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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3] 자연과 조화 이룬 가장 한국적인 궁궐 ‘창덕궁 후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06-10 13:13:45
  • 수정 2024-01-26 21:4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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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승준 기자# 자연 지형을 살려 만든 왕실의 휴식처


태종이 창덕궁을 창건할 당시 조성한 후원은 성종 대에 건립된 창경궁까지 그 영역이 확장됐다. 이들 궁궐이 다른 궁궐보다 특히 왕실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은 넓고 아름다운 후원 때문일 것이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고 후원이 훼손돼 광해군이 창덕궁과 함께 1610년(광해 2)에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인조, 숙종, 정조, 순조 등 여러 왕들이 개수하고 증축해 현재의 모습이 됐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아름다운 정자를 만들었다. 약간의 인위적인 손질을 더해 짜연을 더 아름답게 완성한 절묘한 솜씨이다. 


사진-이승준 기자4개의 골짜기에는 각각 부용지(芙蓉池), 애련지(愛蓮池), 관람지(觀纜池), 옥류천(玉流川) 영역이 펼쳐진다. 창덕궁 후원으로 들어갈수록 크고 개방된 곳에서 작고 깊숙한 곳으로, 인공적인 곳에서 자연적인 곳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면서 뒷산 응봉에 이어진다. 


서쪽 깊숙한 숲 속은 대보단이나 신 선원전 같은 제사 시설이 있는 신성한 곳이다. 세계 대부분의 궁궐 정원은 보고 즐기기 위한 관람용이어서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대한 경관이 펼쳐지는 반면, 창덕궁 후원은 작은 연못과 정자를 찾아 여러 능선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면서 온몸으로 체험해야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창덕궁 뽕나무/사진-이승준 기자창덕궁 후원에는 특별히 붙여진 고유한 이름이 없다. 한국의 전통 정원은 건물의 앞을 비워 두고 뒤편에 만들었다. 창덕궁도 그 예를 따라 궁궐 뒤편에 정원을 만들고 ‘후원(後苑)이라 불렀다. 궁궐 안에 있다해 ’내원(內苑)‘,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어서 ’금원(禁苑)‘이라 부르기도 했다. 구한말에 궁 내부 관제를 개정하면서 후원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비원(秘苑)‘을 두었는데, 1903년부터 ’비원(秘苑)‘이라는 명칭이 기록에 등장한다. 비원이라는 명칭이 일반인에게 익숙해진 것은 금원이었던 이곳을 일반인에게 공개하면서부터일 것이다. 오늘날에도 창덕궁 후원이 비원으로 불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바로 이 때문이다. 


후원은 왕가의 휴식과 산책을 위한 곳이지만, 여러 가지 다른 용도로도 사용했다. 자연 풍광을 느끼면서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는 것은 물론이요, 과거시험을 비롯한 갖가지 야외행사가 이곳에서 열렸다. 조선 초기에는 왕이 참관하는 군사훈련이 자주 실시됐고, 활쏘기 행사도 열렸다. 연못에서 낚시를 하거나 배를 띄우기도 하고 꽃구경을 했다. 대비를 모시는 잔치, 종친이나 신하를 위로하는 잔치 등 임금이 주관하는 잔치도 자주 열렸다. 또한 왕은 이곳에 곡식을 심어 농사를 직접 체험하고, 왕비는 양잠을 직접 시행하는 친잠(親蠶)이라는 행사를 열었다.   


# 휴식과 학문적 용도로 쓰인 아름다운 건물들 ‘부용지와 주합루(芙蓉池.宙合樓)


부용지와 주합루(芙蓉池.宙合樓)/사진-이승준 기자이곳은 후원의 첫 번째 중심 정원으로 휴식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300평(약 1000m2) 넓이의 사각형 연못인 부용지를 중심으로 여러 건물을 지었다. 주합루 일원의 규장각(奎章閣)과 서향각(書香閣) 등은 왕실 도서관으로 사용했고, 영화당(暎化堂)에서는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영화당은 동쪽으로 춘당대 마당을, 서쪽으로 부용지를 마주하면서 앞뒤에 툇마루를 둔 특이한 건물이다. 


