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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의 공연산책 345] 서울시극단, 고선웅 각색/연출 '욘 John'
  • 박정기 자문위원
  • 등록 2024-04-14 17:3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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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박정기의 공연산책 서울시극단의 헨리크 입센 작 김미혜 역 고선웅 각색 연출의 욘 John을 관람했다,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John Gabriel Borkman)은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1896년에 쓴 희곡이다.


젊은 시절 부와 명예만을 좇았던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은 사업에 실패한 뒤 스스로를 다락방에 유폐하고 두문불출한다. 그를 각성시킨 건 아들 에르하르트다. 에르하르트가 자신의 삶을 찾겠다고 선언하고 떠난 뒤 다락방을 탈출한 보르크만은 자신의 꿈과 이상이 묻힌, 눈보라치는 숲으로 향한다.


에드바르드 뭉크는 작품의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세계관에 매료되어 ‘밤의 방랑자’라는 제목을 붙인 자화상에서 자신을 보르크만과 동일시하기도 했다.


광부의 아들이었던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은 사업적으로 승승장구하다 불미스런 사건에 휘말려 직위를 잃고 수감된다. 출옥 후에는 다락방에서 은둔하며 수감 생활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이어 간다. 밤늦도록 다락방을 어슬렁대는 그의 발소리가 집 안 전체를 죽음의 분위기로 몰아넣는다. 입센은 제한된 공간에서 과거의 영광에 갇혀 지내는 보르크만의 현실을 우회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 이면엔 철저한 고독 속에서 글쓰기와 상상의 유희에 몰두했던 작가 자신의 모습을 검춰 두었다.


보르크만의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에르하르트는 죽음의 분위기가 지배하는 집을 벗어나 삶에 활력을 찾고자 한다. 명예 회복을 위해 아들을 이용하려는 어머니(군힐), 조카에게서 실패한 사랑을 보상받고 싶어 하는 이모(엘라), 아들에게 힘의 위계를 각인시키려는 아버지(보르크만)는 에르하르트의 젊음과 열정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에르하르트를 자기 곁에 두려는 세 사람의 경쟁은 점차 치열해지지만 누구도 자신의 삶을 살겠다는 에르하르트의 의지를 꺾지 못한다. 에르하르트의 도전은 보르크만을 각성시키며, 집 전체에 무겁게 내리깔린 죽음의 분위기에도 균열을 일으킨다.


입센은 후기 작품에서 주로 삶과 예술에 대한 성찰과 고민을 드러낸다. 거기에는 예외 없이 젊은 시절 빛나는 성취를 이루었지만 점점 쇠락해 가는 만년의 예술가, 열정과 패기로 상기된 청년이 함께 등장한다. 신구의 대립과 갈등은 빛나는 이상과 예술, 그렇지 못한 삶 사이의 괴리를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과 '건축가 솔네스'는 많이 닮았다. 만년의 예술가는 이제 절대 천진하게 이상을 좇고 순수하게 예술에 심취했던 눈부신 한때로 돌아갈 수 없다. 입센은 그걸 잘 알았고, 거의 모든 작품에서 이런 비관론과 염세주의를 표출했다.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은 그중에서도 특히 입센의 세계관이 현저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은 1897년 1월 10일 핀란드 헬싱키의 수오말라이엔 테아테리(Suomalaien Teatteri)와 스웨덴의 스벤스카 테아테른(Svenska Teatern)에서 초연되었다. 이후 1897년 한 해 동안 유럽 각지에서 공연이 이어졌다. 1월 25일엔 노르웨이 크리스티아니아에서, 그리고 1월 31일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대중과 만났다.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트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공연되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따금 검열의 대상이 되곤 했다.


오늘날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은 입센의 후기 희곡 중에서도 비교적 꾸준히 무대에 오르는 작품으로 분류된다. 또한 유럽과 미국에서는 그 역사적.사회적 시의성과 관련해 공연 기간 내내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번 한국에서의 공연은 원작에 충실한 김미혜 교수의 번역과 최신 연구 결과가 반영된 전문적이고 심층적인 해설을 통해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을 본격적으로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


김미혜 교수는 고려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연극학 박사학위를 받은 김 명예교수는 그동안 학자로서 연극 관련 전문 서적을 20권 넘게 출판했다. 또한 국제극예술협회(I.T.I.) 한국본부 사무국장과 한국연극학회 회장을 역임하는 한편 연극 현장에서 브레히트를 비롯한 여러 극작가의 희곡을 번역하는 한편 드라마터그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베를린에서 입센 국제 학술세미나의 충격을 안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영어와 독일어로 쓰인 입센 자료를 모으는 한편 노르웨이어 공부를 시작했다. 


