 걸쳐 복원됐다. 


홍문관은 ’옥당(玉堂)’이라는 현판이 걸린 건물과 주변 행각으로 이뤄져 있다. 건물구조는 대체로 국정을 논하는 중요한 기관답게 폐쇄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다른 궐내각사 건물들과는 쪽문으로 연결돼 있지 않고, 정문을 통해서만 옥당으로 출입할 수 있다.약방/사진-이승준 기자규장각은 다른 이름으로 내각(內閣) 또는 이문원이라고 했다. 정조 즉위 초에 역대 왕들의 시문과 글씨를 보관하는 왕실 자료실로 지었다. 처음에는 후원에 2층 누각을 지었으나 너무 후미져서 불편해 1781년(정조 5)에 이 곳으로 옮겼다. 왕권확립, 개혁정치, 문예부흥을 표방한 정조가 특별한 의지와 관심을 쏟은 곳이기에 청사 중에서 가장 넓은 옛 도총부 건물을 차지했다. 규장각의 실무자는 문예와 학식이 뛰어난 서얼 출신들을 주로 임명해 관직의 길을 열어줬다. 이덕무와 같은 뛰어난 실학자들이 여기서 배출됐다. 


# 왕실의 제례를 거행하던 곳 ‘구 선원전 일원’


선원전/사진-이승준 기자진설청/사진-이승준 기자선원전은 역대 왕들의 초상호인 어진(御眞)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곳으로, 1656년(효종 7)에 경덕궁(慶德宮)의 경화당을 옮겨 지어 창덕궁 선원전으로 삼았으나, 1921년에 신 선원전을 후원 깊속한 곳에 건립해 어진을 옮겨 가면서 이 일대는 폐허가 됐다. 선원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으나 부속건물들은 이때 없어졌다가 2005년 복원됐다. 


양지당/사진-이승준 기자 

선원전은 36칸 규모이고, 앞면 좌우로 진설청(陳設廳)을 덧붙여서 제사 의례에 사용했다. 동쪽에 있는 양지당(養志堂)은 왕이 제사 전날 머무르던 어재실이고, 선원전 뒤편에 있는 의풍각(儀豊閣)은 제사용 그릇과 도구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일제강점기에 신축한 것으로 전한다. 구 선원전은 보물 제817호. 


# 헌종의 검소한 면모가 느껴지는 곳 ‘낙선재 일원’


낙선재/사진-이승준 기자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아 1847년(헌종 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뒀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고,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다. 


수강재/사진-이승준 기자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고, 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종효왕후가 1966년까지 기거했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했다. 이 낙선재는 2012년 보물 제1764호로 지정됐다. 


석복현/사진-이승준 존경하는 할머니 대왕대비와 사랑하는 경빈을 위해 지음 집답게 세 채의 집 뒤에는 각각 후원이 딸려 있다. 낙선재 뒤에는 육각형 정자인 평원루(平遠樓, 현재는 상량정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음), 석복현 뒤에는 한정당(閒靜堂)이, 수강재 뒤에는 취운정(翠雲亭)이 남아 있다. 특히 낙선재 후원은 서쪽 승화루 정원과 연결되는데, 그 사이 담장에 특별히 원형의 만월문(滿月門)을 만들었다. 건물과 후원 사이에는 작은 석축들을 계단식으로 쌓아 화초를 심었고, 그 사이사이에 세련된 굴뚝과 괴석들을 배열했다. 궁궐의 품격과 여인의 공각 특유의 아기자기함이 어우러진 대표적인 정원이다. 


상량정/사진-이승준 기자 헌종은 첫 번째 왕비 효현왕후 김씨가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이듬해 다시 왕비를 간택했다. 전례 없이 본인이 직접 간택에 참여했다. 이때 삼간택에 남은 세 사람 중 헌종은 경빈 김씨를 마음에 뒀으나, 결정권은 대왕대비에게 있었으므로 효정왕후 홍씨가 계비로 간택된다. 이로부터 3년 뒤 왕비가 있는데도 생산 가능성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새로 맞은 후궁이 경빈 김씨이다.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후궁이 된 경빈은 헌종의 지극한 사랑으로 왕비와 다름 없는 대접을 받았다. 석복헌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한정당/자료사진 특히 헌종은 그의 어머니 신정왕후의 평가대로 ‘낮에는 물론 깊은 밤에도 손에서 책을 놓치 않았고, 옛 분들의 서첩을 매우 사랑했다’. 낙선재에는 온갖 진귀한 서적들이 가득했다. 헌종의 도서 목록인 ‘승화루서목’에는 4.555점이 기록돼 있는데, 그 가운데 서화가 918점이나 됐다. 서화에 대한 그의 지극한 관심을 말해 주듯 낙선재 현판은 청나라 금석학자 섭지선의 글씨이고, 평원루 현판은 옹수곤의 글씨이다. 이들은 모두 추사 김정희의 친교가 있었던 청나라 대가 들이다./창덕궁 편<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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