부용정/사진=이승준 기자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의 부용정은 연못에 피어 있는 한송이 꽃의 형상으로 2012년 보물 제1763호로 지정됐다. 행사가 치러지던 영화당은 연못에 면해 있고, 한문을 연마하던 주합루는 높은 곳에서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다. 주합루도 2012년 보물 제1769호로 자정됐다. 하나하나의 건물도 각각 특색 있고 아름답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풍경이 되는 절묘한 경관이다. 현재는 어수문을 중심으로 생울타리인 취병을 재현해 지역을 구분하고 있다. 


사정기비각/사진-이승준 기자주합루는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 창건한 2층 누각이다. 아래층에는 왕실 직속 도서관인 규장각을, 위층에는 열람실 겸 누마루를 만들었다. ‘규장각’이란 ‘문장을 담당하는 하늘의 별인 규수(奎宿)가 빛나는 집’이란 뜻이고, ‘주합루’란 ‘천지 우주와 통하는 집’이란 듯이다.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주합루로 오르는 정문이 ‘어수문’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는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긴 문으로, 정조의 민본정치 철학을 보여 준다. 큰 문 하나와 좌우로 작은 문 두 개로 나눠진 모습도 독특하다.  


영화당/사진-이승준 기자조선의 왕들은 우리 민족의 주요 무술인 활쏘기를 사랑해 후원에서 활쏘기를 즐겼다. 태조 이성계는 신궁이라 할 정도로 활쏘기에 능했고, 세조도 활쏘기가 뛰어나 ‘태조의 환생’이라ss 찬사를 받았다. 영조는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정곡을 명중시키는 기량을 보였다. 문예뿐 아니라 무술에도 능했던 정조 도한 활솜씨가 대단했다. 50발 중 49발을 명중시킨 후 ‘무엇이든 가득 차면 못쓰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나머지 한 발을 일부러 빗나가게 쏘았다는 놀라운 일화가 ‘정조실록’에 남아 있다. 


희우정/3D기법으로 촬영한 동영상 캡처:문화재청  

천석정/3D기법으로 촬영한 동영상 캡처 :문화재청 

# 군자의 성품을 닮은 경치 ‘애련지와 의두합(愛蓮池.倚斗閤)’


애련정/사진-이승준 기자1692년(숙종 18)에 연못 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섬은 없고정자는 연못 북쪽 끝에 걸쳐 있다. 연꽃을 특히 좋아했던 숙종이 이 정자에 ‘애련((愛蓮)‘이라는 이름을 붙여, 연못은 애련지가 됐다. 숙종은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새 정자의 이름을 지은 까닭을 밝혀 놓았다. 


불로문/사진-이승준 기자애련지 서쪽 연경당 사이에 또 하나의 연못이 있는데, 원래 이곳에 어수당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1827년(순조 27) 효명세자는 애련지 남쪽에 의두합을 비롯한 몇 개의 건물을 짓고 담장을 쌓았다. 현재 ‘기오헌(奇傲軒)이라는 현판이 붙은 의두합은 8칸의 단출한 서재로, 단청도 없는 매우 소박한 건물이다. 바로 옆의 운경거(韻磬居)로 추정되는 건물은 궐 안에서 가장 작은 한 칸 반짜리 건물이다. 


의두합/3D기법으로 촬영한 동영상 캡처 :문화재청 지금은 사라진 어수당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1623년 인조반정 당시 광해군의 비 유씨는 반정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궁녀들과 밤에 몰래 어수당에 들어가 숨어 있었다. 이틀이 지나도록 밖에서 아무런 소식이 없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한 유씨는 보향이라는 궁녀를 시켜 자신이 여기 있음을 알렸다. 보향이 반군 대장에게 “이 일이 의거라고 하면서 어찌 전왕의 비를 굶겨 죽이려 하오?”라고 하자, 대장이 이를 인조에게 보고해 유씨에게 음식을 후하게 차려 주었다고 한다. 