입센 희곡에 나오는 인명과 지명 등 고유명사나 대사의 뉘앙스를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노르웨이어를 아는 것이 필요해서다. 이와 함께 학술 지원 또는 사비로 노르웨이를 4차례 다녀오는 등 노르웨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그리고 입센 공부를 시작한 지 4년 만인 2010년 국내 첫 입센 연구서 ‘모던 연극의 초석 헨리크 입센’을 출간했다. 입센의 삶과 작품세계를 담은 이 책은 국내 연극계에서 입센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고선웅은 현재 한국 공연계가 가장 사랑하는 극작가 겸 연출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쓰고 연출한 작품(각색 포함)이 서울에서만 무려 10여편 올라갔다. 신작이 4편이고, 재공연도 7편이나 된다. 남산예술센터의 연극 ‘푸르른 날에’와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가 각각 재공연됐다. 신시컴퍼니가 신작 뮤지컬 ‘아리랑'을 선보이고 있으며, 그가 이끄는 극공작소 마방진은 극단 창립 20주년을 맞아 연극 ‘홍도와 ‘강철왕을 공연했다. 그 뿐 아니라 국립극단에서도 연극 ‘조씨고아를 여러차례 무대에 올렸다.


광고회사를 다니던 그는 1999년 희곡 ‘우울한 풍경 속의 여자’로 신문사 신춘문예에 당선돼 연극계에 첫 발을 내딛었다. 같은 해 ‘락희맨쇼’를 통해 극작가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발사 박봉구’ 등 촌철살인의 재기와 입담으로 금세 주목받았다. 또 창작뮤지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뛰어난 각색 및 작사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틈틈이 연출도 하던 그는 2005년 ‘마술적 리얼리즘’을 무대 위에 직접 구현하기 위해 극단 마방진을 만들었다. 이듬해 창단작 ‘모래 여자’를 필두로 ‘마리화나’ ‘강철왕’ 등 화제작을 연달아 발표했다. 빠르지만 리듬감 있는 화술과 생기 넘치는 에너지, 다소 과장된 움직임 등으로 대표되는 그의 연극 메소드는 극단에서 만개했다.


창단 5년째인 2010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각색한 ‘칼로 막베스’로 온갖 연극상을 휩쓸었고 2011년 ‘푸르른 날에’로 더 큰 찬사를 받았다. 이후 장르를 가리지 않고 손을 대는 작품마다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원작<욘> 은 다락방, 옥탑방에서 펼쳐지는 연극이지만 무대는 주택의 거실이나 창고처럼 꾸며졌고, 정원처럼 굵은 나무를 잘라 뿌리부분을 무대 앞부분에 남겨 정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각종 소파의 의자, 지구본, 탁자, 옷걸이를 배치하고, 검은 배경에 난 조그만 창에 눈 내리는 장면을 영상으로 투사해 날씨를 알게 한다. 마지막 장면은 모든 가구를 백색의 천으로 덮고 배경도 백색의 천으로 완전히 가리고 백색의 눈덩이 같은 조형물이 무대를 덮으면서 공연은 마무리가 된다.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 이남희, 엘라 정아미, 귀닐 이주영, 빌헬름 김신기, 엘라르트 이승우, 화니 최나라, 프리다 엄예지, 루카스 정원조가 출연해 성격창출에서 부터 감정설정은 물론 호연과 열연으로 연극을 이끌어가고 갈채를 받는다. 다만 연기자 중 일부가 객석만 바라보고 대사를 하는 것은 잘못된 설정이다.


드라마투르기 김미혜, 무대 김종석, 조명 류백희, 분장 장경숙, 소품 곽내영, 음악 김주현, 음향 김단경, 영상 김상완, 무대감독 김동균, 조연출 정혜리, 사진 윤문성, 그리픽디자인 스튜디오위윌락유 등 스텝진의 기량이 드러나 서울시극단의 헨리크 입센 작 김미혜 역 고선웅 각색 연출의 욘 John을 입센이 관극을 했으면 감탄을 했을 법한 독특한 공연으로 탄생시켰다.


* 주요경력


황해도 금천생, 서울고 서울대미대, 서울대학교 총동문회 이사, 극작가/연출가/평론가, 한국희곡뮤지컬창작워크숍 대표, 한국문인협회 희곡분과 위원, 전 서초연극협회 회장, 본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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