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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58]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한 '이한응'선생비(李漢應先生碑)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2-18 07:34:14
  • 수정 2024-04-10 22:5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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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이한응선생비(李漢應先生碑)는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한 열사(烈士) 이한응(李漢應, 1874~1905)의 숭고한 나라사랑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한응열사추모회가 1960년 장충단공원(奬忠檀公園)에 건립했다. 이 기념비는 순국선열(殉國先烈) 중 가장 먼저 세워진 비석이다.



이한응선생비(李漢應先生碑)는 이한응열사추모회에서 죽음으로써 국권박탈에 항쟁한 이한응(李漢應, 1874~1905)의 나라사랑정신을 기리기 위해 1960년 장충단공원에 건립한 기념비로, 동상의 높이는 3m이고 부지면적은 23.9㎡이다. 이한응선생비의 뒷면에는 그가 남긴 유서가 새겨져있다.



대한제국 말기의 외교관이자 우국지사(憂國之士)인 이한응은 1874년(고종 11)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고 호는 국은(菊隱)이다. 어려서부터 사숙(私塾)에서 한학(漢學)을 익히다 1889년(고종 26)에 관립(官立)영어학교에 입학해 영어를 배웠고, 1899년(광무 3)에는 관립영어학교 교관에 임명됐다. 


1901년(광무 5) 3월 주한 영국.벨기에 양국공사관의 참사관으로 부임했고 1902년(광무 6)에는 공사 민영돈(閔泳敦)이 귀국함에 따라 특명서리공사에 임명됐다. 영국에서 외교관으로 지내는 동안 대한제국의 위상을 고양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1904년(광무 8)에 체결된 제1차 한일협약과 영일동맹 개정조약에 대해 죽음으로써 항쟁하기로 결심하고 1905년(광무 9) 5월 12일에 음독 자결했다.



이한응의 자결은 순국선열 중 일제의 국권박탈에 대한 최초의 자결이었으며, 1907년(융희 1) 이준(李儁) 열사(烈士), 1908년(융희 2) 전명운(田明雲), 장인환(張仁煥) 의사(義士)의 스티븐스(D. W. Stevens) 암살, 1909년(융희 3)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 의거로 이어

지는 등 일제침략에 반대하는 민족운동을 불러일으킨 큰 계기가 됐다.


해방 이후 ‘순국열사 이한응선생추모회’가 만들어져 그의 행적과 사상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순국선열(殉國先烈) 중에서는 장충단에 제일 먼저 기념비가 세워졌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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