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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72] 헤이그 밀사 이위종 열사의 부친 '이범진'
  • 우성훈 기자
  • 등록 2024-02-20 20:52:07
  • 수정 2024-04-10 23: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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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우체국 앞에 있는 이범진 열사 집 터 표지석/사진-우성훈 기자] [우성훈 기자] 이범진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삼(聖三). 서울 출신. 훈련대장 이경하(李景夏)의 아들이다.


1879년(고종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쳐 1887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部事)가 됐다. 1895년 명성황후가 친로정책을 표방할 때, 친로파에 가담해 농상공부협판(農商工部協辦)으로 대신서리가 됐으나 명성황후시해사건 후에 사임했다.


1895년 11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주도했으나 실패해 러시아로 망명했다. 이듬해 귀국해 아관파천을 일으켜 김홍집(金弘集) 등을 몰아내고 친러내각을 성립시키고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됐다. 이후 1897년에 자원해 주미공사로 가서 외교에 노력했다.



1900년에는 주러시아공사로 전임돼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 공사를 겸임했다. 그런데 주러시아공사로 있을 때 러시아의 용암포(龍巖浦) 조차(租借) 요구에 대해 대한제국정부가 승인한다는 공문이 도착하자, 용암포 조차를 강경하게 반대하면서 공문을 러시아정부에 전달하지 않아 파면됐다. 그 뒤 서리공사 김인석(金仁錫)이 공문을 러시아에 전달하면서 복직됐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외교권 등 국권을 박탈한 다음 각국 주재 한국공사들을 소환하자 이에 불응했다. 그리고 양국 황제의 밀사(密使)의 명목으로 러시아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에 체류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주1에 고종이 파견한 밀사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 등이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하자, 그들과 협의해 고종의 친서를 작성하고 아들 이위종(李瑋鍾)을 밀사의 일원 겸 통역으로 동반하게 했다.


이범진 선생에게 내린 광무황제(고종)의 친필.그리고 러시아 황제에게 후원을 요청해 밀사들이 러시아 호위병의 보호를 받아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조처했다. 또한 러시아대표의 알선으로 각국 신문기자들에게 한국밀사들이 연설할 기회를 만드는 등 헤이그밀사 파견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1908년 연해주에서 이범윤(李範允)이 의병을 조직할 때 지원금을 보냈다. 보냈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못이겨 1911년 1월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했고 실패하자 목을 매 자결했다. 1912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한민학교(韓民學校)가 양옥 대건물로 신축해 다시 개교할 때 유지로 남겼던 1,000루블의 거액이 기금으로 쓰였다.


1963년에 대통령표창이,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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