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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42] 여진족을 물리치고 6진 개척한 '김종서'
  • 우성훈 기자
  • 등록 2024-02-14 08:24:01
  • 수정 2024-04-10 22: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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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훈 기자] 김종서(金宗瑞, 1383~1453)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종(世宗) 때 6진 개척을 주도해 두만강 이남을 조선의 국토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로, 본관은 순천(順天)으로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세종시대에 왕의 총애를 받은 신하로 역사에도 정통해 다수의 역사서 집필을 총괄했고, 어린 단종(端宗)을 보필했으나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희생됐다.


김종서(金宗瑞, 1383~1453)는 조선 전기의 정치가로, 문무에 걸쳐 활약했고 여진족을 물리쳐 6진을 개척한 인물이다. 김종서는 도총제(都摠制)를 지낸 김추(金錘)의 아들로 1383년(고려 우왕 9) 양광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천(順天)으로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김종서는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해 1415년 상서원직장(尙書院直長)을 지냈고 1419년(세종 1) 사간원(司諫院) 우정언(右正言)으로 등용됐다. 이후 진제경차관(賑濟敬差官), 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1433년(세종 15) 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가 되어 여진족의 변경침입을 격퇴했고, 여진족에 대한 대비책으로 비변책을 지어 건의했다. 함길도에 8년 동안 머물면서 6진(六鎭)을 개척하고, 남방의 백성을 이주해 오도록 하여 북방경계를 두만강 이남으로 확정짓는데 큰 공을 세웠다. 1449년(세종 31) 권제(權踶) 등이 수교(讐校)한 《고려사(高麗史)》가 공정하지 못해 왕명으로 개찬(改竄)하게 되자 지춘추관사(春秋館知事)로 그 총책임을 맡았다.


1451년(문종 1) '고려사(高麗事)'를 찬진(撰進, 글을 지어 왕에게 올리는 것), 이듬해인 1452년(문종 2)'세종실록(世宗實錄)' 총재관을 거쳐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찬진했다. 이를 통해 역사에 대한 김종서의 식견이 남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사의 집필진은 모두 집현전 출신이었는데, 집현전 출신이 아닌 김종서가 그들을 지휘한 것을 보면 역사에 대한 김종서의 식견이 넓고 깊었던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김종서는 문종(文宗)이 승하하기 전에 좌의정이 됐고, 문종의 명을 받들어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등과 함께 어린 단종을 보필했다. 1453년(단종 1)에 수양대군에 의해 두 아들과 함께 격살되고, 대역모반죄로 효시됨으로써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됐다. 1742년(영조 22)에 복관됐고 충익(忠翼)의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제승방략(制勝方略)'이 있다. 서울특별시 중구 충정로1가 75에 그가 살았던 집터가 있다.


김종서(金宗瑞, 1383~1453) 집터는 조선 전기의 문신 김종서의 집이 있던 곳으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새문안로 16 일대에 해당한다. 김종서는 세종(世宗) 때 6진(六鎭) 개척을 주도하여 두만강 이남을 조선의 국토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희생됐다. 김종서 집터는 조선 후기 고마청(雇馬廳)이 소재했던 장소로 추정된다. 현재 이곳에는 농협중앙회 농업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1992년 농업박물관 앞에 김종서 집터 표지석이 설치됐다./사진-우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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