# 사대부 살림집을 본든 조선 후기 접견실 ‘연경당(演慶堂)’


연경당/공사 중으로 인해 자료사진 대체:문화재청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1828년((순조 28)경에 창건했다.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이 1865년경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대부 살림집을 본떠 왕의 사랑방과 안채가 분리돼 있지만 내부는 연결돼  있는 점도 유사하다. 그러나 일반 민가가 99ㅋ칸으로 규모가 제한된 데 비해, 연경당은 120여 칸이어서 차이가 난다. 


선향재 측면/공사 중으로 인해 자료사진 대체:문화재청  서재인 선향재(善香齋)는 청나라풍 벽돌을 사용했고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을 설치해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후원 높은 곳에 있는 농수정(濃繡亭)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안채 뒤편에는 음식을 준비하던 반빈간이 있다. 고종 이후 연경당은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등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됐다. 연경당은 2012년 보물 제1770호로 지정됐다. 


농수정/공사 중으로 인해 자료사진 대체:문화재청  

효명세자는 어머니 순원왕후의 40세를 기념해 이곳에서 진작례(進爵禮)를 열었다. 진작례란 왕과 왕비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면서 가무를 공연하던 행사를 말한다. 효명세자는 이를 왕궝강화책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창건 당시 연경당은 ‘ㄷ’자형 건물 한 채로 남쪽 앞이 터지고, 동쪽에 긴 ‘-’자형 부속건물 두 채가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이 때문에 창건 당시의 연경당을 연희 공간으로 해석하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안마당이 무대가 되고 이를 감싼 ‘ㄷ’자 건물을 객석으로, 동쪽 부속채는 출연 대기장으로 이용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이 있는 ‘존덕정(尊德亭) 일원’


승재정/사진-이승준 기자이 일대는 후원 가운데 가장 늦게 갖춰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모습은 네모나거나 둥근 3개의 작은 연못들이 있었는데, 1900년대 이후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관람지라고 부른다. 연못을 중심으로 겹지붕의 육각형 정자인 존덕정, 부채꼴 형태의 관람정(觀纜亭), 서쪽 언덕 위에 위치한 길쭉한 맞배지붕의 폄우사(砭愚謝), 관람정 맞은편의 승재정(勝在亭)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을 세웠다. 


펌우사/사진-이승준 기자폄우사는 원래 부속채가 딸린 ‘ㄱ’자 모양이었으나 지금은 부속채가 없어져 단출한 모습이고, 숲 속에 자리 잡은 승재정은 사모지붕의 날렵한 모습이다. 1644년(인조 22)에 세워진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관람정과 승재정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존덕정/사진-이승준 기자 존덕정은 1644년(인조 22)에 지어진 이 건물은 처음에는 육면정이라고 부르다가 존덕정으로 바뀌었다. 이 건물과 이어진 다리 남쪽에 시간을 재는 일영대(日影臺)가 있었다고 한다. 존덕정은 본 건물을 짓고 그 처마에 잇대어 지붕을 따로 만들어 지붕이 두 개다. 바깥 지붕을 받치는 기둥은 하나를 세울 자리에 가는 기둥 세 개를 세워 이채롭다. 존덕정 천장 중앙에 그려진 쌍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그림은 왕권의 지엄함을 상징한다.


관람정/사진-이승준 기자존덕정 안 북쪽 지붕 아래에는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 쓰인 나무판이 걸려 있다. 정조가 재이 22년((1798년)에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 세상의 모든시냇물이 품고 있는 밝은 달의 주인공)’이라는 호(號)를 스스로 지어 부르고, 그 서문을 새겨 존덕정에 걸어 놓은 것이다. 그 요지는 ‘뭇 개울들이 달을 받아 빛나지만 달은 오직 하나이다. 내가 바로 그 달이요 너희들은 개울이니 내 뜻대로 움직이는 태극, 음양, 오행의 이치에 합당하다’라는 것으로 신하들에게 강력하게 충성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평생 왕권강화와 개혁정치를 위해 노력했던 정조의 준엄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 다양한 각도에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 ‘옥류천(玉流川) 일원’


취한정/사진-이승준 기자옥류천은 후원 북쪽 가장 깊은 골짜기에 흐른다. 1636년(인조 14)에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깍아 내고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글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었고, 곡선형의 수로를 따라서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벌이기도 했다.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이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이다. 


