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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52] 한국 최초 서양식 교회로 한국 최초의 파이프오르간 설치된 '정동제일교회'
  • 우성훈 기자
  • 등록 2024-02-15 10:48:04
  • 수정 2024-04-10 22:4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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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제일교회 전경/사진-정동제일교회 홈페이지[우성훈 기자] 정동제일교회는 1895년(고종 32) 착공해 1897년(광무 1) 10월에 준공된 개신교 교회 예배당으로,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가 세운 한국의 개신교 교회이다. 특히, 1897년 19세기 전원풍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 건물은 초기 개신교 교회당의 모델이 되었고, 1977년 그 역사적·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256호로 지정됐다.


정동제일교회 본당 전경/사진-정동제일교회 홈페이지

정동제일교회 벧엘관 파이프오르간/사진-정동제일교회 홈페이지정동제일교회는 한국의 개신교 교회로 이곳에서는 1800년대 후반 근대화가 한창 이루어지던 시절 민중을 대상으로 한 기독교 교육 그리고 독립협회에 참가한 학생들의 정치적인 활동이 이뤄졌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 서재필 박사, 한글 대중화를 이끈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과 같은 분들도 이곳에서 활동을 했다. 서구 열강과 동아시아 열강들이 몰려들던 시기에 외국어를 하고 서구의 지식을 이해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했는데 이들이 바로 그런 젊은이들이었다. 정동제일교회를 세운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는 이들이 공부한 배재학당의 교장이기도 했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1885년 자신의 사저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이 교회의 시초이다. 1887년 아펜젤러는 예배를 볼 수 있는 교회용 건물을 마련해 벧엘예배당이라는 이름을 짓는다. 1888년 국내 정치 상황으로 인해 문을 닫았다가 다시 문을 열었다. 교인 수가 많이 늘어나 1892년에 예배당 건축을 결심하게 된다. 아펜젤러는 공사에 필요한 비용을 미국 감리교의 도움을 받고 친지, 친구에게도 부탁하고, 국내 신도들의 헌금을 받아 정동제일교회를 세우게 된다. 공사는 1895년 시작해 1897년 10월에 마무리되었고, 같은 해 크리스마스에 예배당 준공에 따른 봉헌식을 가졌다. 


아펜셀러 동상


건축양식은 당시 미국 북동부에서 유행하던 전형적인 조지안 고딕 양식(Georgian Gothic Style)을 따랐고, 맥길(Willian B. McGill)이 공사감독을 맡고, 조선인 건축가 심의석이 시공을 담당하고, 일본인 건축가 요시자와 토모타로가 설계를 맡았다.


정동제일교회 내부 정면에는 1918년에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이 있다. 이 파이프오르간에는 유관순 열사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3·1운동 당시 일본 헌병에게 쫓기던 유관순 열사가 오르간 뒤에 숨었다가 무사히 도망쳤고, 이후 고향 병천으로 내려가 아우내 장터에서 3.1만세 운동을 주도했다고 한다. 후에 유관순은 3·1운동을 주도했다는 죄명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숨을 거두고 정동제일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유교 가치관이 엄격한 조선말에는 정동제일교회 안이라도 남녀 학생들이 따로 앉았고 사용하는 문도 달랐다고 한다. 배재학당 학생들과 남자 신도들은 교회 남쪽 문으로 들어왔고, 이화학당 학생들과 여자 신도들은 북쪽 문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리고는 서로 눈 마주칠 새도 없이 교회 가운데 휘장을 사이에 두고 따로 앉았다고 한다. 1910년대 이후가 되어서야 휘장이 철거돼 자유롭게 예배를 보았다고 한다.


개화기 당시 정동제일교회는 붉은 벽돌의 아름다운 서구식 교회건물과 그곳에 다니던 젊은 학생들의 진취적인 모습이 이채로워 많은 인파가 찾던 명소였다.





정동제일교회는 특정 종교시설이라는 개념을 넘어 개화운동의 중심지이자 신문화를 수용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교회 주변에 있는 배재학당.이화학당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사회문화 활동의 중심무대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1918년에는 한국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하고 성가대를 운영해 김인식 등의 음악가를 배출해내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에도 적극 참여해 민족대표 33인 중 정동제일교회의 목사였던 이필주와 장로 박동완이 포함되어 있었다.



현재의 정동제일교회는 처음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것이 아니다. 1917년 북쪽 측면을 확장하고, 1926년에는 570여㎡ 규모로 증개축 공사를 진행했고, 이때 종탑의 위치가 변동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초기의 십자가형태의 평면이 현재와 같은 직사각형의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이때 공사를 담당한 사람은 교회의 신자이자 정동 이화여고 심슨 기념관(당시 이화학당 심슨홀)의 증축공사를 담당했던 이명원이었다. 그리고 6·25전쟁 시기에는 건물의 일부분과 건물 안의 파이프오르간이 파손되어 1953년에는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진행하기도 했다./사진-우성훈 기자, 정동제일교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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