소요정/사진-이승준 기자소요정(消搖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취한정(翠寒亭), 청의정(淸猗亭) 등 작은 규모의 정자를 곳곳에 세워, 어느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는 정원을 이뤘다.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이다. ‘동궐도’에는 16채의 초가가 보이는데 지금은 청의정만 궁궐 안의 유일한 초가가 남아 있다. 


숙종의 오언절구 시와 인조의 '玉流川' 어필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은 353년 중국 동진 소흥(현 샤오싱) 지방의 난정(蘭亭)에 당대 명필 왕희지를 비롯한 명사 41명이 모였다. 난정 밑에 굽이치는 물길을 만들어 술잔을 띄워 보내면, 자기 앞에 술잔을 받아들고 시를 지어 발표했다. 다음 잔이 올 때까지  발표하지 못하면 벌주로 술 석잔을 마셔야 했다. 여기서 나온 시를 모은 것이 유명한 ‘난정집서’이다. 이 놀이를 ‘유상곡수연’이라 해 그때부터 상류층의 유희로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태극정/사진-이승준 기자
청의정/사진-이승준 기자 정사에 몰두하면  침식을 잃을 정도였다는 정조도 가끔은 후원에 와서 청취를 즐겼다. 특히 농산정을 좋아해 재숙(齋宿)을 하기도 했고, 화성 행차 준비를 이곳에서 하기도 했다. 화성은 정조가 은퇴 후에 어머니와 함께 살 행궁(行宮)으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에서 가까운 곳에 건설한 도시였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회갑을 기념해 화성으로 행차를 준비할 때, 창덕궁 후원에서 혜경궁이 타고 갈 가마를 메는 연습 등을 한 후 농산정에서 신하들에게 음식을 대접했다고 한다. 


#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셨던 곳 ‘신 선원전(新璿源殿) 일원’


의효전 전경/자료사진이곳에는 원래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준 명나라 신종(神宗)을 제사 지내기 위해 설치한 대보단(大報壇)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대보단을 철거하고 새로운 선원전을 지어 구 선원전에 모셨던 어진들을 옮겨 왔다. 이처럼 후원 깊숙한 곳으로 선원전을 이전한 까닭은 중국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조선 왕실의 상징성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보인다. 


부속건물인 의효전(懿孝殿)은 원래 경복궁의 문경전을 덕수궁으로 옮겼다가 다시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태조부터 순종까지 12명의 어진이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했다가 실수로 불타 없어졌다.


몽답정/자료사진현재 신 선원전 안에는 두 개의 정자가 있다. 이들은 원래 바깥 영역에 속한다, 후원 북서 쪽경계에 훈련원 군영이던 북영(北營)이 있었는데, 1759년 훈련대장 김성응이 군영의 누각으로몽답정(夢踏亭)을 지었다. 군사용 정자답게 규모가 크고 당당했다. 북쪽 언덕에 있는 괘궁정(掛弓亭)은 군영 안의 활터를 내려다보던 정자이다. ‘괘궁’은 ‘활을 걸다’라는 뜻이다. 그 이름처럼 활쏘기를 감상하던 정자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괘궁정 바로 뒤편에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중앙고등학교가 있다. 


괘궁정/자료사진정조는 규장각의 여러 신하들에게도 활쏘기를 시켜 문무를 겸비한 재목으로 키우려했다. 정약용이 규장각에 근무하던 1791(정조 15) 북영에서 활쏘기를 하는데 영 신통치 않았다. 평상시에는 활을 제대로 못 쏘면 벌주를 받았지만, 정조는 이것이 벌이 아니라 상이라면서 북영에 정약용을 잡아놓고 5발을 쏠 때마다 1발씩 맞혀야 풀어주겠다고 했다. 정약용은 활을 망가뜨리고 손이 부르트고 말 타는 법이 서툴러 보는 사람들이 크게 웃을 정도였으나, 며칠 지나자 능숙해지고 열흘이 지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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